●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금호미술관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6_0427_목요일_05:00pm
금호미술관 서울 종로구 사간동 78번지 1,2층 Tel. 02_720_5114 www.kumhomuseum.com
김경화의 微視的, 巨視的 對面/ (어쩌다) 마주친 나는 누구인가? ● 화가 김경화의 사색여행. 사색 여행이란 어떤 여행인가? 그는 이번 기회에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여정이 사색 여행이라고 말한다. 그림공부를 위해 서울로 일본으로, 전시를 보기 위해 인사동으로 사간동으로, 강의를 위해 대학으로,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 심지어 장을 보는 일 역시 사색여행일 수밖에 없다. 그림을 업(業)으로 삼는 화가로서 여행은 또한 자연스럽게 그림에 대한 생각과 작품에 연결된다. 이렇듯 (일상)생활까지도 포괄하는 그의 사색여행의 의미를 잘 드러내는 것은 작품의 명제로 사용한 '소요(逍遙)'라는 개념이다. "마음 내키는 대로 슬슬 거닐며 다닌다"라는 의미의 '소요'가 사색여행의 보충대리적 개념이 되는 것이다. ● 그는 자신의 사색여행-소요를 세 가지로 분류해 본다. 숲(자연)에서, 도시에서 그리고 지구에서 소요하기. 마지막 '지구에서 소요하기'란 지구 위를 워킹하기(walking on the earth)로 그 동안의 외국 (스케치) 여행을 묶어 분류해 본 것이다.
1998년 첫 개인전 이후로 꾸준히 채색화 작업을 해오고 있는 김경화는 화훼와 풍경을 즐겨 다룬다. 풍경작업 특히 도시풍경에 최근 들어 다소 작업비중을 높이고 있는데, 아무래도 작가의 일상에 가장 가까운 풍경이기 때문이리라 생각된다. 도시풍경 가운데 고층 건물이 밀집된 서울풍경이 많고 그 일부로써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들 풍경처럼 거리 속 풍경도 눈에 띤다. 주목해 볼 것은 도시풍경에 물고기가 등장하는 그림인데, 물고기는 현대인의 부유(浮游)하는 존재감을 담고 있는 메타포이다. 그것은 곧 작가 자신의 내면이기도 하다. 여기서 물고기의 '부유'는 곧 물고기의 '소요'로 바꿔 읽을 수도 있는데, 앞으로 진행될 그의 작업방향을 예시하는 일종의 예고편이기도 하다. ● 그의 풍경은 여행의 흥취나 인상을 기록하는 것 보다는 어떤 풍경에 대면하여 자신 혹은 현대인을 반조(返照)하고 반추(反芻)하고자 하는 풍경에 가깝다. 삶의 여유를 잃고 경이로움을 잊고 살았던 '나'를 찾는 풍경인 것이다. ● "삶이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나는 자주 너무나 자주 이것을 잊고 살아간다. 누군가와 더불어 살고 있고 봄이 되어 새싹이 돋아 나옴을 볼 때 느껴지는 그 경이로움을 너무나 쉽게 잃고 사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 살아있고 그리고 무언가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함을 느낀다." (김경화, 1998년 개인전 카다록에서 발췌) ● 서울 어느 봄날, 화가의 눈에 파릇 돋아 난 새싹이 포착되었다. 그는 가던 걸음을 멈추고 그것을 잠시 무심코 바라본다. 그리고는 다시 걷는다. 걸으며 그는 생각에 잠긴 듯 하다. 그의 진짜 발은 아직 그 새싹 앞에 머물러 있는 것이 분명하다. ● 화가가 새싹을 보면서 느꼈다는 경이로움은 '찰나(刹那)'와 '영원(永遠)'이 동시에 느껴지는, 소멸(消滅)과 불멸(不滅), 망각(忘却)과 기억(記憶)이 '통째로' 일어나는 묘한 감정상태가 아닐까. 그가 내뱉은 '삶이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는 일종의 깨달음이라 할 수 있다. 그에게 직관적으로 다가온 '삶의 경이로움'은 좀더 구체적으로 따져 보자면 혼자가 아닌 '누군가 더불어 살고 있다'는 인식에서 비롯된다. 그 전까지 그는 그 사실, 혹은 삶의 진실을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 볼 것은 그 깨달음이 '마주침'에서 일어났다고 하는 점이다. 마주침 또는 '대면(對面)'이라는 것은 상호소통과 관계 맺기이다. 일테면 화가는 새싹과 대면했다. 그 대면을 통해 아름다움(美)의 본질을 찾아낼 수 있었다. 망각이 있기 때문에 기억이 가능한 것처럼 우리는 대상을 똑바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대면이 가능한 것이다. 그것을 통해 끊겼던 관계가 다시 맺어지고 소통의 언어를 찾게 되는 것이다.
그가 어느 봄날, 대면했던 새싹도 하나의 풍경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을 미시적 풍경(혹은 미시적 대면)이라면 도시는 거시적 풍경이다. 그의 풍경에서는 미시적 몽환과 거시적 몽환이 혼재한다. 정미(精微)와 조망(眺望)이 어우러진다. 이 세상의 일체의 외물(外物)이 덧없는 듯 화가는 무수히 많은 선긋기를 하고 경물의 중량감을 제거하는 것처럼 보인다. 무거운 것 가벼운 것, 밝은 것 어두운 것, 형형색색을 구별하지 않고 청록바탕 위에 선묘만으로 경물의 경계, 윤곽을 드러낼 뿐이다. 여기서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불확실한 경계가 발견된다. ● 그의 금니선묘풍경은 회화사의 전통을 생각해 볼 때, 불화(佛畵) 가운데 금분을 어교(魚膠)에 풀어 세필로 선묘하는 금탱화를 떠올리게 한다. 금탱화는 채색화의 화법 가운데 대상의 윤곽선을 중시하는 구륵법(鉤勒法)이나 백묘법(白描法)과 연관성을 가지지만, 독립적인 선묘 회화 가운데 독보적인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김경화의 회화는 많은 부분 불교 채색화의 전통에서 비교해 볼 수 있는 요소들이 많다. 그런 측면에서 일본에서 고려불화를 정밀하게 모사했던 그의 작품을 참조한다는 것은 전혀 엉뚱한 것이 아니다. ● 그의 선묘풍경을 보면서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인물과 화훼 그림에서 볼 수 있었던 아름다운 곡선이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단순히 그가 도시풍경을 택했기 때문에 불가피한 변화라고 생각지 않는다. 다소 그의 선들은, 곡선이든 직선이든 경직돼 보인다. 1회 개인전에서의 선들은 분명 춤을 추는 선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의 선은 멈춰있다. 이러한 현상은 3회 개인전에서 두드러졌다. 3회 개인전은 전보다 조형적으로는 정리되고 간결하고 상징화되었다고 할 수 있지만 1회 개인전에서 보여주었던 강렬한 선의 에너지가 상당 부분 감소된 것만은 사실이다. ● 산수화에서는 주름의 표현, 즉 준법(峻法)이 발달 되었다. 그러나 현대의 도시는 이 주름들을 용납하지 않았다. 거의 모든 주름을 평평하게 펴고 나서야 그 평지위로 건축물을 올리기 때문이다. 마치 이러한 평탄화 과정이 김경화의 작업에 나타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선묘풍경이 그 자체의 미학적 완성도를 가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선들이, 직선이건 곡선이건 꿈틀거려야 한다. 현대의 도시가 주름을 제거하듯이 그가 주름을 제거하지 않으면서 늙어 간다면 좋겠다는 바램을 가져본다. 그 주름은 삶의 주름이며 우주(시공간)의 길이며 여행의 기록과도 같다. 그것은 삶의 아름다움이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불확실한 경계이다.
사색여행-소요는 거울을 찾는 일과도 같다. 바로 자신을 대면시킬 수 있는 거울을 찾는 일이다. 작품은 감상자에게 하나의 거울이 된다. 이 거울은 단순히 여행정보를 알려주는 가이드북이나 TV프로그램이 아니다. 거울을 통해 우리가 대면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일 수밖에 없다. 모든 사물과 사물의 관계 맺기는 서로를 비추기 때문에 가능할 지도 모른다. 그것이 또 다른 맥락에서의 진짜 풍경-진경(眞景)이 아닐까? ● 그는 그림의 소재를 직접 발로 찾아 눈으로 확인하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누차 강조한다. 따라서 여행에 대한 계획도 많아졌다. 이래저래 화가로서, 생활인으로서 고민도 많지만 그의 생활의 중심은 역시 그림에 대한 고민-사색이다. ● 색이 빛이라면 선은 빛의 흐름이다. '나'에게 돌아오는 빛은 곧 망각과 동시에 기억이 일어나고 소멸의 순간 생성되고 찰라의 순간에서 영원을 향한다. 그에게, 우리 모두에게 반조의 시간이 찾아왔다. ■ 한산
Vol.20060427a | 김경화展 / KIMKYUNGHWA / 金敬和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