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GHT-SCAPE

김효준展 / KIMHYOJUN / 金孝準 / painting   2006_0426 ▶ 2006_0520

김효준_11 : 00 pm_캔버스에 유채_162.2×130.3cm_2006

갤러리현대 윈도우갤러리 서울 종로구 사간동 80번지 Tel. 02_734_6113

나의 작업은 현대사회의 실제적 모습의 재현이다. 이른바 문명, 진보라는 이름으로 산업사회를 긍정하는 관념과 그것을 중심으로 둘러싼 '현대 문화'라는 기름기 흐르는 상들이 실질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기만성을 그것이 실제로 만들어지는 과정과 결과를 전개, 대비시킴으로서 관람자에게 드러내고자 하며 미술수요자, 관람자 층의 대부분이 평생 경험하게 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직접적 생산노동'의 역할을 시각적으로 공개하여 재인식을 유도하는 것이 목적이다. ● 작업의 주제가 '노동'이라는 가치생산의 실질적 과정을 은폐하는 물신주의의 기만성을 공개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리얼리즘에 입각한 어법으로 그 작업과정이 진행된다. 나의 작업은 어떤 관람자에게는 작품을 대하는 것이 화려할 것도 없고 초라할 것도 없는 익숙한 도시의 일상을 바라보는 것이 될 수도 있고, 또 어떤 관람자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것을 인간의 눈과 손을 매개로한 재현을 통하여 재인식함으로서 자신의 익숙함 자체가 생경해 지는 경험의 제공일 수도 있다. ● 형식의 측면에서 한마디 덧붙이자면, 나는 개인적으로 그림은 대상의 다시 보기-재 인식- 의 계기를 마련하는 가장 본래적 형태(원시시대부터 지금까지 계속되며 앞으로도 계속될 탈 역사적인 것으로서)의 활동이라고 생각하며 작업의 형식을 그에 맞게 유지하고 있다. 그러므로 형식적인 측면에서 나의 작업을 그 결과물의 외관상의 유사성 때문에 사진과 비교하여 의미 운운하는 것은 힘이 쭉 빠지는 타당하지 않은 말처럼 느껴진다. 왜냐하면 사진은 또 하나의 인식의 대상에 불과하며 사진을 찍는 행위는 이렇게 저렇게 변형되더라도 결국 선택의 성격을 벗어날 수 없고, 대상의 디테일을 붓으로 구축해 나아가며(동시에 대상의 시각적인 형이하학을 드러내며)화면속의 대상을 만들어 나아가는 그리는 행위와는, 그 행위가 대상을 직접관찰하든 심지어 사진을 관찰하는 것이든 사진을 찍고 보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 결과물이 사진과 결국 어떤 차이를 갖는가라고 묻는다면 '그림은 터치를 남기고 행위를 환기 시키며 관람자가 그 터치를 따라간다'라고 나는 말하고 싶은데 그것이 그렇게 중요 한가 라고 다시 묻는다면 '당연히 그렇다'라고 대답하고 싶다. 또한가지, 그렇게 나온 그림은 관람자에게 무엇을 제공하는가라고 묻는다면 우선은 보는 즐거움일 것이고(동영상이 찍히는 휴대전화기를 갖고 다니는 지금의 초등학생들도 잘 그려진 재현화 앞에선 감탄사를 연발한다. 사진은 그림의 실용적 상품성을 대신하여 가져갖는지는 모르지만 본질적인 측면에서는 관계가 없다.) 나아가 앞서 말한 바로 그 지점에서 그려진 대상과 자신의 관계가 시대가 규정하는 목적을 떠나 실제로는 어떤 것인가, 또는 될 수 있는가를 다시 생각할 기회를 만든다고 하고 싶다. 우리가 좋은 그림을 보며 느낀 것은 바로 그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다른 사람도 이미 한 것이 아닌가 라고 묻는다면 당연히 그렇다고 할 것이고 나도 하고 있다고 할 것이고 앞으로도 누군가가 아마도 반드시 하게 될 것이라고 하고 싶다. 그러나 어쨌든, 경험은 경험자 자신에 의해서도 규정되므로 그림의 감상으로 얻게 되는 생각이 어떤 것인지는 관람자의 몫일 것이다.

김효준_야경-사당동_캔버스에 유채_162.2×130.3cm_2006

산업사회의 상징으로서 야경을 생각하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주지하는 것처럼 자본주의 사회는 이데올로기적 측면에서 그 계급의 존재와 모순성을 적극적으로 은폐한다는 데에 이전의 계급사회와는 다른 특징을 보인다. 산업사회 이전의 이른바 문명사회들도 계급의 존재는 마찬가지였지만 그것은 신분제적이었으며 감추어지는 형태는 아니었다. 의식적인 측면에서 그 사회를 유지시키는 것은 눈에 보이는 폭력,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자의 두려움이었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는 어쨌든, 외관상 그러한 폭력과 두려움에 저항하고 그것을 부정함으로서 튀어나왔다. 이른바 근대성은 이성이라는 이름으로 자유라는 이름으로 인간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 졌다. 자신이 그러한 간판을 통하여 성공한 것을 아는 부르주아 사회는 사실상의 폭력과 모순적 상황이 투명하게 공개 되는 것이 자신에게 불리하다는 것을 아주 잘 안다. 자본(또는 자본주의 국가), 자신은 충분히 강하지만 사실, 그 총구의 방향이 노동자(국민), 당신을 향해 있다는 것을 말하지는 않으며, 자신은 생각보다 강하지 않은데 왜냐하면 자신의 권력의 먹이와 집을 공급해 주는 것이 실제로는 노동자 국민, 무산대중 바로 당신임을 말하지 않는다. 당신들이 느끼는 공포는 자신의 것이 아니라 너희들이 만들어낸 것이라고 말하며 폭력을 자신의 뒤에 감추고 때로 그것이 우리를, 당신을 위협하는 적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고 때로는 옆집사람을 죽여 가며 그것을 증명해보이기까지 하는 자본(또는 자본주의 국가)은 어쨌든 군복과는 다른 옷을 걸치고 있으며 필요할 때마다 옷매무새를 고치고 바꾸어 입기를 즐긴다. 그 역사가 더해 갈수록 점점 능란하게 실체를 감추고 동시에 그 모습은 바야흐로 아름다워지기까지 한다. ● 도시의 야경은 산업사회의 발명품이다. 현대문화의 전체적인 성격이 그러하듯 모든 것이 스펙타클화 되며 도시의 풍경도 또한 그러하다.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야경은 하나의 볼거리가 되었을 때, 햇볕이 모든 것을 감추지 않고 폭로해버리는 대낮의 풍경과는 다르게 참으로 아름답다. 그러나 그 안에서 직접생활하고 거리를 걷고 일하는 자들에게 그곳은 그렇게 아름다운 곳이 아니다. 우리가 그곳에 직접 개입하자마자 그곳은 돌연 무엇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무서운 곳이며 무엇을 감추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불안한 곳이며 시끄럽게 떠들며 보여주고자 하는 것만을 보여주는 '불신스러운' 곳이며 온갖 불신과 이익이 상충하여 끼걱대는 전투장으로 변한다. 새벽이 되어 사람이 없어져도 그 화려함을 유지하는 야경은 자신이 떠들어 대는 말들과는 달리 사실 쓸쓸하고 외로운 곳이며 그와 동시에 그 모든 것을 감춘 공간이다. 그 자신이 산업사회의 결과물인 도시의 야경은 여러 가지의 면에서 산업사회의 모습과 상당히 닮아 있다. ■ 김효준

Vol.20060426a | 김효준展 / KIMHYOJUN / 金孝準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