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제

전좌빈展 / painting   2006_0420 ▶ 2006_0512

전좌빈_무제_캔버스에 유채_40×32cm_2006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대안공간 반지하 카페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6_0420_목요일_06:00pm

대안공간 반지하 작가지원전

대안공간 반지하 대전시 서구 갈마동 264-25번지 1층 Tel. 016_406_4090

대안공간 반지하에서는 평면(회화), 입체(조각), 영상, 설치 분야를 선정해 반지하 작가지원전을 개최 합니다. 본 전시는 각 분야의 작가들에게 실질적인 지원을 통해 지속적인 창작활동을 모색하는 사업으로 한국 문화예술위원회의 문예진흥기금으로 진행됩니다.

전좌빈_무제_캔버스에 유채_24×14cm_1996

그린이의 말 ● ...살이 - 4299해 봄에 태어남 ● 이리저리 뒹굴다 여기저기 눈치 보며 오늘까지 살고 있습니다. 여기 반지에서 처음 그동안 고민한걸 보입니다. 아는 이의 소개 로 만난 반지하 선생님들 고생이 많습니다. 이제까지 제 일들은(..살이)란 고민으로 모든 먹거리를 만드는 사람들에게 고마움도 모르고 맥없이 살았습니다. 이제 서야 그 고마움을 조금 알게 돼 겁도 없이 쪼존한 손놀림으로 끄적거렸는데 부끄럽습니다. 이 땅에 으뜸(쓸대가리)은 먹을거리 만드는 백성들이 곧 하늘이고 땅이라 ale고 있으며 모든 이 나라 사람들도 그렇게 으뜸으로 알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4338해 개복숭아꽃 활작필때.

전좌빈_무제_캔버스에 유채_53×45cm_1997
전좌빈_무제_캔버스에 유채_40×31cm_2004

전좌빈 회화 - 에피소드 없는 일상 ● 회화의 어떤 측면은 언어를 필요치 않습니다. 언어가 필요 없다 함은 도해가 잘 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전좌빈씨의 그림은 그런 면에서는 난해함을 보입니다. 그의 그림 앞에서는 도통 할 말이 없어지는 것 같습니다. 보통은 그림으로 어떤 말을 하게 마련입니다. 그 말이 많을수록 평론을 하거나 전시를 기획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다루기가 수월해 지는 게 사실입니다. 이런 의미, 저런 의미를 교차해 글을 끌어들여 무엇인가를 주장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미술계에서 주로 다루어지는 작가의 반열에는 언어로서 중무장되거나 무장한 듯 보이는 작가들이 자주보이고 그 작가들이 미술계의 주류를 이룹니다. 허나 우리가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미술, 정확히 말해 회화에서 다루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에대한 문제입니다. 회화의 시작은 작가가 무엇인가를 그려냄에 있습니다. ● 작가가 그림을 그린다는 행위는 포스터가 아닌 이상 발언을 전제로 하지 않습니다. 작가의 발언의지를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회화가 그다지 효율적이지 않습니다. 꽃을 그리면서 꽃의 이상을 심으려 애쓰는 작가는 기껏해야 꽃의 이미지만을 더듬거릴 뿐입니다. 이상하게도 단지 그리기만 하는 작가가 오히려 말없는 발언을 할 뿐입니다. 그 발언은 결코 교훈적이거나 설명적이지 않습니다. 작가가 말을 하건 안하건 보는 이들은 그림을 통해 무엇인가를 알아챕니다. 이러한 점이 언어가 필요치 않은 회화의 한 중요 측면입니다. ● 그런데 이런 측면에서 회화는 두 갈래로 갈라집니다. 한편에서는 발언의 빈곤이 장식으로 타고 흐르는 경향이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단지 재미를 추구하는 흐름으로 나뉩니다. 하지만 역시 장식이나 재미는 회화의 본령(?)을 벗어나기 쉽습니다. 화면구성의 장식이 눈에 띄는 것은 꽃의 외형을 정밀묘사 하는 것 과 비슷합니다. 식물로서의 꽃이 아니라 조화에 가깝습니다. 쉬이 생산되고 쉬이 사그라지는 유행이 됩니다. 재미는 회화가 시작되기 위한 필수조건이지만 재미는 즉각적인 반응(그림과 관객사이)에 감탄사만을 유발합니다. 재밌는 것은 단지 신기할 따름입니다. 신기한 것은 회화가 아니더라도 무수히 많습니다. 이쯤에서 회화는 고민에 빠집니다. 재기발랄함과 장식적 아름다움 그리고 발언의 강박에 치우치지 않는 회화를 고민해 봅니다.

전좌빈_무제_캔버스에 유채_45×53cm_1997
전좌빈_무제_캔버스에 유채_45×53cm_1997

전좌빈씨의 작업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언어의 도움이 필요치 않습니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사물은 삽이나 구름, 지평선 자락에 걸린 한 두 채의 집과 메마른 나무같이 단순한 것들이자 일상적인 것들에 가깝습니다. 그것은 작가의 공간입니다. 그의 그림에서는 사람이 잘 등장하지 않는데 일상적인 것에 매료된 작가들이 사람의 행위와 관심사를 주된 소재로 삼아 나열하는 것으로 볼 때, 그의 공간은 희로애락이 묻어나는 생활의 공간이 아니라 절대적인 일상에 가까워 보입니다. 이는 작가가 화면에서 필요치 않은 사건을 만들어내지 않는 공간이자 에피소드 없는 일상입니다. 또 언덕이나 들판에서의 집들은 하나같이 기우뚱한 모습들로 그려져 있습니다. 구체적인 묘사가 사라진 자리에 산발스런 붓 자국이 대기나 사물을 흔들고 다시 고요하게 만듭니다. 이는 극단적인 긴장을 이끌어가기 위한 방법으로도 보이나 작가의 의도가 개입된 것이 아닌 체득된 것으로 읽혀집니다. ● 작가는 크게 하늘과 땅으로 양분된 세계를 펼쳐 보입니다. 땅엔 밥이 가득한 그릇과 밥풀처럼 보이는 흙에 거친 삽이 꽂혀있습니다. 땅을 일구는 쇠스랑은 하늘에 떠있는 밥알 같은 구름에 단호하게 박혀있습니다. 그의 하늘과 땅은 어떤 이미지로서의 대상이 아니라 바로 이 자리, 군더더기 없는 지금을 보여줍니다. 풍경으로서의 하늘과 땅을 현실로 끌어내리는 방법을 한두 가지의 변형을 통해 -작가에게는 실제로 그렇게 느껴지는- 가볍고도 절실하게 전환시킵니다.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대비되는 하늘과 땅은 바로 회화의 말없는 발언에 가깝습니다. ● 좁고 길 다란 소로처럼 보이는 자주 등장하는 길은 끊어질듯 이어지고 언덕으로 사라지고 결정적인 갈라짐이 있습니다. 결정적인 갈라짐과 위태로운 길이 작가를 불안하게 만듭니다. 자칫 붓끝에서의 재미나 구도에로의 몰입에 경도되기 쉬운 작업을 지탱하고 있는 것은 어쩌면 그 길 끝에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전좌빈씨는 어떤 의미에서 작업을 열심히 하는 작가는 아닙니다. 그의 작업은 오히려 취미선상에서 나오는 그림일기가 될 수 도 있겠지만, 사소한 일상의 흔적을 담아내는 일에 별반 관심이 없음이 그의 그림을 일상적이지 않게 하고 모종의 회화성을 유지하게 합니다. ■ 대안공간 반지하

Vol.20060424c | 전좌빈展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