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머리 속의 수도꼭지

강태훈展 / KANGTAEHUN / 姜汰勳 / mixed madia   2006_0421 ▶ 2006_0430

강태훈_매스게임_컴퓨터 프린트한 두 개의 사진과 한 개의 수도꼭지_230×638×40cm_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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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6_0421_금요일_06:00pm

대안공간 반디 부산시 수영구 광안2동 134-26번지 2층 Tel. 051_756_3313 www.spacebandee.com

내 머리 속의 수도꼭지를 틀며... 입양에 대한 단상 ● 유물론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의 생명을 잉태하는 임신과 출산, 이 분야에서 사람은 자신이 낳은 아이의 세포분열에 조차 개입할 수 없으니 '디자이너'라는 직함도 얻기 힘들고 정확하게 '재료 조달자'일 뿐이며 양육에 있어서는 성공적이든 그렇지 못하든 '플래너' 정도라면 친부모 기능에 만족해야 한다. 한편 아이를 입양했을 경우 부모는 '재료 조달자'를 포기하고 오로지 양육하는 '플래너'로서의 기능을 도맡는다. 물성의 재료를 구해서 형태를 연구하고 제작하는 조각가에게 '기성품'이라는 '사물'을 구입해서 '작품'으로 내놓거나 '작품재료'로 선택하는 '입양'은 미술사에서 마르셀 뒤샹이 시도한 이후 지금까지 지구촌의 예술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쳐왔다. '나의 작품은 사물을 이용하는 방식이다.'라는 선언과 함께 '사물의 입양'을 진지하게 추진하고 있는 부산의 한 젊은 조각가에게서도 마르셀 뒤샹의 영향력은 확인할 수 있다. 그는 1년 전 석사 논문에서 '기성품 입양'을 크게 수집, 브리콜라주, 사물의 기호화, 사물의 물신주의적인 경향 등으로 나누어 설명한 바 있다.

강태훈_구명환_구명환과 네온 그리고 12개의 수도꼭지_230×116×70cm_2005

1. 사물의 발견 ● "그것이 나를 바라보지 않아도 나는 그것을 바라 볼 수 있다." 사물의 일반적인 기능을 꼽으라면 흔히들 '사용되는 것'과 '소유되는 것' 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렇게 기능되기 까지 주관적인 경험을 통한 '사물의 발견'은 객관적인 '사물의 기호'와 밀접한 관련성을 띄며 상호 영향을 끼친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그 이전까지 강태훈 에게 '수도꼭지'는 그냥 '사물'에 불과했다. 그러나 젊은 예술가에게 어린 시절의 기억은 파편화되어 수도꼭지를 '사물'에서 '도구'로 진화시켰고 결국 '작품'의 키워드로 설정하게 한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아시아게임의 마스게임에 동원된 수백 명의 어린이중 한 명이었던 강 태훈은 당시 광주의 수많은 무고한 생명과 정권을 맞바꾼 각하에 고무되어 일사 분란하게 작동되는 구조 속에서 현기증을 일으킨다. 어린 그가 어떻게 정치적인 상황을 이해했겠는가. 다만 그것은 일사 분란한 훈련을 요구하는 마스게임에서 혹사당하는 예민한 어린 몸이 갖는 의구심의 연장일 뿐이다. 그는 이렇게 기억을 떠올렸다. " ...몇 시간의 고된 연습 속에 10분의 쉬는 시간이 되면 700여명의 학생들이 일제히 수도꼭지를 향해 달려가서 목을 축였다. 기적은 거기에서 시작되었다. 수도꼭지는 나에게 마치 성배와도 같은 존재로 인식되었다. 그 후로도 가끔 수도꼭지는 내가 처해있는 상황이 열악할 때면 이따금 나에게 기적의 기능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인간이 처해있는 상황에서 사물이 이루어 내는 기적인 것이다..." 차갑고 딱딱한 스테인레스 수도꼭지는 목이 타들어가는 아이들을 적셔주는 구원의 젖줄이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바로 그것이 강태훈의 작품에 등장한 '수도꼭지의 출생비밀'이라는 사실에 있다.

강태훈_내 머리 속의 수도꼭지展_대안공간 반디_2006

2. 사물의 진화 ● 사전, 금서, 소화기, 거북이, 여자구두, 목탁, 숯, 타조알, 시계, 그림, 지도...그리고 수도꼭지들, 그가 선택하고 수집한 이들 기성품은 하이데거의 분류방법에 의하면 크게 '사물'과 '도구'로 나뉜다. 형상으로서의 질료인 사물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사물' 즉 인간이 필요해서 만든 '도구의 성격'을 말한다. 그런데 친절한 하이데거는 곧 이렇게 정리해준다. "인간은 '사물'을 가지고 '도구'를 만들고 거기서 실용적 목적을 제거함으로써 '작품' 존재에 도달한다." 그의 이론을 통해 강태훈의 사물을 보면 위에 나열한 사물들은 더 이상 사물이 아니라 용도가 분명한 '도구'였다. 그러나 이 젊은 조각가는 수도꼭지를 '도구존재'로 설정하기 위해 나머지 사물들의 '도구성'을 제거해 버린다. 가령 수도꼭지가 붙은 벽시계의 경우, 벽시계의 기호는 조연을 맡고 수도꼭지의 기호는 주연을 맡는다. 하이데거식의 표현을 하자면 그런 의미에서 '도구인 수도꼭지'는 '사물'인 시계와 완제품인 '작품' 사이에 있다. 이렇게 해서 '사물'과 '도구' 그리고 '작품'의 연계와 사물의 위계가 짜여 진다. 그리고 사물의 조합물은 소위 '목적 없는 합목적성'의 형식을 갖추어 '쓸모없는 쓸모'의 작품으로 진화한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아우라를 부활시킨다. 이를테면 일반 사물인「사전」의 상품성은 그 자체가 예술을 탈 신비화하는 장치로 예술적인 아우라는 애초에 부재했다. 하지만 「사전」은 작품의 기성품으로 선택되면서 스스로 미술을 신비화하는 장치로 기능 한다. 그런데 작품의 일부로서 채택된「사전」에 작가는 '수도꼭지'라는 도구를 부착함으로서 사전이 지닌 신비화의 장치는 치명적인 손상을 입고 아우라는 깨져 버린다. 하지만 그것은 과정에 불과하다. 멀쩡한 사물에 수도꼭지를 부착한 '기형적 사물'이 도달한 '작품'에 신비화의 장치는 곧 회복되고 아우라는 부활한다.

강태훈_지도_혼성 미디어_230×386×50cm_2006

3. 일탈의 파종 ● 어린 시절 대형 경기장에서 그가 체험한 마스게임 훈련은 '사물의 발견'뿐만 아니라 '작품의 주제'에 까지 영감을 준다. 어린 소년들과 교사들의 일정은 당시 집권자의 5분 출연에 황송하게 헌납되었고 이렇게 작동되는 고장 난 '운명기계'속의 작은 부품이 된 미래의 조각가는 일탈의 싹을 키워나간다. 그의 소년시절 경험은 청년이 되어 청와대 근처에서 군복무 했던 시절까지 연결되는데 흥미로운 점은 그가 민주화의 격렬한 시위 현장이나 5.18광주사태의 피해자가 아니라는 점, 오히려 직접 피해자인 이들과 일정한 거리와 벽을 둔, 어쩌면 가해자와 근접한 영토에서 폭력과 광기의 기운을 소년의 시선과 안테나로 감지했다는 점에 있다. 또한 그는 예술가적 직감과 감수성으로 성인이 될 때까지 내면적으로 지속적인 분열을 멈추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그는『양철북』의 오스카처럼 특별하게 감지되는 경험에 대한 희석과 망각의 성장을 의도적으로 멈추게 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 작가에게 개인적 경험은 도구로서 '수도꼭지의 발견'뿐 아니라 '새로운 제국'을 꿈꾸게 하는 파종의 동기가 된다. 이번 전시 작품 중에 작가의 오래된 앨범에서 꺼내온 대형 경기장의 마스게임 현장 사진이 확대되어 있다. 그 속에는 어린 강태훈이 훈련된 마스게임을 애써 완벽하게(?) 펼쳐 보이고 있다. 그리고 그 옆에 성인이 된 강태훈이 입에 '수도꼭지'를 문 채 찍은 확대된 명함판 사진이 걸려있다. 그리고 입에 물린 '수도꼭지'는 스피커처럼 이렇게 울린다. '다수를 위해 소수가 희생되어야 한다는 사악한 미덕이 우리에게 존재한다.' (The vicious virtue that the sacrifice of the small number must be carried out for a large number exists in us.)

강태훈_하이힐_한 짝의 하이힐과 한 개의 수도꼭지_28×16×27_2006

4. 치밀한 비합리성 -하이힐과 목탁- ● 발칙한 상상을 하게 하는 호피무늬의 안감이 깔린 빨간 하이힐의 굽 자리에 생뚱맞게 부착된 수도꼭지나, 짓궂은 동승이나 저질렀을 법한 목탁에 붙인 수도꼭지 등에서 작가의 분열증적인 집착은 추적당하는데 하이힐의 굽 소리와 목탁소리를 연주하는 기제로서 작동되는 수도꼭지는 이 둘의 자력을 조절한다. 그럼으로써 수도꼭지의 청각적인 효과는 욕망을 불사르고 시각적인 효과는 그 불을 끈다. 사용 가능한 멀쩡한 상품들, 그것 자체로서 자족성을 갖는 기성품들에 가해지는 '수도꼭지의 부착'은 불친절하게도 사물의 원 기능을 고려하지 않거나 문맥상 연결이 되지 않아 기형의 사물을 생산해내며 불협화음을 낸다. 그러나 그의 작품 앞에서 서성이다 보면 이내 곧 '이성 대 비이성'이라는 치밀한 변증법은 불쾌한 불협화음이나 긴장의 대상이 아닌 새로운 화음으로서 유희의 주체가 된다. 그리고 그의 치밀한 비합리성은 레지스 드레브의 말을 상기시킨다. "비 합리적인 것의 상승은 응용 과학성의 한계점의 상승과 병행한다. 그것은 일종의 데체 효과이다. '객관적'인 세계가 더욱 합리화 될수록 비합리적인 것이 주관적인 것을 사로잡는다."

강태훈_거북이_거북이 박제와 3개의 수도꼭지_60×45×25cm_2005

5.환각적 조각에 대한 폭력 -박제된 거북이- ● 작가의 지적대로 '한 때 집집마다 걸려있던 거북이'는 집단 무의식이 연출한 일종의 종교적인 매개조각이다. 우리는 주위에서 이런 현상을 흔히 목격하게 되는데, 현대인의 불안감은 종종 특정 동물의 멸종을 담보로 위로받는다. 사람과 상품의 환각 안에서 사물은 "생명을 부여받은 독립된 존재로" 나타난다고 맑스는 지적한 바 있다. 그의 이런 주장으로부터 상품 물신주의와 종교 사이에 끌어낸 어떤 공통된 유출점인 '환각적 상품'은 바로 거북이며 강태훈이 '환각적 상품'의 등에 수도꼭지를 박아 버리는 행위는 일종의 폭력적인 야유다. 맑스가 말한 '상품 물신주의와 종교 사이의 유추를 끌어낸 것'으로서의 사물을 민감하게 체험한 작가의 폭력성(?)은 다만 절제된 미술 전시의 형태로 은폐되었을 뿐이다.

강태훈_공화국의 죽음_혼합매체_230×329×80cm_2006

6.확장된 스토리 -마라의 죽음과 지도 - ● '수도꼭지가 달린 시계'는 프랑스 혁명 시기의 어느 살인사건의 현장으로 안내한다. 이것은 샤를루트 코르테에 의해 혁명가인 마라가 암살당한 것을 안타까워한 다비드가 그의 죽음을 생생히 중계하듯 그린 그림이다. 세계적으로 명성이 자자한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도 강태훈에게 일반 사물로 부름을 받았다. 그런데 명화의 아우라는 워낙 강력해서 기성품인 그림에다 수도꼭지를 부착해서 아우라를 붕괴시키려 해도 쉽게 해체되지 않는다. 그래서 인지 여기에 부착된 수도꼭지는 그림의 브랜드만큼이나 특별하다. 작가는 다른 수도꼭지들은 눈으로만 더듬게 하더니 마라 집 욕조의 배수구격인 수도꼭지에서는 실제로 물이 나오게 해 오감이 즐겁다. 수도에 정수처리가 된 것처럼 암살된 마라의 흔적인 핏물과 그의 피부병에서 나온 불순물들은 마치 여과된 듯, 수도꼭지에서는 맑은 물이 흐른다. 그런데 수돗물의 투명함은 마라의 죽음을 지우려고 한다. 동시에 물 떨어지는 소리는 제3의 음모가 깔려있음을 암시하듯 관람자들을 긴장시킨다. 이 그림을 그린 화가인 다비드는 예술가로서 「프랑스 혁명」이라는 격동적인 정치적 상황에 적극적인 개입을 했다. 탁자구실을 하는 편지함에는 '마라에게 다비드가'라는 화가의 필체가 적혀있지만 이 작품은 '마라에게 강태훈 이' 보내는 편지일 수 있다. 특히 강 태훈은 마라의 편지 내용 중에 "공화국을 해체하라"는데 주목하며 다비드 이상으로 마라의 죽음을 미화시키고 그 결과 마라와 건너편에 걸린 세계지도를 연계시킨다. 따라서 마라의 머리가 향하는 맞은편에「지도」작품을 설치해두었는데 주변에는 몇 장의 작은 흑백사진을 볼 수 있다.?왼쪽에는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이자 관광특구인 해운대에 줄지어 들어서는 '아파트'와 '갯벌', 아래에는 해운대에서 '사라지는 모래' 사진과 '수도꼭지 오브제' 작품이 놓여있으며 오른쪽에는 '항공모함'과 '주차금지'라고 쓰여 진 물통사진이 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전 세계 국방비' 수치가 기록되어 있다. 또한 작가는 이 고발된 기록과 세계지도 아래에 "인간의 영토에 대한 보편적 관념은 재고되어야 한다. (The universal idea over territory must be reconsidered.)" 고 밝히고 있다. 젊은 작가에 대한 잔상 ● 강 태훈은 부산에 위치한 대안공간인『반디』에서 '첫 개인전'을 석사 청구전의 연장선에서 소리 없이 준비했다. 최근 4년 동안 내가 지켜 본 강태훈은 작품의 구조적인 측면뿐 아니라 작품의 아이디어에서 완성도에 이르기까지 비교적 안정적인 진행을 해왔다. 내가 그에게 거는 기대가 너무 커서일까. 이번 전시에서 그에 대한 작가로서의 가능성과 믿음은 생겼지만 그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작품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고 본다. 와중에 희망적인 사실은 그의 이번 작품이 여러 부분(현대미술의 특성)을 아주 조심스럽게 건드리고 있다는 것이다. 앞으로 그에게 적잖이 예상되는 현실적인 어려움은 그가 이미 석사 논문에서 언급한 바 있는 물신주의에 대항하는 방법이다. "...하나는 비 물신주의적인 미술이 상품물신주의에 의해 현혹된 사회의 "종교적 반영"에 저항하여 '일상적 삶의 실질적인 관계들'(맑스)의 투명성을 추구하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자본주의 미술의 거대한 이율배반을 반영하는 물신주의적인 작업을 통해서 물신주의를 비판하는 작업이다..." 그가 이 문제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풀어갈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으나 분명한 것은 이러한 방법을 은근히 즐기려는 그의 취향에 낙관한다. 그리고 들리는 바에 의하면 그의 두 번째 전시는 그가 지닌 이면의 모습을 쏟아낼 것 같은데 쾌감을 줄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템포나 정반합의 사이클로 봐서 나는 무작정 그의 세 번째 전시가 기다려진다. ■ 이 름(작가)

Vol.20060422a | 강태훈展 / KANGTAEHUN / 姜汰勳 / mixed madia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