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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6_0405_수요일_06:00pm
갤러리 라메르 서울 종로구 인사동 194번지 홍익빌딩 Tel. 02_730_5454
자연과 생명, 현상과 본질을 탐색해가는 과정 ● 미술작품은 사회적 삶을 통해 겪은 예술가의 체험을 심적 긴장감으로 육화시켜 창조적으로 표현하는 지적?정서적 활동의 결과물이다. 물론 그것은 자연, 인간, 역사, 삶 등 작가의 예술적 성취를 위한 표현대상을 무엇으로 정했는가, 또 그 '방법적 수단(heuristic means)'은 무엇인가에 따라 각양각색으로 나타날 수 있겠지만,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예술가적 진정성은 개성적으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특히 추상 화가로써의 예술적 성취는 화면에 몸을 던져 심육(心肉)이 만신창이가 된 상태에서도 형상 이상의 것을 찾아 동일한 시공간에 투사할 수 있는 예술가적 직관과 작가적 근면성이 전제되어야 가능한 일일 것이다. 물론 필자는 정원이 이러한 필요조건을 완벽하게 충족하고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 정원의 작업장에서 작품들을 보면서 필자가 느낀 것은 이제 작가의 길로 접어든 그가 지난하고 고독한 작업과정을 스스로 즐기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그는 스스로 시행착오를 극복하고 다양한 실험 작업을 통하여 새로운 조형언어를 찾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자연-변주 ● 정원의 작업세계를 보게 되면 일단 그의 작품들은 자연과 동떨어져 있는 것 같으면서도 여전히 자연의 이법 안에서 잉태되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게 된다. 그가 구사하는 페인팅의 기법적 측면을 보자면 작가는 화면에서 물감이 스스로 흘러내리거나 서로간의 작용에 의해 형태와 색채가 살아나도록 방치하는 소극적 방식을 선호함을 알 수 있다. 그는 자연의 대상이 갖는 형상성을 염두에 두면서 물감 자체의 변주와 유?무형의 형태가 갖는 서로간의 긴장관계에 주목한다. 왜냐하면 자연을 재현하고자하는 의지와 세계를 자신에게로 이끌어 안착시키고자하는 욕망, 즉 재현의지와 창조욕구는 서로 상충되기 때문이다. 이 투쟁의 긴밀성이 이루어지는 곳에 바로 그의 작품 속에 내재한 작가적 인식의 본질, 또는 진정성이 존재한다. 그러한 가운데 드러낼 주제가 부각되고 작가의 감성이 거리낌 없이 촉발되어, 자연이라는 출발점으로 그의 예술을 되돌려 놓게 되는 것이다. ● 이때 작품의 구상(構想)에서부터 마무리에 이르는 그의 작업과정은 지난한 노고와 반복적인 작업, 그리고 회한과 열락이 서로 교차하는 긴장과 이완의 상충점이 된다. 물론 이점은 대부분의 추상 화가들에게 공통적으로 보이는 것이기도 하지만, 정원의 경우 아직 학창시절에 수련했던 구상작업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못할 시기이기 때문에 형상에 대한 잠재적인 애착을 떨쳐버릴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더 이상 형상에 얽매이지 않아도 된다는 해방감보다는 형태뿐 아니라 추상정신과 조형요소의 다중적인 차원을 포괄하는 시각에 접근함으로써, 그의 회화적 지평을 확대하고자 노력한다. 이 점은 그가 페인팅은 물론 오트파트나 드리핑, 그리고 콜라주나 오브제의 사용 등 현대 추상회화의 다양한 형식언어에 깊이 천착하는 것에도 잘 나타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그는 묘사적 방법론 뿐 아니라 형태까지도 해체시킴으로써 형상에 향수를 불러일으키게 하는, 즉 비형상으로 형상에 도달하는 역설을 통하여 형상에 새로운 언표를 부과하고 있는 것이다. 균제와 균형, 그리고 비례의 미를 추구한 그리스미술에서 조차도 확실한 현실보다 부재하는 이상을 지향했듯이 말이다. ● 결국 그에게 있어 회화적 변주는 우리가 자연에 대하여 품고 있는 통상적인 인식(대상들의 비례, 원근법, 명암법 등)을 새롭고 직접적인 감각의 대체물로써, 언어와 메시지 그리고 마침내 이미지조차도 불분명한 무념의 공간을 창출하는 통로가 되는 셈이다.
추상-생명 ● 이때 우리는 형태와 색채의 파격적인 배합이 반드시 부조화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고, 처리하기에 따라서는 오히려 새로운 가능성과 조화를 보여줄 수 있다는 점을 인지하게 된다. 그가 오방색을 사용하여 고색창연한 무채색을 이루어내듯, 하나하나의 대상들은 분명히 화면 안에서 형태로 존재하면서도 하나의 빛, 색채, 선 등의 회화적 요소를 이루며 화면과 공존한다. 이를테면 그의 근작의 경우 특정한 무엇이라고 규정할 수 없는 형태들이 화면에서 비중 있는 역할을 하면서도 여백과 동등한 입장에서 자신을 노출시킴을 알 수 있다. 종횡하는 선과 꿈틀거리는 갈색조의 유동, 그리고 이에 의해 달성된 형태들은 자유의 극점을 향해 치닫는 듯 격정적이다. 나무, 모래 등 오브제는 물론, 흘리기나 꿰맴 기법(needle working) 등 현대회화의 다양한 메커니즘이 우리의 시선을 끄는 가운데, 어느덧 그 격정은 고요함으로 침잠되고, 작가의 감정은 물론 그리는 행위의 처절한 고통감마저도 시간의 영역을 거슬러 우리에게 이입된다. ● 이렇듯 무질서 한듯하면서도 고도의 질서를 보여주는 정원의 화면이 정교한 구조가 부재하거나 색채가 무력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서 간과해선 안 될 점이 하나있다. 그것은 바로 혼돈이란 에너지의 근원이고 질서는 에너지의 총화라는 점이다. 이러한 가운데 회화의 통일성이 드러나고, 색채를 회색이나 갈색으로 단색화 함으로써 평면성을 강조하는 가운데, 작가는 원색의 색점이나 오브제를 가함으로써 작가 자신의 분방한 감각을 과시하고 있다. 그가 이루어낸 형태는 이성에 의한 통제를 직관으로 제어하고, 관념의 공전을 진정성으로 실천하는 가운데, 물자체가 스스로 추동하도록 내버려 둠으로써 이의 생명성을 보장하고 있다. 이처럼 시간적 긴장 이후에 공간적 실존으로 구체화된 그의 작품은 빛과 조우하여 예기치 않은 미적 가치를 유발하는가 하면, 형태가 주는 미묘한 파동으로 인하여 강한 생명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 이렇듯 정원이 회화적 본질에 대한 자문자답을 통하여 얻어낸 격렬하고 거친 화면은 모더니즘의 궤적 안에서 설명할 수 있으나 오히려 풍부한 상상력과 시대정신을 갖고 있다. 또 창조적 개인의 역량으로써의 그의 회화는 고정된 형식과 틀을 벗어나고자 하는 작가적 욕망과도 결부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그의 작품은 동 시대의 예술이 고민해온 문제의식이 그의 거친 감성을 통하여 속도감 있게 관객에게 전해지는 매개체로써 스스로 추동하고 사유케 하는 유기적 생명체로 존립하게 되는 것이다.
물질-대상 ● 이런 측면에서 정원의 회화는 재현과 창조, 즉 감정이입과 추상충동의 접점에 위치한다. 우선 그는 전통과 현대, 주변과 자연, 인간과 우주에 이르는 다양한 가치들에 대하여 지고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가 지속적으로 다루어 온 물질들은 화면의 추상표현주의적 경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의 대상으로 존재한다. 이 대상이미지들은 격정적인 화면에 매몰된 듯 하다가도 여전히 스스로 형태론적 위상을 유지하면서 자신의 존재가치를 부각 시킨다. 화면 위에서 다시금 물감의 편린들이 유동하고, 화면 안에서 각기 자신의 고유한 영역을 점유하던 유형?무형의 형태들은 물질들의 파고에 휩싸이면서 일체화 된다. ● 한편 그의 화면에서 보여 지는 격정의 흔적들은 작업과정의 치열한 시공간적 긴장관계를 잘 대변해주고 있다. 즉 고색창연한 무채색조의 정취가 화면의 기조를 이루는 가운데 작가는 작품의 완결미 보다는 창조의 과정과 순환의 원리, 그리고 회화의 본질을 탐색해 간다. 여기에서 우리는 대기를 통과하는 빛의 파장과 그 안에서 몽유하는 대상들의 신비로운 움직임을 목도할 수 있다. 베일에 가려진 듯 희미하게 드러나거나 반대로 생명을 머금은 듯 꿈틀거리는 형상들은 생명의 근원이나 원초성 같은 것일 게다. 이러한 형태들은 대상과 미묘한 대위법(對位法)을 이루며 화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그것은 추상회화가 중요한 가치로 부각시킨 순수미와 절대미의 경지를 보여주면서도, 하나의 대상으로 존재하며 화면 안에서 선, 형태, 색채, 물질 등 미학적 요소를 규정짓는 규준으로 작용한다. ● 이상에서 본 정원의 그림은 다양한 형식실험과 작가의 세계관이 담지된 작가적 고뇌의 산물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그의 작업은 자연이라는 소재적 일관성에 천착하면서도 그 본질을 사유해가는 '과정'으로서의 의미가 더 크다. 특히 오늘날의 미술작품이 하나의 대상으로 완전하게 결정 된 것이 아닌, 수용자의 해석이 계속해서 영향을 미치는 일종의 생명체적 존재임을 상정해 볼 때, 정원의 작품세계는 변화의 주기에서 이를 추동해가는 하나의 유기체로 해석함이 옳을 것이다. ■ 이경모
Vol.20060406c | 정원展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