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을 기록하는 매체의 음향

임영택展 / painting   2006_0405 ▶ 2006_0418

임영택_무제_종이에 볼펜_56×76cm_2004

초대일시_2006_0405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휴관없음

갤러리 고도 서울 종로구 수송동 12번지 Tel. 02_720_2223_4

몸을 기록하는 매체의 음향: 임영택의 볼펜화 ● 붓과 캔버스로 제작하는 틈틈이, 그리고 학생을 가르치거나 일상의 삶을 꾸리는 분주한 가운데에서도 임영택은 자주 볼펜으로 평면을 긋는다. 이 일은 지난 30여 년간 지속되어왔다. 그러던 중 1975년의 한 단체전에 그의 볼펜화가 처음 소개되었고 1983년과 작년에 그의 개인전에서 볼펜으로 제작된 본격적인 연작들이 걸렸다. 그의 연작들에 대한 관심은 주로 "행위 그대로 창출되는" 자동기술(automatic writing)이나 "누에고치에서 실이 뽑아지듯"한 "무아지경"에 모아졌다. 미술가는 "볼펜이 저절로 움직이는 것 같은 묘한" 경험이라고 자신의 제작 공정을 언급한다. 그의 화면에서 선들이 반복되어 응축된 색 면의 덩어리는 생겨나고 자라고 소멸하는 대상에 관한 생태학적 형태를 암시하는 듯하다. 이들 관심과 이 외관의 모습으로 그의 회화를 초현실주의의 한 가지 사례로 지적하기에 어느 정도는 일리 있을 법하다. 하지만 그의 형태는 비유에 전적으로 의존해 있지 않고 현실에 경험 가능한 뚜렷한 형태를 못내 피하고 있다. 더욱이 펜화의 전통으로 볼 때 볼펜이란 재료가 그렇게 생소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나는 임영택의 제작 태도와 재료, 그리고 그의 회화공간에 주목한다.

임영택_무제_종이에 볼펜_56×78cm_2004

I. 임영택은 "처음에 볼펜을 선택한 것은 끄적거리고 싶은 욕망 때문"이었다고 한다. 전화 통화 중이나 시안을 구상할 때 볼과 잉크가 종이에 마찰하는 볼펜의 경쾌함을 즐기며 낙서해 본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다. 끄적거리는 행위가 전화 통화라는 현실이나 구상하는 미래의 결과에 별 영향을 끼치지 않아 부담이 없다. 그만큼 이 행위는 목적이나 완성과 같은 부담과 현실적 의식을 때어낼 수 있는 행위가 된다. 임영택의 끄적거림은 미술에 관한 정보, 삶의 경험, 과거의 기억과 같은 사유가 끊어진 지점에 도달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 것 같다. 거기는 의식이 단절된 곳이다. ● 그의 긋는 행위는 일정한 선들의 반복으로 평면에 남는다. 선들은 색의 덩어리를 만들고 화면에 퍼져 있다. 이 덩어리는 적당한 거리에서 관람자의 시각에 평평한 것으로 판독되게 한다. 다양한 변화를 하나의 단위로 해석해서 스스로 안정을 찾으려는 게 시각과 연관된 사람들의 마음이다. 그 안정의 거리에서 관람자는 색 덩어리를 평평한 것으로 받아 드리려 한다. 이럴 때 관람자의 마음은 임영택의 흔적들이 제공하는 색 면으로 침잠되어 간다. 이 침잠은 깊은 잠과 같다. ● 임영택의 무수한 노동으로 이룩된 색 면과 선의 덩어리, 그리고 간간이 형태로 판독될 듯한 변화들은 가까이 다가서는 관람자에서 방향과 속도를 갖는 결로 읽힌다. 그 표면은 지루한 반복을 지속한 미술가의 손놀림을 고스란히 기록하고 있다. 0.5mm~0.7mm 굵기의 가는 선은 회화 평면의 막을 뚫고 그 너머의 것을 향한 임영택의 분투와 그것에 대응하는 종이의 물리적 반응, 이 둘 다를 동시에 기록하고 있다. 이는 미술가의 의식이 단절되고 전적으로 그의 몸을 흐르는 진동에 관한 기록인 것이다. 관람자는 깊은 잠에서 그 진동으로부터 울려오는 마찰음을 결을 통해 들을 것이다.

임영택_무제_종이에 볼펜_14×20cm_2004
임영택_무제_종이에 볼펜_39×54cm_2004

II. 볼펜은 쓰기를 위해 고안된 공산품이다. 볼펜으로 쓰는 것 이외에 연필과 펜과 같은 고전적 필기구처럼 그리는 것에도 활용할 수 있다는 생각은 좀처럼 어렵다. 붓과 펜, 그리고 연필이 이미 그 발생에서 긋고(소묘), 칠하고(회화), 도해(그래픽)하기 위한 도구였던 것과 다른 볼펜의 기원이 있다. 볼펜이 잉크 사용의 불편을 극복하고자 간편한 휴대와 연속적 필사를 시도하던 중 1938년 헝가리의 한 신문기자에 의해 발명된 것에서 보듯이 그림의 다양한 변화를 표현할 것은 애초에 고려되지 않았다. 잉크를 견고한 촉의 끄트머리로 모아서 평면에 긋는 점에서 임영택의 볼펜화(ballpen painting)를 펜화의 전통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볼펜화는 그것과 다소 다른 특징이 발견된다. ● 펜화는 중세 이후 최근에까지 지속되어온 회화의 오랜 전통이다. 오리의 깃대나 갈대의 줄기 혹은 최근 금속성의 촉을 이용해서 많은 거장들이 환경을 재현하고 현장을 기록하는 매체로 삼아왔다. 이는 주로 대상의 사실적 재현을 목적으로 활용되었고 심지어 오늘날의 사진기를 대신하는 엄밀한 기록에 곧잘 이용되었다. 한편 전통적 펜화에 포함시키더라도 임영택의 볼펜화는 대상을 그대로 재현하지 않는 점에서 다르다. 임영택은 펜화의 전통에 볼펜이라는 현대적 재료를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시도를 한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필기용으로 한정되어 디자인된 재료를 다양한 시각적 변화를 요구하는 회화에 적용함으로써 그는 회화의 새로운 형식적 개발을 한 것으로 보인다. ● 1945년 이후 미국에서 본격적으로 개발되고 대량생산되기 시작하여, 우리나라에는 1960년대를 기점으로 대중화된 볼펜이란 재료를 볼 때 임영택의 선택은 전문 미술가로서 자신의 뜻을 본격적으로 펼치며 활동하는 시기와 관련이 있는 듯하다. 그와 그의 동료가 외부의 미술에 관한 다양한 정보에 한참 관심을 가졌을 시기이기도 하다. 또한 이 시기는 우리나라가 곳곳에서 산업화에 매진하던 때이기도 하다. 한 자루 모나미 볼펜은 바로 이 시기를 상징적으로 대리한다. 임영택은 볼펜을 통해 자신이 속한 시대와 자신을 봤던 것이다. 나는 여기서 그가 "처음" 볼펜으로 "끄적거리고 싶은 욕망"을 가졌던 근원을 감지한다.

임영택_무제_종이에 볼펜_39×54cm_2004
임영택_무제_종이에 볼펜_39×54cm_2004

III. 임영택의 손짓은 시각적 기록으로 남는다. 그가 전적으로 행위 그 자체만을 남기지 않는다. 그의 몸짓을 그대로 기록하고 있는 선들과 형태, 그리고 색면 대부분은 사각형 테두리에 한정되어 있다. 심지어 선이 끝나는 지점들은 거의 화면의 테두리에 잘리지 않고 그 안에서 화면의 경계를 의식한 듯 멈추어 있다. 따라서 색 덩어리의 가장자리와 화면의 한계 테두리의 가장자리 사이에는 대개 종이의 속살이 그대로 남게 된다. 이 점에서 나는 전적으로 임영택의 회화가 초현실주의 류(類)나 순수한 행위 그 자체의 것으로 보지 않는다. 임영택의 매체가 엄격히 회화 평면의 한계 안에서 견고한 대상이 되려고 하기 때문이다. 볼펜으로 제작된 그의 작품 대부분은 액자와 같은 벽면과의 분리 장치 없이 화랑공간에 걸려도 당당해 보이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점은 임영택의 제작이 전적으로 몰입에만 의존하지 않다는 것을 논증한다. ● 임영택은 사유를 등 뒤에 두고 몸에서 발산되는 본원적 율동에 자신을 내맡기며 매체를 마주한다. 이 때 그는 몰입하고 그의 삶은 그의 등 너머에 있게 된다. 그러다가 임영택은 그 등 너머의 곳으로 되돌아와 좀 전에 몰입한 자신의 행위를 본다. 이 때 그의 그림은 드러난다. 이 지점은 그 매체에 관한 한 최초의 비평이 일어나는 곳이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행위와 자신의 지식을, 자신의 볼펜 잉크와 자신의 경험을 충돌시킨다. 이러한 비평의 흔적을 나는 선들의 집단과 그것들이 멈춘 여백에서 그리고 매체가 회화이고자 한 것에서 읽는다. ● 색면으로 채워진 이미지가 테두리를 반복함으로써 독자적인 대상성을 갖고 있고 따라서 비구상의 외관을 띠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색 면을 구성하는 개별 형태들은 관람자의 연상을 완전히 차단하지는 않는다. 테두리의 반복이 그의 회화를 화랑 공간의 벽과 같거나 그것을 능가하는 대상성을 끝까지 유지하는 한편 인간과 연관된 개별형태들의 몇몇 유사성은 관람자의 마음에 통합될 암시 정도로 간헐적인 비유를 남긴다. 따라서 그의 화면은 외관상 비구상이지만 기록된 그의 행위가 등 너머 비평의 과정에서 비유를 엷게 암시하는 것으로 교정된 것으로 보인다. 그의 매체는 드러나 보이는 것과 마음으로 읽혀지는 것, 이 양자간의 간헐적인 마찰과 파열은 그림이 걸린 화랑공간 전체로 가늘고 일정하게 울려 퍼지게 한다.

임영택_무제_종이에 볼펜_21×30cm_2004

임영택의 반복된 선으로 조합된 색 면은 화가 스스로 사유에 머물지 않은 몸짓에 관한 직설적 기록이고 관람자에게 그 표면을 통해 마음의 안정을 주는 것으로 살폈다. 기록과 안정을 가능케 한 것은 한정된 가는 선들의 결에서 비롯하는 것으로 봤다. 이는 또 관람자에게 진동하는 음향으로 남는다. 미술가는 볼펜이라는 재료를 채택하여 자신과 자신의 시대를 고백하고자 했고 그 활용을 통해 펜화의 전통을 확장하는 시도를 추적했다. 그 과정에서 재현에 국한된 전통적 펜화의 개념을 능가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곧 미술의 매체를 통해 미술의 전통을 제고하는 자발적 방식이다. 즉 그의 회화가 비평의 매체가 되고 있는 것이다. ● 임영택의 회화공간은 회화의 물리적 한계를 부각하고 색 면의 반복을 드러냄으로써 견고한 대상성을 획득해 보이는 한편 개별 색 면들이 갖는 유기적이고 인간적인 형태의 비유를 허용함으로써 구상성도 동시에 드러내고 있는 것을 관찰했다. 이는 외관으로 통합되지 않은 채 외관과 내용, 이들 양자간의 마찰을 동시에 제공하는 것이다. 그의 작품 앞에선 관람자는 자신이 목격하는 선택의 가능성을 결국 자신의 마음으로 통합하게 된다. 사유와 삶을 거리 두는 제작의 태도, 지극히 단순하고 가는 선을 지속하는 재료의 선택, 그리고 외관의 독특한 선택국면은 결국 미술가 스스로 자신의 판단과 현실의 통념에서 유래하는 사고의 개입을 최대한 멀리하고 관람자의 자발적인 체험을 통해 기록의 진실에 도달하게 한다. 이 경로에 가장 적합한 매체가 바로 회화임을 임영택의 매체는 논증하고 있다. ■ 이희영

Vol.20060405c | 임영택展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