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時代 神話

정영한展 / CHUNGYOUNGHAN / 鄭暎翰 / painting   2006_0321 ▶ 2006_0331

정영한_우리時代 神話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72.7×181.8cm_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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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6_0321_화요일_05:00pm

갤러리 우덕 서울 서초구 잠원동 28-10번지 한국야쿠르트빌딩 2층 Tel. 02_3449_6072

실재와 이미지, 매체를 통해본 바다 ● 픽처레스크(picturesque), 마치 그림 같은 풍경을 두고 일컫는 말이다. 이 말 속에는 자연에 대한 현대인의 왜곡된 관념이 내재돼 있으며, 실재와 이로부터 비롯된 이미지와의 전도된 관계가 들어 있다. 즉 풍경이 그림의 기준이 되는 대신에 오히려 그림이 풍경의 기준이 된다. 마찬가지로 실재가 이미지의 근거가 되는 대신에 오히려 이미지가 실재의 근거가 된다. 그러므로 엄밀하게 말해 이 말 속에는 그림으로서의 이미지만 있고, 실재로서의 풍경은 없다. 그림을 통해 알려진 이미지, 학습된 이미지가 전제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실재하는 풍경이란 사실상 그것을 알아볼만한 근거가 없는, 한낱 낯설고 생소한 추상적인 기호에 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최초의 이미지는 실재로부터 유래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지가 실재와 갖는 유기적인 관계는 단지 그 뿐이다. 일단 실재로부터 비롯된 그 이미지는 다른 이미지를 낳게 되고, 재차 그 이미지는 또 다른 이미지를 낳게 된다. 이렇게 이미지는 실재로부터 멀어지는 과정을 통해 마침내 실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순수한 이미지로서 남게 된다. 원본이 없는 사본, 애초에 그것이 유래한 원본이 없으므로 사본이라고 말하기조차 어려운 사본, 자족적인 사본이 된다. ● 이는 현대인의 자연에 대한 관념을 말해준다. 즉 그에게 자연은 실재보다도 이미지로서 다가오는 것이다. 그런 자연의 이미지에 더 길들여져 있으며, 심지어는 이를 더 친근하게 느끼기조차 한다. 그에게 자연은 수조 속에 들어 있는 플라스틱 물레방아로서 다가오고, TV의 연속극이나 사극에 이따금씩 등장하는 달 그림으로서 어필된다. 그는 내셔널지오그래픽 프로에 나오는 원시림과 야생의 세계에 감동하고, 아이맥스관에서 본 나이아가라 폭포의 장관에 압도당한다. 사진 화보 속에 등장하는 자연은 유원지나 관광지에서의 온갖 번잡함을 잊게 해주며, 자질구레한 일상사에 치인 마음을 위무해준다. 레이저프린터로 출력해낸 인공적인 색채와 형태가 적절히 조합된 자연 이미지에서 받는 쾌감은 자연 그 자체의 칙칙한 색채와 우연한 형태와는 비교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연 속에서 휴식을 취하는 대신에 서재에 걸려 있는 사진을 올려다보거나, 덜컹거리는 지하철 속에서 지갑 속에 간직한 풍경 사진을 설핏 보는 것만으로도 명상과 상상과 환상 속에 빠지며, 기꺼이 이를 즐긴다. 그렇다면 현대인은 과연 자연, 풍경, 실재를 상실한 것일까. 그에게 자연은 원형이나 신화와 같은 아득한 전설 이상의 실재감을 줄 수는 없는 것일까. 정영한의 작업은 이러한 문제의식에 맞닿아 있다. 현대인이 자연을 상실했다는 사실을 전재하고서 그 흔적들을 가시화하는 한편, 또한 그렇게 상실된 자연의 실재감을 복원하려 한다.

정영한_우리時代 神話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50.5×72.8cm_2006
정영한_우리時代 神話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5.2×100cm_2006

정영한의 근작의 소재는 바다이다. 사람도 사물도 없는 텅 빈 화면에 단지 바다의 이미지만이 그려져 있다. 화면 아래쪽으로 뭍이 살짝 드러나 있기도 하고, 화면 위쪽으로 하늘이 잇대어져 있기도 하고, 수면만이 화면 전체에 자리하고 있기도 하다. 손에 잡힐 듯 사실적으로 그려진 바다는 그러나 손에 잡을 수는 없는, 가 닿을 수는 없는 아득하고 먼 느낌을 주며 눈앞에 펼쳐져 있다. 하얗게 포말을 일으키며 흩어지는 파도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그림 뒤쪽으로 이어지면서 화면에 원근감을 더하는 동안에, 잔잔한 수면은 시야가 미치지 못하는 바다 저편으로 멀어지다가 사라진다. 이렇듯 텅 빈 바다는 원시적이고 원초적이며, 바다로 명명되기 이전의 원형적인 바다를 우리로 하여금 대면케 한다. 여기서 시야가 미치지 못한다는 것은 인식이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며, 바다 저편으로 사라진다는 것은 인식 저편으로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야가 끝나는 자리인 수평선은 인식의 이편과 저편을 가름하는 경계이다. 이러한 경계에 대한 인식이 바다로 하여금 하나의 상징으로 자리 잡게 한다. 이는 시간의 폭력을 견디지 못하는 덧없는 것들에 맞춰진 낭만주의자의 정조를 불러일으키고, 아득하고 먼 미지의 것들에 맞춰진 초현실주의자의 비전에 공감하게 한다. 그러나 이처럼 인식의 침해를 거부하던 바다가 뒤로 물러나서 그림의 전체를 조망하게 되자, 인식을 건드리고 자극하기 시작한다. 바다가 조금씩 어긋나게 그려져 있으며, 지나칠 만큼 선명하고 투명하게 그려져 있다. 마치 스톱모션을 보는 듯 정적이고 차갑고 편평하게 그려져 있는 것이다. 손에 잡힐 듯한 원근적 실재감에도 불구하고 정작 어떠한 물질감이나 두께도 느낄 수 없으며, 특히 그림을 바로 앞에서 대면했었을 때의 어떠한 배후적인 깊이도 느껴지지가 않는다. 마치 다른 것들과의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의 지속적인 맥락으로부터 동떨어져 나온 듯한 이미지, 그 전체적인 맥락으로부터 단절돼 나온 듯한 이미지를 보는 것 같다.

정영한_우리時代 神話_캔버스에 유채_112.1×387.8cm_2005_부분
정영한_우리時代 神話_캔버스에 유채_45.5×53cm_2005

원시적인 생명력으로 낭만주의적 정조를 불러일으키던 바다가 이렇듯 갑자기 이질적이고 낯선 속성을 드러내 보인다. 그리고 그 속성은 바다의 이면과 배후와 깊이로부터 우러나온 것이기보다는 그 표면인상에서 기인하고 있다. 그림이 편평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그 생리는 자연 자체를 떠올리게 하기보다는, 카메라라는 매체의 눈을 통해본 자연의 이미지, 레이저프린터라는 매체를 통해 한차례 걸러진 자연의 이미지, 컴퓨터라는 매체를 통해서 프로그래밍 된 자연의 이미지에 가깝다. ● 이런 인공적인 느낌은 수십 개의 바다 그림들을 하나의 화면에다가 조합해놓은, 외관상으론 스테레오타입의 동어 반복적인 어법을 보는 것 같은, 일종의 모자이크 그림에서 더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다른 그림들에 비해 작가의 의도가 비교적 선명하게 반영돼 있는 이 그림은 마치 수십 개의 모니터를 통해 똑같은 화면을 내보내는 멀티비전을 보는 것 같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멀티비전에 방영된 낱낱의 화면들이 그 질적인 차이를 갖고 있지 않은 것에 비해, 정영한의 그림에서는 수평선의 높낮이를 달리 하는 식의 변화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물론 이 변화는 다분히 의도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멀티비전과는 다른 차이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멀티비전과 닮은 동질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니까 미묘한 차이를 보이는 화면들을 병치시킴으로써 오히려 멀티비전 고유의 인공적인 느낌을 강화해주고 있는 것이다. ● 이로써 정영한은 각종 매체에 의해 자연의 이미지에 길들여진 현대인의 생리를, 그리고 그 매체에 의해 해석된 자연의 이미지에 이끌리는 현대인의 관성을 드러내 보여준다. 이는 그대로 '매체가 달라지면, 메시지도 달라진다'는 마샬 맥루한의 전언과도 통한다는 것이다. 즉 자연이 매체의 인공적인 눈에 포착된다는 것(인공적인 프로그램을 통과한다는 것) 그 자체가 이미 자연이 매체에 의해 해석된다는 것이며, 이로 인해 상당정도의 실재감이 상실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현대인의 생리가 이처럼 매체가 전송해준 이미지, 매체에 의해 해석되고 변질된 이미지를 자연 대신에 받아들이고 향유하는 한편, 자연과 이미지를 동일시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정영한_우리時代 神話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가변설치_2005~6
정영한_우리時代 神話_캔버스에 유채_181.8×90.9cm_2005_부분

앞서의 모자이크 바다 그림과 마찬가지로 정영한의 여타의 바다 그림들의 이면에는 이렇듯 매체가 개입된 흔적이 느껴지고, 매체에 의해 조작된 이미지가 느껴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작가가 이를 위해 어떠한 매체의 도움 없이(예컨대 사진을 본떠 그린다든가, 슬라이드를 비쳐놓고 그 그림자 위에 덧그린다든가, 사실적인 묘사를 위해 스프레이를 도입한다든가 하는 식의) 순수하게 회화적인 과정만을 통해서 이러한 자연과 이미지, 실재와 이미지와의 전도된 관계를 효과적으로 전달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방법이 사실적인 만큼(실재를 빼닮은 만큼) 오히려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는 점이다. ● 정영한의 작업에서의 사실적인 묘사는 재현적인 어법과의 미묘한 관계를 드러낸다. 그러니까 한편으론 재현적인 어법을 취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이로부터 빗겨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과정 중에 일종의 트릭을 도입한다는 점에서 그 생리가 초현실주의자의 그것과 닮아 있다. 그러나 이때의 트릭은 환상이나 환영 등의 비현실적인 주제보다는 자연에 대한 현대인의 생리와 관성을 드러내기 위한 현실적인 주제에 맞닿아 있다. 따라서 그의 바다 그림은 내 손안의 한 장의 바다 사진과 믹서되고, 내가 대면하고 있는 모니터 속의 바다와 오버랩 되면서, 실재와 이미지와의 관계를 곱씹게 한다. ■ 고충환

Vol.20060325d | 정영한展 / CHUNGYOUNGHAN / 鄭暎翰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