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_2006_0310_금요일_06:00pm
참여작가_고경희_고영미_곽수연_구인성_김준기_김현지_박경민_안경수_양광우_한정희
작가와의 대화_2006_0315_수요일_2:00~5:00pm 진행_이명훈(독립큐레이터) 참석_홍익대 동양화과 1학년(강사 성태훈)
갤러리 꽃 서울 마포구 서교동 337-36번지 B1 Tel. 02_6414_8840
11번째 참여작가 ● 한국화 대안공간 갤러리 꽃이 주목할 만한 10명의 젊은 작가들을 초대해 '탈각'이란 제목의 전시를 마련했다. 나는 이번 전시의 11번째 작가라는 생각으로 전시에 관련된 텍스트를 쓰게 되었다. '11번째 작가'라는 의미는 글쓰기 역시 하나의 창작이며, 참여인데, 특히 동시대 한국화의 비평적 취약성을 감안해 볼 때, 비평가를 작가 개념으로 참여시킨다는 대안적 의미를 가진다. 다시 말해 지금의 한국화의 장에서 작가의 발굴 못지않게 비평가의 발굴과 지원문제를 간과할 수 없다. 따라서 '11번째 작가' 개념은 새롭게 발굴되고 지원되는 비평가에 대한 대리개념이며, 그는 동시대 한국화의 전시 현장과 담론의 장에 글쓰기로 참여하는 새로운 작가개념이라 할 수 있다. 『탈각』전의 11번째 작가로 참여하는 나의 글쓰기 작업은 탈각하기/탈각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시작된다.
탈각하기/ 탈각이란 무엇인가? ● 탈각(脫却)은 1) (그릇된 생각이나 좋지 못한 상태에서) 벗어남과 2) (무엇을) 벗어 버림의 두 가지로 해석된다. 우리말에서 '벗어나다'와 '벗어 버리다'의 두 의미를 포괄하는 '탈각하기'는 문맥과 문법상에서 구별되어 사용될 수 있다. 기획자(갤러리 꽃)는 친절하게도 "탈각은 다른 여러 사전적 의미와 함께 한 꺼풀 벗어나 스스로를 확인하며 각성의 자세에 임한다는 진취적이며 도전적 의미"라고 설명했다. ● 이합집산(離合集散)이란 말에서 탈각하기는 헤어지고(離) 흩어지기(散)이다. 탈각하기는 '이동하기'로써 양기(陽氣)의 운동성을 띤다. 음양기운의 변화를 감지하는 자는 스스로 탈각하기를 하지만 감각이 둔한 자는 스스로 탈각할 수 없다. 헤어져야 할 때를 모르고 계속 뭉쳐있고 흩어져야 할 때를 모르고 여전히 모여 있다. 탈각하기는 좋지 못한 목적으로 한데 어울리는 야합(野合)과 정확히 반대되는 개념이다. 심지어 그러한 세력이나 사상과 결별하는 것까지도 탈각하기라고 할 수 있다. 탈각하기는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감각적이다. 따라서 탈각하기는 육감적이다. 우리의 몸은 자연과 상호 교감하는 감각의 덩어리이다. 더듬이이며 안테나이다. 탈각하기는 온 몸을 비트는 기지개처럼 전신, 전감각의 운동이다. 봄은 탈각하기의 계절이다. 겨우내 얼어있었던 땅이 녹고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것은 대지의 탈각하기이다.
탈각은 탈각(脫殼)이다. ● 즉 벌레가 허물을 벗는 것과 같다. 이 비유는 낡은 사상이나 생활에서 벗어난다는 의미로 확장된다. 매미는 오랜 시간 어두운 땅속 생활을 하며 허물벗기를 되풀이 하는 곤충으로 알려져 있다. 매미는 한 여름 성충으로 한 달여를 채 못살면서 짧게는 2-3년에서 길게는 17년 동안을 애벌레로 땅 속으로 내려가 산다고 한다. 그 오랜 시간 동안 매미 애벌레는 땅에 굴을 파 자신의 거처를 마련하고 계속해서 굴을 보수하고 관리하는 일을 반복한다. 매미의 탈각하기는 '온 몸의 비틀기'를 통한 헤어짐과 새로운 만남의 연쇄이다. 허물과 헤어져야만 새로운 몸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아는 매미. 일생의 오랜 기간을 기다림으로 보내면서도 자기 성숙을 진행시키는 매미는 탈각하기의 의미를 알고 그것을 실천하는 자의 상징과도 같다.
탈각은 탈의(脫衣)이다. ● 이 또한 허물을 벗는 것(脫殼)과 같이 '무엇을 벗기'의 의미이다.『장자(莊子)』「전자방(田子方)」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송(宋)의 원군(元君)이 장차 그림을 그리게 하려하자 여러 화공(畵工)들이 모두 이르러 명을 받아 읍하고 서서 붓을 빨고 먹을 개고 있었는데, 밖에 있는 자가 반이나 되었다. 늦게 온 한 화공이 있었는데, 한가히 빨리 걷지도 아니하고 명을 받아 읍하고는 서지도 아니한 채 곧 방으로 가버렸다. 원군이 사람을 시켜 그를 보게 하니, 곧 '옷을 풀고 다리를 뻗은 채 벗어 붙이었다(解衣般?)'고 한다. 원군이 이르기를 옳다! 이 자가 진정한 화공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동양의 예술론에서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장자의 '해의반박론(解衣般?論)'의 일화이다. 장자의 심오한 사상적 맥락과 함께 이 에피소드는 동아시아의 예술가들에게 하나의 예술창작의 원칙과 전형이 되었다. ● 17세기 청(淸)초의 화가 운격(?格)은 이 일화를 다음과 같이 논리 있게 정리했다. "그림을 그릴 때는 모름지기 옷을 벗고 다리를 뻗은 채 주위에 아무도 없는 듯한 마음이 있어야 하니, 그러한 뒤에야 변화의 기틀이 손에 있고 원기(元氣)가 흘러넘치게 되며, 앞 시대의 장인에 의해 구속되지 않고 법도 밖에서 노닐 수 있다." 운격의 정리는 탈각하기의 철학적 정리이기도 하다. 탈각하기는 앞 시대의 장인에 의해 구속되지 않고 법도 밖에서 노니는 것이다. 구속으로부터 벗어나기, 구속을 벗어 던지는 것이다. ● 이 텍스트는 하나의 발제, 혹은 말 그대로 (전시)서문에 지나지 않는다. 본론과 결론은 그야말로 계속적인 나의 탈각하기, 우리의 탈각하기를 통해 진행되는 긴 여정이다. 그것은 이제 작가의 문제만이 아닌 관객, 독자들의 관심과 참여의 문제를 포괄한다. 내가 이 전시에 11번째 작가로 참여하듯이. 여기 10명의 젊은 작가들의 작업이 있다. 이들이 어떻게 지금-현재-우리의 주변과 내면의 풍경을 어떤 방식으로 포착하고 느끼고 고민하고 표현하는지 관심을 가져볼 것을 권한다. ■ 이명훈
Vol.20060321b | 탈각 脫却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