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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6_0308_수요일_05:00pm
인사갤러리 서울 종로구 관훈동 29-23번지 Tel. 02_735_2655
삶의 스펙트럼을 대리하는 흙 인형들 ● 김효숙의 조각은 박물관에 전시된 부장품이나 절터의 석상들에 대한 공감으로부터 비롯된다. 작가는 그것들로부터 세월의 풍화를 견뎌낸 조형물, 시간이 빚어낸 조형물, 동시대 작가의 작품을 뛰어넘는 미의식을 보는 것이다. 이는 적어도 표면적으론 한국적인 이미지나 한국적인 미의식에 맞닿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 최근의 고고학적 발굴 현장을 재현한다든가 일종의 허구적인 역사를 가정해본다든가 하는 식의 학제간 연구방식의 미술의 한 경향과도 맞물리는 것이다. 작가의 감각 촉수는 그러니까 동시대를 관통하는 시대정신이나 현대인의 삶의 모습을 캐치하는 식의 일상성보다는 그 이면에 놓여진 인간 실존의 보편적인 조건, 시대를 초월한 미의식, 원형으로 부를 만한 본질적인 조건에 맞춰져 있다. 시간의 켜들을 거슬러 올라가 만날 수 있는 지점들, 과거 지향적인 지점들에 맞닿아 있으며, 작가는 이로부터 원형적인 어떤 이미지를 캐내고, 복원하고, 재구성하는 것이다. ● 이것이 전작에서는 돌칼이나 청동칼 등의 부장품을 모티브로 한 조형물로서, 그리고 마치 성소(신의 사제인 무당이 지키는 성스러운 땅)나 고대 신전을 재구성한 듯한 기념비적인 성격이 두드러져 보이는 형태로서 나타났다. 이 일련의 작업들에 나타난 원형과 기둥 형상은 신의 존재를 그리고 신과 인간과의 관계를 암시한다. 즉 바닥에 원을 그리며 놓여진 형상들은 신과 인간과의 수평적인 관계를 도상으로써 표현한 것이며, 수직으로 서 있는 기둥은 신과 인간을 연결시켜주는 축인 것이다. 근작을 보면, 외관상으론 그 재료나 소재 그리고 기법 등이 달라졌기는 하지만, 전작에서의 이러한 정신적이고 상징적인 의미의 상당부분이 확인되고 있다.
김효숙의 작업은 이처럼 전통적인 이미지와 연계돼 있으며, 한편으론 인간의 보편적이고 실존적인 조건에 공감하고 이를 조형적인 형식을 통해 풀어내는 과정에 맞닿아 있다. 그리고 이 두 계기가 서로 구별되기보다는 상호 내포적이고 상호 관계적으로 연속돼 있다. 다시 말해서, 전통적인 오브제나 부장품들이 상기시켜주는 인상에 대한 무의식적 끌림 혹은 공감에 의해서 견인되고 있으며, 이를 인간 실존의 보편적인 조건에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는 근작에서 일종의 테라코타 인형의 형태로서 나타난다. 결이 곱고 일정한 도자기 흙 대신에 작가의 테라코타 인형은 그 입자나 결이 거칠고 불규칙적인 흙을 사용함으로써 기계로 찍어내거나 깎아낸 듯한 정형화된 모습과는 거리가 먼, 질박하고 자연스런 손맛을 느끼게 한다. 더불어 그것을 불에 구워내는 소성과정에서 나타나는 불규칙적인 표면 색조(흙의 불규칙적인 입자와 인형의 비정형의 형태에서 기인한)가 이런 자연스러움을 더한다. ● 작가의 작업에서는 일일이 손으로 빚어 만든 조형물 고유의 즉흥성과 함께 우연성마저 느껴진다. 기껏 손가락만한 크기의 몸통과 손톱만한 크기의 얼굴을 가진 인형의 몸통은 이렇다할 의식 없이 비정형적으로 빚어낸 것 같고, 그 얼굴 또한 못과 같은 도구를 사용하여 되는대로 찔러 그 최소한의 이목구비만을 표현하고 있는 만큼 오히려 더 자연스럽고 친근하다. 이 인형들이 삶의 다양한 표정들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는가 하면, 신라토우를 연상시키기도 하고, 더불어 사람이 죽을 때 사자(死者)와 함께 묻는 부장용 흙 인형을 떠올리게도 한다. 그러니까 일종의 해학미와 함께 죽음의 이미지마저 느껴진다. 그리고 이 인형들을 일종의 인간군상처럼 표현함으로써 그 정서적인 지점들이 인간의 보편적이고 실존적인 조건으로까지 확장돼 보인다.
작가는 낱낱의 인형들을 개별적인 존재로 표현하는 대신에, 수직으로 서 있는 기둥 형상을 지지대 삼아 그 표면에다가 붙인다. 그리고 공처럼 생긴 원형의 표면에다가는 인형의 머리만을 따로 떼어내 붙인다. 이로써 기둥 형상과 원형은 자연스레 인간군상의 집합으로서 나타나고, 상징적 의미를 실어내는 매개체, 즉 삶의 메타포로서 나타난다. 여기서 기둥에 빼곡하게 붙어있는 인형(인간)들이 흔히 그렇듯이 기둥에 매달려 있거나 기어오르는 것처럼은 보이지 않는다. 다시 말해, 기둥으로 상징되는 좁은 땅덩어리에서 자리다툼을 위해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는 양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포즈와 각양각색의 표정들을 보면, 각자에게 주어진 좁은 자기의 자리를 감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로써 작가는 삶이 정박해 있는 다양한 지점들, 그 속에 차이를 포함하고 있는 반복적인 일상들, 그리고 그 일상을 살아내는 보통사람들의 현재를 드러낸다. 김효숙의 작업은 말하자면 인생살이, 세상살이를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 자체로서 특정 주체의 현실인식인 개별성과 특수성에 맞닿아 있으면서, 이와 동시에 인간의 일반적 조건인 보편성마저 획득하고 있다. 또한 기둥 형상 자체만을 두고 본다면, 이를 일종의 세계의 중심을 상징하는 기호, 즉 오벨리스크와 세계수(世界樹)의 기호로 읽을 수 있다. 그 중심성과 수직성은 종교적인 아이콘의 전형적인 기호로 기능하고 있으며, 이로부터 일종의 영원성과 함께 기념비적인 성격마저 획득하고 있다. 결국 작가는 사람 기둥을 형상화함으로써 세속적인 인생살이에다가 일종의 종교적인 경건함, 종교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인형들의 얼굴이 집적된 원(圓)형상 작업은 세계 최소원소로서의 모나드(단자), 부분들이 모여 유기적인 전체를 이루는 집합의 원리, 표현의 한 방법으로서의 구축과 축조의 원리, 아상블라주의 원리에 그 맥이 닿아 있는 것이다. 이외에도 작가는 둥근 공 모양의 대리석 표면에다 인체의 형상을 파낸 후 그 속에다 검정색 물감을 칠해, 이를 하얗게 드러난 대리석 표면과 대비시킨다. 이는 일종의 상감기법을 떠올리게 하며, 우주의 존재원리로서의 음과 양의 대비를 떠올리게 한다. 그 의미는 일종의 거푸집형태와 마치 이로부터 떠낸 듯한 인형을 대비시키는 것으로서, 그리고 바로 세워 놓거나 뒤집어 놓은 항아리들을 대비시키는 것으로서 변주되고 있다. 여기서 그 속이 깊은 세로로 긴 테라코타 항아리들은 그 독특한 형상으로 인해 그 자체 순수한 조형물의 한 형태로도 보이지만, 나아가 용기 본래의 기능과 이로부터 유래한 의미에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즉 흙으로 빚어 만든 용기는 씨앗이나 음식을 저장하는 항아리, 태를 담아 보존하는 태 항아리, 사자의 화장한 뼈를 보존하는 골호(骨壺)를 연상시킨다. 그러니까 생명의 씨앗을 보존하는 자궁, 존재의 집인 것이다. 따라서 작가의 작업이 생명을 주관하는 땅 신을 모신 모계신화와, 이에 따른 여성주의에 대한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인 공감을 떠올리게 한다.
김효숙의 작업에서 인간을 대리하고 있는 흙 인형들은 이처럼 세상살이의 다양한 스펙트럼의 지점들을 보여준다. 인형들은 대개 얼굴에 흰 분칠을 하고 있는데, 이는 기본적으론 얼굴을 몸통과 구분하기 위한 것일 테지만, 그 자체 죽음의 이미지를 떠올리게도 한다. 그리고 이는 거푸집형태가 암시하는 관 이미지나( 작가의 전작들을 보면, 인형들이 마치 관과 같은 틀 속에 가지런히 눕혀 배열돼 있다), 부장품으로서 사자(死者)와 함께 묻히는 흙 인형, 그리고 사자의 뼈를 담아 보관하는 골호에 내포된 의미와도 통하는 것이다. 이러한 죽음의 이미지는 인형에서 느껴지는 다른 인상, 즉 신라토우에 접맥된 해학적인 인상과는 분명 이질적인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표면적인 인상에 지나지 않으며, 해학은 그 자체 죽음의 이미지와 대비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해학은 죽음마저 자기의 한 속성으로 끌어안는 보다 큰 개념이며, 삶과 죽음을 화해시켜주는 계기인 것이다. 여하튼 작가는 삶의 연륜을 통해 의식적으로건 무의식적으로건 삶과 죽음, 삶의 이미지와 죽음의 이미지, 삶의 충동과 죽음의 충동이 서로 연계돼 있음을 인식하고 이를 형상화한다. 그럼으로써 마치 무당처럼 존재와 존재간의 건널 수 없는 심연을 건너게 해주고, 그 단절된 연속성을 회복시켜주고 있는 것이다. ● 김효숙의 작업에 나타난 흙 인형들은 이렇듯 인간을 대리하고, 인생살이를 대리한다. 흙 인형들의 몸짓과 얼굴에 나타난 다양한 표정들에는 사람들의 살림살이가 내재돼 있고, 삶의 모습이 담겨져 있다. 작가의 작업이 동시대적인 삶의 모습이나 현대인의 자기 정체성을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이보다 더 보편적인 조건, 더 궁극적이고 본질적인 조건, 원형적인 존재의 모습을 밝혀주고 있다. 기념비적인 기둥과, 그 자체 완전한 형상을 상징하는 원 형상, 생명의 씨앗을 보존하는 단지, 그리고 특히 죽음마저 보듬는 해학에의 공감으로써 세속적인 삶의 모습에다가 경외감을 불어넣고 있다. ■ 고충환
Vol.20060313a | 김효숙展 / GIMHYOSOOK / 金孝淑 / sculp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