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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6_0302_목요일_06:00pm
유아트스페이스 젊은 작가 기획공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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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영의 못 조각_우연한 형상과 미완의 의미들 ● 김은영은 못 다발을 무작위로 바닥에 쏟아놓거나 던진다. 그렇게 던져진 못 다발들은 우연한 형상을, 무질서한 구조를, 이질적인 패턴을 만들어낸다. 이렇게 우연하게 접해있는 부분들을 용접으로 고정시킴으로써 임의적인 형상은 결정적인 형상을 얻게 된다. ● 허나 그 결정적인 형상이 작가의 의지에는 반(反)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작가의 의지는 모든 결정적인 것들, 교육과 경험을 통해 익숙해진 것들, 선입견과 편견과 상식의 지평에 속한 것들, 그리고 뭔가 그럴 듯해 보이는 형상과 구조를 거부하고, 이를 해체하는 지점을 향해 있기 때문이다. 혹여 만들어진 형상이 앞서 열거한 것들에 부합한다 싶으면, 이를 다른 형상(못 덩어리)과 용접함으로써 이질적이고 낯설고 생경하게 만들어버린다. 그러니까 일종의 수정 행위가 가해지는데, 이는 익숙한 형상이 아닌 낯선 형상, 그럴 듯해 보이는 형상이 아닌 이질적인 형상, 길들여진 형상이 아닌 생경한 형상을 지향한다. 일종의 낯설게 하기, 소외효과, 소격효과에 맞닿아 있는 이 이질화의 과정을 통해서 작가는 못 다발들로 하여금 우연한 형상, 현재진행형의 형상, 미완의 형상을 유도해내고 있는 것이다.
못 덩어리들은 덧붙여지는 과정과 수정을 거쳐 바닥을 점유하고, 공간을 잠식한다. 여기서의 공간의 잠식이란, 단순히 빈 공간을 채운다는 식의 의미뿐만 아니라, 새로운 공간을 생성하고, 공간에다가 새로운 차원을 열어놓는다는 의미이다. 마치 성게처럼 생긴, 아니 성게보다도 더 이질적이고 불규칙적이고 비정형적인 못 덩어리들이 중성적이었던 공간을 부지불식간에 폭력적인 공간으로 변질시킨다. 못 덩어리들이 마치 지뢰밭처럼 펼쳐져 있는 그 공간은 공격적이며, 이는 화랑의 정형화된 공간보다는 작업실의 비정형적인 공간에서 그 실체감이 더 강하게 느껴진다. 흔히 '들어가지 마시오'나 '만지지 마시오'와 같은 비우호적인 문구를 무시한다면, 사실상 대부분의 현대조각은 그 속에 들어가서 거닐 수도 있고, 만질 수도 있다. 하지만 작가의 작업은 그 속에 들어 갈 수도, 만질 수도 없다. 그것은 사람들을 거부하고, 찌르고, 공격하고, 밀어낸다. 허나 이는 그 자체로서 비우호적이라기보다는, 사람들이 저마다의 마음속에 품고 있는 상처, 잠재적인 폭력성, 공공연한 공격성을 일깨워주는 몸짓으로 읽힌다.
그런가하면 공간을 점유한 그 형상들은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벌레들, 몸의 표면에 수많은 돌기들이 달려 있는 미지의 생명체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이는 임의적인 연상에 지나지 않으며, 오히려 형상들은 그 무엇도 지시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 자체 언어의 형식을 빌려 표상되지 않는 것들, 무의식의 실체들, 뚜렷한 어떤 한 의미로 환원되지 않는 욕망의 편린들을 지시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무의식에 속한 것만큼이나 의식의 층위에 속한 것들과는 그 존재방식이 다르다. 그러니까 언어의 형식으로는 환원되지 않는 마나(Mana) 같은 것, 일종의 주술적인 행위를 수행하는 매개체 같은 것, 그 속에 양가성을 포함하고 있는 이율배반적이고 자기 모순적인 것들이다. 의식의 표면 위로 불려나온 적이 없는 자기 발생적인 것들, 표상이 부재하는 사유의 질료들, 미처 의미를 얻지 못한 의미(선先의미 혹은 전前 의미)의 흔적들, 언어와 언어 사이, 의미와 의미 사이의 행간에 속한 것들이다. 이렇게 명명되지 않는 것들이 의식의 층위에 속한 것들을 찌르고, 공격하며, 해체하고, 재편한다. 중세시대의 의사들은 정신병자의 머리 속엔 나쁜 벌레가 살고 있다고 믿었다. 여기서 정신병자는 미처 의미화되기 이전의(통속화되지 않은) 언어를 말하는 자란 점에서 창작주체의 생리와 통하며, 따라서 작가의 작업이 미지의 벌레처럼 보이는 것은 창작주체의 이런 언어용법에 대한 비유법의 한 형태로도 읽히게 한다.
그러나 이는 김은영의 작업에 대한 부분적인 독서, 불완전한 독해, 나아가 심지어는 오독(誤讀)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작가는 모든 종류의 환원주의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작업이 하나의 그럴 듯한 의미,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해석의 지평 속에 편입되는 의미(doxa, 롤랑 바르트는 이를 부르주아의 생활양식을 지지하는 언어용법으로 보고 있다)로 되돌려지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환원주의에 대한 완전한 거부나, 모든 의미의 부정은 적어도 논리적으론 가능할지 모르나, 실제로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무의미 또한 이미 의미에 의해 오염돼 있으며, 의미 또한 그 속에 가능성 혹은 잠재된 형태로서의 무의미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의미(전의미) 역시 어디까지나 의미에 대한 이해의 지평 속에 놓여져 있다는 점에서 그 사정이 다르지 않다. ● 그렇다면 작가의 작업은 의미화의 산물이 아닌 순수한 형식논리의 산물이며, 양감과 질감, 물성과 공간감으로 나타난 모더니즘 조각의 장르적 특수성의 결과일 뿐인가. 그러나 이는 의미론적인 환원주의와 마찬가지로, 형식적인 면에서의 또 다른 환원주의가 아닌가. 결국 환원주의에 대한 작가의 거부는 자신의 작업이 어떤 수미일관된 의미와 독해로 닫히거나, 전체 혹은 총체와 동일시되는 형식에 대한 통일성을 거부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김은영의 작업에서는 이를테면 자기 증식적인 공간 형성, 무의식적인 상처와 욕망, 잠재적인 폭력성과 공격성, 미지의 생명체와 생물학적인 변태, 양가적인 마나, 표상이 부재하는 사유, 창작주체의 머리 속에 거주하는 벌레(통속화되지 않은 언어용법), 모더니즘 조각의 형식논리, 그리고 종교적인 아이콘(못은 상처와 함께 상처에 대한 치유의 제스처를 함축한다) 등의 온갖 이질적인, 심지어는 서로 양립하기 어려운 의미와 형식의 지점들이 마치 주름처럼 층층이 포개져 있는 것이다(질 들뢰즈는 사유의 구조를 주름에 비유한 적이 있는데, 작가의 작업은 이 개념에다가 물적 형식을 부여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여기서 사유의 구조는 욕망의 구조와 동격인 것이며, 이는 모든 종류의 환원주의를 허무는 무기로써 자신의 작업을 도구화하려는 작가의 욕망과도 통한다).
이 모든 의미의 지점들, 형식의 지점들은 그 자체 결정적이기보다는 비결정적인 독해의 지점들과 맞물려 있으며, 임의적이고 자의적인 체계(체계를 허무는 체계, 체계를 여는 체계)에 맞닿아 있다. 그 체계 속에서의 의미와 형식의 편린들은 서로 간에 우열도 없고, 선후도 없다. 이는 실제로 작가의 작업에 나타난 물적 형식과도 합치한다. 즉 작가가 못 덩어리들을 제작하는 과정이나 그것들을 공간 속에다가 놓는 방식은 전적으로 우연성에 의해 지배된다. 못 덩어리들은 다만 주어진 공간적인 조건 속에 우연하게 던져져 스스로 공간을 점유하고 변질시킬(공간을 만들고 생성시킬) 따름이다. 여기에는 사전의 계획도 없고, 사후적인 결정도 없다. 결정적인 시작도 없고, 결정적인 끝도 없다. 대신 아무 데서나 시작할 수 있고, 아무 데서나 끝낼 수 있다. 아무렇게나 시작할 수 있고, 아무렇게나 끝낼 수 있다. 그리고 이때의 끝은 임의적인 끝, 종결되지 않은 끝, 미완의 끝에 머문다. 나아가 못 덩어리들 간에는 중심도 없고, 주변도 없다. 모든 지점들이 중심이면서, 동시에 주변이기도 하다. 심지어는 비록 못 덩어리들이 밀집된 부분과 빈 부분을 가름하는 경계가 외적으로 드러나 보일 때조차도 그 경계는 임의적인 경계, 잠정적인 경계에 지나지 않는다. ● 김은영의 작업의 이면에는 후기 근대인의 자의식이 반영돼 있다. 즉 총체성과 통일성의 논리에 근거해서 세계를 중심과 주변, 주체와 객체로 나누는 식의 원근법적 세계관을 해체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계통과 계보학에 바탕을 둔 수직적인 사유의 틀을 해체하고, 이를 수평적인 계열의 틀, 횡단적인 연계성의 틀로서 대체한다. 더불어 조각과 관련해서는 조각 이후의 조각을 예시하고 있다. 여전히 그 속에 양감과 질감, 물성과 공간감을 견지한다는 점에서는 정통적인 조각의 개념에 맞닿아 있으나, 동시에 그 개념의 틀을 해체한다는 점에서는 조각 이후의 조각, 탈조각의 개념을 향해 열려 있다. 작가의 작업이 갖는 의의는 이처럼 조각과 조각의 해체가 맞닿아 있는 상호 내포적인 관계로부터 비롯되는 긴장감이며, 이로부터 일종의 비결정적인 실천논리, 미완의 의미놀이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이다. ■ 고충환
Vol.20060310b | 김은영展 / sculp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