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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6_0308_수요일_05:00pm
공평아트센터 서울 종로구 공평동 5-1번지 Tel. 02_733_9512
사람들은 흔히 목판화를 전통적이라 말한다. 어째서 전통적이냐고 물으면 그냥 나무라는 재료의 자연적인 속성이 우리의 것이라 말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이는 팔만대장경같은 문화유산의 전통이 있기에 목판화가 전통적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니까 이들의 생각에 전통과 목판화와의 관계가 확정되는 단서는 우리의 문화유산 중에 세계적인 자랑거리인 팔만대장경이 있기 때문이거나 막연히 자연스럽기 때문이란 것이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아무런 핵심이 없는 관념적 인식이기도 하다. 더구나 팔만대장경이라는 유산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현대적인 목판화작품을 전통적이라 한다면, 참으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소위 관념이라는 것이 그것인데,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동양=자연/서양=인공이라는 도식이나 나무는 자연물이기에 동양적이라는 관념에 빠져있다. 물론 전혀 틀린 얘기는 아니다. 그렇지만 이런 전통은 그냥 매체자체의 개념이나 속성으로 드러나는 가시적인 것이 아니라 작품내에서 발견할 수 있는 미학적인 특성이 우리민족 고유의 정서나 사상과 연결 될 때라야 얘기할 수 있는 것 일게다. 특히 목판화에 있어서 이런 단순한 도식을 관념적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관념을 넘어서서 실제적인 감상과 분석을 통해서 한국현대목판화가 전통적인 미학을 구현하는지를 비판적으로 살펴보았으면 좋겠다. ● 우선 우리나라 전통적인 목판화와 현대적인 목판화작품의 개념에 대해서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 목판화의 시작이 서책을 인쇄하기 위해서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종이의 발명과 더불어 인쇄술이 발달하였는데 그 인쇄술의 첫 번째가 바로 목판인 것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우리나라가 자랑하는 세계최초의 목판본인 통일신라의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나 고려시대의「변상도」, 조선시대의「부모은중경」「이륜행실도」「삼강행실도」「오륜행실도」등이 모두 불교 및 유교의 교육용 서책 및 일러스트로서의 목적을 위한 인쇄술이었다. 이 외에도 조선시대의 의궤도, 감옥도, 무예도, 초상화, 지도, 천문도, 증수무원록과 같은 의학용 인체도, 궁중의 예악도, 능행도, 반차도, 가묘도, 풍속도, 명당도, 풍경, 각종 민화, 부적, 시전지, 능화판 등의 기록적인 기능과 디자인 또한 담당하였으니 목판화는 가히 생활에 가장 필요한 공예였던 셈이다.
목판화는 일러스트로서의 삽화적인 기능이 출판의 발전과 맞물리면서 활성화 된 기술이었다. 또한 동서고금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조선의 직지나, 구텐베르그의 금속활자 인쇄술이 발명되기 전에는 목판이 그 인쇄기능의 거의 전부였다. 그러니까 목판 인쇄술의 전통이 없는 나라는 별로 없다는 것이다. 이는 달리 말하면 우리가 자랑하는 목판화의 전통은 예술적인 표현의 전통이라기보다는 인쇄기술의 전통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목판화의 전통에 대해서 냉정하고 객관적인 시각을 가질 필요가 있다. 아무리 우리의 고판화가 기술적으로 탁월하다 하더라도 그것은 밑그림을 그린 화가의 능력, 정교하게 도장 파듯이 잘 깎아내는 각수(刻手)의 기술, 인쇄공의 기술 등 작가적 표현이 아니라 분업화된 인쇄산업 시스템의 전통임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목판화가 서양의 금속문화와 대비되어 우리에게 친숙하기 때문에 한국적이라는 생각은 다시금 생각해 보아야 할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우리의 뛰어난 인쇄기술과 문화는 자랑할 만하지만 목판화라는 예술적 장르에서 보다 중요하게 생각할 것은 그런 효용성을 가능케 한 미감이나 미학, 미술 사회학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 이런 인쇄술이자 삽화의 기능을 담당한 목판화가 하나의 예술적인 표현매체로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결국 그림이라는 것이 책과는 별개로 독립하면서 부터이다. 그러니까 서책으로부터 이미지가 분리되어 시각미술의 영역에 편입되면서 목판화는 독자적인 미술의 한 장르가 된 것인데, 서양에서는 알브레히트 뒤러에 이르러 미술로서의 표현양식으로 자리 잡게 되고, 우리나라에서는 결국 현대목판화가 등장한 1930년경으로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목판화를 단순한 삽화의 기능에서 벗어나 표현의 측면에서 보자면 조선시대의 삽화에서도 어느 정도 각수의 개성적인 표현 양식이 보이는 것도 있다. 예를들면 부모은중경 중에서도'징광사'본에서 보이는 표현적인 칼의 구사, 이제현이나 최충 등의 인물도에서의 인물의 성격을 부각시키는 표현 방식, 귀거래도나 계회영정도와 같은 풍속도 등에서 보이는 여유와 운치 등. 물론 이 그림들은 상당부분 책의 삽화이지만 화공이 그린 원본그림을 도장 파듯이 그대로만 새기던 선묘중심의 기술적 방식에서 벗어나, 면과 칼 맛을 각수(刻手)나름대로의 표현방식으로 드러냄으로 주관적인 표현의지를 엿볼 수 있는 점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조선시대를 관류하면서 활발하던 출판용 목판화는 조선말 일제강점기에는 서구의 석판기계인쇄술이 도입되면서 차차 소멸되어 간다. 사실 목판인쇄는 정조년간에 이르면 서책인쇄에서는 완전히 금속활자로 대체된다. 즉 정조의 명에 의해 김홍도가 그리고, 나라에 소속된 각수의 판각에 의해 발간되는 오륜행실도는 금속활자본인 정리자본에 목판삽도를 붙여 인쇄를 하게 되는데 서책의 편집방식에서 목판은 오로지 삽도를 위한 것이 된다. 그래서인지 조선후기에는 목판인쇄술이나 목판화는 쇠퇴하여 작품이나 자료가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던 것이 1900년대 초 이우승이나, 월간지 개벽의 삽화를 제작한 나혜석, 프롤레타리아 동맹의 이상춘, 이갑기 같은 이들에 의해 신문이나 잡지 등에 삽화나 만평 등으로 보다 대중적인 기능을 갖는 목판화가 새롭게 등장한다. 물론 그 양이 많지는 않지만 이런 작품은 우리 근대 목판화사에서 귀중한 사료가 된다. 이때까지도 목판화는 독립된 표현양식으로서 미술의 한 장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 목판화가 현대적인 의미에서 독립적인 장르로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1939년에 18회 「걸인의 꽃」으로 선전에 입선한 최지원의 작업으로부터다. 최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최초로 발굴 공개하여 화제가 된 작품이다. 또한 일본의 창작판화협회전과 선전을 중심으로 활동한 최영림, 국제적으로는 1933년 폴란드『바르샤바국제목판화』전에서 입상과 1936년『제2회 방소비 만국화전람회』에서 명예상을 수상한 배운성의 활동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작품도 근대성에 대한 구체적인 자각이 작품으로 증명되기는 어렵고, 작품수가 적어서 본격적인 현대적 판화라 보기는 어렵다. ● 따라서 지금부터 거론하는 작가들이 구체적으로 목판화의 현대성을 구축하기 위한 터를 잡은 1세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 정규, 박수근, 이항성, 유강열, 이상욱 등에 의해 비로소 목판화의 이미지, 판각, 프린팅 등이 현대적인 특징을 보이기 시작했는데 이들은 70년대 목판화를 비롯한 한국판화 전체 발전의 디딤돌 역할을 한다. 나무판은 그렇다 쳐도 잉크나 인쇄를 위한 도구들이 전무하던 시절 이들은 어렵게 프레스를 만들고 잉크도 조제하면서 현대판화의 기틀을 다졌다. 특히나 이전까지의 흑백판화에 비해 조형적으로 대단히 진일보한 다색목판화를 제작하면서 보다 진전된 목판화의 형식적인 면을 중요시 하였다. 사실 한국현대판화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1958년도의 한국판화협회의 창립멤버를 보면 당시 상당부분이 이 작가들이다. 이는 동판화나 석판화 실크스크린 등의 기술도 재료도 없고, 열악한 전쟁이후의 궁핍한 생활여건 때문이기도 했지만, 우리나라의 오랜 목판인쇄술의 전통에 대한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인 공감이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한편 다른 시각에서 보자면 당시 이들의 작업을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모더니즘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다. 이 시기의 목판화에 대한 정확한 실상을 알 수 있는 비평이나 기록이 부재하기 때문에 정확하게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단지 몇 점 안되는 작품들만이 남아 있고, 그나마 작가마다 일관된 내용이나 스타일의 확고한 구축으로 보기 어렵다는 점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이들의 작업에서 목판화의 형식적인 실험의 흔적들은 보이지만 당시 한국의 정치, 사회, 문화전반적인 부분에 있어서 총체적인 각성과 반성을 통한 인문학적인 모더니티를 추구했는지가 불명확하다는 것이다. 어떤 새로운 움직임들이 있었으나 증거물인 작품도 기록도 부족하여 분석과 비평의 자료가 없다는 것, 이 점이 아쉽다.
본격적으로 목판화가 작가의 중요한 표현매체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다양한 이미지와 실험이 결합되는 70년대부터라 고 볼 수 있다. 당시 60년대 화단은 앵포르멜이 퇴조하면서 하드에지, 옵아트, 해프닝이나 이벤트를 통한 탈 평면의 경향, 대지예술, 미니멀아트 등 새로운 서구현대미술의 사조들이 봇물처럼 수입되었고, 화단은 그런 수입된 현대미술의 경연장이었다. 그리고 판화는 회화의 연장으로 인식되어 소수의 화가들이 판화작업을 겸했다. 물론 그들에게는 회화가 작업의 주된 영역이었다. 이들은 이미 회화나 여타의 작업으로 나름대로 현대성에 대한 논리적이고도 감성적인 경험을 한 작가들이었다. 당연히 새로운 매체이자 독특한 표현방식을 가진 판화에 호감을 가졌고, 판화의 복수성과 프레스라는 기계를 통한 당시로서는 모던한(?)작업은 매력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직접적으로 이미지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판을 통한 간접적인 표현법은 그들에게 색다른 감각과 표현충동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으리라 여겨진다. 어쨌거나 회화를 중심으로 했던 한국현대미술과 판화미술의 발전시기가 유사한 것은 모더니즘회화를 추구하던 작가들의 새롭고 모던한 것에 대한 실험적 표현욕구 때문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 70년대 각종 공모전이나 판화전시를 통하여 목판화의 주요흐름을 주도한 중요한 작가들로는 송번수, 김형대, 김상구, 이승일 등이 있고, 이와는 다르게 혼자서 고립된 채 개별적으로 자신의 주제를 목판화작업으로 옮긴 작가들로 김상유, 석란희, 서상환, 이상국, 오윤 등이 있었다. 작고한 김상유와 오윤, 지금은 회화작업만을 하는 석란희를 제외하면, 이들은 지금까지도 목판화를 지속적으로 해오고 있으며 한국현대목판화의 수직과 수평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고리역할을 하고 있다. 이 중에서 특히 김상구와 오윤은 80년대 이후의 목판화의 사회적인 활성화에 큰 교량역할을 하게 된다. 김상구는 한국판화미술진흥회의 창립과 서울국제판화미술제의 태동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도우면서 판화의 대중화를 위한 각종 활동을 아직까지도 하고 있고, 오윤은 목판화를 통한 미술의 대 사회적 실천을 통해 80년대 민중미술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 어쨌거나 전체적으로 70년대는 목판화가들의 개별적인 움직임에 의해 다양한 현대적 목판화의 실험과 시도가 돋보이며 뛰어난 작품들이 많이 생산된 정착기라 볼 수 있다. ● 1968년 송번수의 목판화가 한국판화전에서 최고상을 수상한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었다. 58년도에 창립된 현대판화협회와 68년도에 새롭게 창립된 한국현대판화가협회를 아우르면서 이항성이 의욕적으로 기획한 이 전시에서 송번수는 수상을 하면서 신예판화가로서의 입지를 다질 수 있었다. 이는 당시의 판화계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게 해 준다. 즉 목판화가 그 당시까지는 현대한국의 판화계에서 중요한 매체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런 60년대 이후 70년대에 들어서서「장미」연작, 한지 릴리프인「가시」연작, 대형 다색목판화인 「상대성원리」「꽃」시리즈로 그 작업의 궤적이 지금까지 진행되어 오고 있다. 대단한 의욕과 스케일로 전개되는 송번수의 목판화는 관객의 의표를 찌르는 감각적 날카로움과 동시에 목판화 특유의 판면의 질감과 종이의 물질성을 담보해내며 70년대 이후 목판화의 실험성에 있어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김형대는 70년대 벽두부터 그의 60년대 회화로부터 표현의 폭을 넓히는 추상표현주의적인 이미지의 다색목판화를 전개한다. 동적인 운동감이 두드러지는 「Growth」「생성」시리즈로부터 이후 고요한 이미지의「심상」「후광」시리즈로 지금껏 이어져 오고 있다. 김형대의 목판화는 철저할 정도로 평면성을 조건으로 하여, 자연적인 질감과 환상적인 색채감, 어두운 색조위에 명도가 높은 색을 중첩하여 올리는 프린팅의 효과 등 단아하면서도 명상적인 이미지와 분위기를 연출해낸다. 마치 남방불교의 만다라처럼 깊은 수행을 통한 무아의 정신적인 경지를 철저한 평면이미지로 환원하여 경건하게 맑은 내면을 투영한다. 이 작가는 연속되는 주제와 형식을 통하여 목판화의 넓이보다는 섬세한 깊이를 추구하는 특이한 모더니스트라 여겨진다. ● 이후 정규미술교육을 받지 않고 60년대부터 독학으로 동판화를 하던 김상유가 70년대 중반부터 목판화를 중심으로 작업을 전개시키며 토속성과 함께 문인화적인 세계를 표출하는 한국적인 정서를 드러낸다. 1970년 제1회 서울 국제판화비엔날레에서 실크스크린과 목판화 혼합기법으로 대상을 수상했던 「출구 없는 방」이후 한국적인 선비정신과 도가적인 은일사상을 구현하는 내용으로 독자적인 목판화의 조형양식을 개발한다. 대작보다는 소품을 선호하며 밀도 높은 형식에서 역설적으로 졸박미, 혹은 대교약졸의 허허로운 미의식을 표출해냈다. 이시기의 김상유 작업이야말로 한국의 목판화에서 작가 내적인 미학을 형식과 통일한 큰 성과라 여겨진다. ● 석란희는 1970년대 말「자연」시리즈의 목판작업을 시작했다. 목판화의 작업과정과 동일하지만 판화의 제작이 목표가 아니라 나무에 판각을 하는 회화가 종국에는 완성된 작품이 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나무판이 가질 수 있는 물질적인 특성과 작가의 내적인 주제의식, 그리고 표현성이 결합되는 이 방법은 격조 있는 감성을 드러낸 수작이라 할 수 있다. 다만 그것이 목판화를 위한 작업이라기보다는 회화적인 표현성을 넓히는 목적이어서 지금은 중단된 것이 아쉬운 일이다. 작가의 자연에 대한 주관적인 정서를 판면에 감정이입한 이 목판화는 기술을 넘어서는 원초적인 표현성으로 더욱 강렬한 문인화적인 인상을 남겼다. 또한 나무라는 물질을 자신의 주제와 물 흐르듯이 통일시키는 유연한 감성은 각법을 넘어서는 정신성을 드러내 보임으로, 목판화 작가가 아니면서도 우리 현대목판화의 흐름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고 여겨진다. ● 한편 일본에서 출생하여 성장기에 한국으로 온 서상환은 부산에서 홀로 목판화를 시작한다. 유·불·선을 아우르며 기독교적인 세계관과 거기에서 연유하는 상징적인 형상을 통하여 내밀한 자아와 정신의 탐구를 깊이 있고 밀도 있게 구축해 왔다. 마치 이승과 저승사이 정신만이 부유하는 림보(Limbo)에서 존재에 대한 깊은 성찰을 요구하는 듯한 형상의 비의는 수준 높은 상징의 세계를 열었고, 거기에서 비롯되는 경건하고도 깊은 울림은 그의 목판화의 독자성을 더욱 강조한다. 또한 프린팅에 있어서 잉크가 판면에서 종이의 배면에까지 베이게 함으로 종이와 잉크의 자연스런 어울림 효과는 서구의 목판화에서는 보기 어려운 독특한 회화적 효과를 자아낸다. ● 김상구는 목판화 하나만을 고집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작업량도 그렇지만 목판화로 표현할 수 있는 다양한 맛과 기술, 이미지들을 건져내며 80년대 이후 한국목판화의 대표적인 작가로 불리워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실험과 다작으로 대중적인 사랑을 동시에 받고 있다. 그의 작업은 도회적인 서정성에 기반한 자연에 대한 접근과, 전통적인 조형성을 최대한 수용하며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작업에 이르기까지 매우 넓은 형식과 내용의 변주를 밀도 높게 이루고 있다. 기본적으로 부드럽고 따뜻한 서정성이 겹쳐지는 다색/단색이 어울려서 그만의 독창적인 정서를 견인해내는 화면은 관객의 마음까지 편안하게 보듬는 소통의 힘이 있다. 특히 판화계의 발전을 위한 헌신적인 노력은 많은 후배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이승일은 릴리프목판화를 중심으로 다른 판종(석판)과의 혼합적인 효과로 그의 주제를 지속해 왔다. 그가 원하는 이미지와 목판화를 위시한 여타의 기술이 합쳐지면서 발생하는 저부조는 뛰어난 기술력과 섬세한 프로세스를 증명해 보인다. 자연스러운 판면을 릴리프로 처리하면서 인공적인 소재들을 배치하여 전통적인 한국문화의 담백함을 표출해내어 왔다. 70년대부터 진행된 이 작업들은 지금까지도 지속되면서 그의 판화에 대한 내밀한 궤적을 증명해준다.
민중미술에 있어서 하나의 전형으로 평가받는 오윤은 70년대 내내 판화제도권과는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활동했다. 주로 책표지나 출판물의 삽화 등을 목판화로 제작하면서 미술의 사회적인 실천, 일상으로의 개입, 제도권으로부터의 탈피, 현장성을 중요시 하였다. 이후 80년대 민족미술협회가 창립되면서 민족미술진영의 미학과 이념의 한 축을 이룬다. 전통적인 민중정서와 신명, 설화, 폭압적인 권력에 대한 풍자, 이웃에 대한 사랑 등의 내용으로 목판화의 민족적 정체성과 전통과의 연계 등을 그만의 형식으로 드러내면서 목판화를 넘어선 80년대 한국인의 정신적인 아이콘을 창출한다. 특히 기존의 화단을 중심으로 한 제도권적 입장과는 달리 출판과 연계해서 판화의 대중적인 지평과 소통을 넓혔다는 점에서 기존 목판화의 개념을 역설적으로 실천한 탁월한 판화가였다. ● 이상국은 자연주의적인 시각으로 이웃과 서민정서를 작가자신의 정서와 통일시키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회화를 중심으로 활동하면서도 끊임없이 혼자서 목판화작업을 진행시키고 있다. 이상국 목판화의 특징이라면 목판화가 그의 회화의 부수적인 표현물이 아니라 회화의 표현성을 이끌어내는 원초적인 기능을 한다는 점이다. 즉 목판화로 작업을 시작하고 그 골격을 회화로 새롭게 해석해내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목판화와 회화는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면서도 다른 맛과 뉘앙스 때문에 독립적으로 존재하게 된다. 이웃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거기에서 동시대인과 작가자신의 삶의 의지와 에너지를 긍정적으로 견인해냄으로 목판화는 그에게서 단순한 장르나 형식이 아니라 작가의 세계에 대한 태도와 실천이 된다. 그의 어눌한 듯 예리한 맛을 이끌어 내는 선과 형태, 판각법에 의한 느낌은 우리의 전통적인 고판화에서 보이는 무기교의 기교처럼 무뚝뚝하면서도 친근감을 자아낸다. 체질적으로 자신의 표현법과 졸박한 전통적 미감을 동시에 드러내는 유일한 작가라 여겨진다. ● 80년대로 접어들면서 두드러진 것은 민중미술의 부상에 의한 사회적으로 실천적인 목판화의 등장과 확산이었다. 오윤의 두드러진 조형성과 여타의 출판매체와 깃발그림 등의 판화의 사회적 실천은 대단한 파급효과를 낳았다. 한편 80년대 소개된 노신과 중국목판화는 민중미술에 하나의 텍스트로 작용한다. 이른바 목판화의 역사, 정치적인 기능에 대한 샘플링이 된 것이었다. 민중미술 진영의 목판화는 저항 미학의 하나의 전형을 이루면서 80년대 미술 전체에 그의 영향을 끼치게 된다. 광주시민미술학교의 일반인들의 판화와 광주민중항쟁을 다룬 홍성담의 작업도 민중미술의 논리를 최대한 실천한 의미 있는 작업이었다. ● 홍성담은 일체의 테크닉이나 전문적인 화가의 티를 내지 않고 일반 민중이나 시민들의 눈높이에 맞게 소통할 수 있는 작업을 했다. 따라서 거기에는 세련보다는 투박한 건강성과 전투적 동지애가 드러났고, 목판화의 형식에 대한 미련보다는 그가 말하려는 내용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서 일반인과 공감할 수 있는 소통의 폭을 최대한 넓혔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의도한대로 관객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치열한 그의 저항성은 그가 제작한 목판화에 그대로 드러나면서 군사정권과의 직접적인 대결의 최전선에 자리할 수 있었다. 특히 광주항쟁에 대한 역사성과 따뜻한 공동체의식을 오버랩시키는 연작판화들은 다큐멘터리적 리얼리즘과 저항이라는 의도를 통하여 보편적인 인류애를 진작시키는 주제를 도출하는데까지 나아갔다.
또한 최병수는 민중미술의 논리를 최대한 작업에 성공적으로 접목했다. 노동자 출신인 그는 목판화를 역사의 현장에 등장시킴으로 오윤이 뿌려놓은 민중미술 목판화의 실천적 미학을 끝까지 밀어 붙인 장본인이었다. 아직도 생생한 1987년의 6월혁명의 도화선이 된 연세대의'한열이를 살려내라!'목판화 전단과, 이를 수백 배 확대해서 그린 걸개그림은 80년대 현장 미학의 결정판이었다. 이후 최병수의 걸개그림과 현장그림, 인쇄매체를 통한 전단 등은 목판화의 기능을 대체하며 민중미술의 목판화는 평론가들과 미술계의 관심권에서 멀어지게 되는 계기도 되었다. 즉 민중미술의 발전에 의해 그 적자인 목판화가 타격을 입는 아이러니가 발생했던 것이다. 어쨌거나 거칠고도 투박한 그의 목판화는 그의 작업이념과 일치하는 혁명의 도구였다는 점에서 유일무이한 무기로서의 작업인 셈이었다. ● 이와는 다르게 김준권, 유연복은 민중적 정서를 찾는 작업으로 자신들의 민중미술이념을 증명하려 했다. 이 작가들은 지금까지도 나름대로의 목판화에 대한 자기미학과 방법론을 찾으면서 지속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 이들은 목판화로 80년대에는 저항과 즉발적인 현장으로, 90년대에는 전통적인 미감과 이웃의 현실을 찾아, 그리고 2000년대는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형식과 내용을 찾아서 자신에게 집중하고 있다. 아마도 민중미술계의 목판화 작가중에 목판화자체에 애정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작업해온 마지막 작가들이 아닐까 싶다. 김준권은 중국에서 수인목판화를 익힌 뒤 한국적인 조형 실험으로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 이제까지의 작업이 실사 풍경에 기반한 것이었음에 반해, 근작은 철저하게 수성목판화의 발색과 판의 표정을 드러내는 관조성으로 넓어지고 있다. 작가본인에게는 부담스러울지 몰라도 의미있는 작업이라 생각된다. 거기에 비하면 유연복은 민중적 정서를 찾는 작업으로 자신들의 민중미술이념을 증명하려 했다. 지금까지도 나름대로의 목판화에 대한 자기미학과 방법론을 찾으면서 지속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 철저하게 국토와 민중적 정서를 묶으려 분발한다. 과거의 전투성보다는 넉넉하게 힘 있는 정서를 엮으려 한다. 민중정서와 자신의 세계관, 인생관을 판화로 통일시키려는 인간적인 면모가 강하게 드러나는 내용중심의 작업이라 하겠다.
한 가지 특기할 사실은 민중미술의 영향이 목판화의 생활에서의 실질적 기능성이나 유용성으로 지금까지 영향을 끼친 것인데, 이는 어떤 진영을 떠나서도 중요한 일이다. 즉 목판화가 공예나 디자인의 기능을 하는 것인데 출판의 영역에서 표지화나 삽화로 두드러진다. 오윤의 선구적인 출판미술 작업들이 있은 후, 그에 영향을 받은 이철수와 홍선웅은 일러스트레이션의 목판화를 메인 컨셉으로 출판물을 기획하면서 여전히 목판화의 실질적인 소통과 심미성, 그리고 자신들의 생각이나 사유를 펼쳐 보이고 있다. 특히 이 작업들은 전통목판화의 효용성과 가치를 실제적으로 우리 시대에 다시 재생산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민중미술의 또다른 중요한 영역으로 여겨진다. 이런 작업에 연계해서 남궁산은 장서표의 영역에서 지속적으로 활동하면서 목판화의 또 다른 기능성을 찾고 있다. 김환영은 창작동화에 전통적인 민화를 목판화로 재현하며 그 소통의 가능성을 찾고 있고, 민중미술진영은 아니지만 유근택의 신문 연재삽화, 그리고 김상구와 판화사랑이 기획한 생활소품들 - 부채, 카렌다, 테이블보, 커텐, 스카프, 시계, 포장지... 등의 목판화를 활용한 공예품의 제작과 유통도 목판화의 실질적인 확산에 있어서 중요한 몫을 하고 있다.(여담이지만 필자는 목판화의 일상에서의 기능을 주제로 위의 작가들로 차후 전시기획을 할 예정이다.) 한편 민중미술이나 모더니즘과는 별개로 목판화 자체의 조형성과 미적인 밀도를 기치로 하면서도 목판화의 대사회적인 실천을 통일시키려한 목판모임'나무'의 활동도 이 시기의 빼놓을 수 없는 성과였다. 83년부터 88년에 이르기까지 7번의 주제전을 포함한 그룹전시를 가진 이들은 당시로서는 표현적 성과가 높은 밀도 있는 작품을 생산해 냈다. 이들은 80년대 초반 국내에 알려지지 않았던 케테콜비츠나 키르히너, 에리히 헤켈, 에밀 놀데 등의 독일 표현주의 목판화의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인지 이들은 단색목판화를 고집하며 칼맛과 그로인한 형상의 표현성에서 최대한 긴장도를 찾으려 했고, 작가 개별적인 테크닉과 표현능력을 중요시했다. 이상호, 윤여걸, 손기환, 정원철, 이섭, 김진하, 김종억, 홍황기 등이었는데, 나름대로 목판화의 각법과 기술, 형상성에 있어서 개별적인 성과를 얻은 작가들이었다. 이중에 윤여걸, 정원철, 김종억, 손기환은 지금껏 작업을 지속하고 있다. 안타까운 점은 이들의 작품이 모더니즘 계열에는 민중미술로 몰리고, 민중미술권 비평가들에게는 알 수 없는 이유로 배척당하면서 실질적으로 작품의 내용이나 수준에 비해 비평적인 지원을 전혀 받지 못했다는 점이다. 물론 이들이 애초부터 어떤 진영보다는 각 개인의 활동을 중요시하는 입장에서 소극적으로 움직인 점은 비판받을 점이 있었지만 비평가 대부분이 외면한 것은 아직도 수긍이 가지 않는 부분이다.
7, 80년대적인 비극적 상황을 배경으로 하면서 그에 견디고 맞서는 개인의 우직한 실존과 비애를 이상호는 뭉툭하면서도 예리하게 표현해 냈다. 그 인물들을 통하여 당대의 한국이 처한 어두운 현실과 그에 대응하는 사람들을 상징적으로 드러났다. 칼의 도식적 운용에서 벗어난 구사와 탁월한 표현력이 빚어내는 그의 인물상들은 전형적인 80년대 한국인이었다. 엄청난 권력과 제도에 저항을 하면서도 내면에서는 번민과 불안과 공포가 뒤섞였던 우리들 모습. 목판화로만 가능했던 이상호의 형상들은 사실 목판화를 전공하려는 학생들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교본이라 생각된다. 세모칼과 평칼, 여타의 조각도들을 마치 큰 붓을 구사하듯이 자유자재로 운용하는 것은 판과 칼이 만나서 이루는 표현의 결정에 다름 아니었다. 그러나 화재에 의한 작품소실과 개인적인 문제로 한국을 떠남으로 작업이 중단된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었다. ● 윤여걸은 죽음과 삶에의 의지를 대비시키는 강렬한 인상의 작업을 했다. 잠깐 활동하다가 독일유학을 갔다 온 90년대 중반부터 다시 목판화를 선보였다. 원시적인 생명성과 자아의 실존과 죽음을 버무리는 내용으로 목판화 프린팅에 한지 릴리프를 겸한 작업으로 대단한 노동력이 소요되는 작업이었다. 특히 검은단색목판화와 죽음이라는 원형적인 소재를 결합하여 자신에게 내재되어 있는 존재에 대한 무의식과 삶에 대한 힘과 의지를 동시에 압축적으로 드러냈다. 드로잉의 강렬함과, 칼의 힘차고 다양한 운용과 프린팅기술이 함께 어우러져서 빚어내는 그의 목판화는 수행하는 요기에게서나 느낄법할 정도로 고도의 정신적 자세를 보인다. 이후 목판화적인 이미지로 애니메이션을 만들기 위해 잠시 목판화를 중단하였으나 최근 다시 작업을 재개하면서 예의 작업의 강렬한 개성을 되찾고 있다. ● 한편 나무그룹에서 유일하게 민족미술진영에서 활동하던 손기환의 작업은 보다 구체적인 소재인 분단현실을 내용으로 한 서정적인 풍경화 연작이었다. 분단상황과 역사성을 자신의 상징언어와 병치하여 서사(敍事)와 서경(敍景)과 서정(抒情)성을 합치하는 풍경은 일종의 고발과 함께 심리적 소통을 동시에 이루려는 시도였다. 특히 호쾌한 밑그림에서 기인하는 단순하고 호방한 칼의 운용이 빚어내는 이미지의 단순성과 회화성이 두드러지는「한강」연작은 대상의 구체적인 묘사가 없는 이미지만으로 그가 의도한 내용을 관객이 충분하게 교감케 한다. ● 김종억은 전통적인 소재를 재해석하는 작업을 하다가 90년대 들어서 풍경을 통한 공간의 역사성에 주목한다. 주로 역사적으로 중요한 장소를 찾아서, 지금 작가가 보는 풍경과 과거 거기 있었던 풍경이 공간적으로는 일치하는 풍경으로 그려내면서도 지금 사람들의 삶의 풍경을 개입시킴으로 어떤 충돌을 일으키는 방식이다. 김종억은 그가 발로 답사한 곳을 부감법으로 재구성하면서 인문지리적인 풍경을 다시점(多視點)으로 제시한다. 시대를 넘어서서 사람들의 자연과의 어울림으로서의 삶을 꼼꼼하게 포착해 내는데 역사와 국토와 현실이 공존하는 그런 공간을 창조해 낸다. ● 정원철은 이미 상당부분 알려진 작가다. 나무 그룹에서도 유일하게 쉬지 않고 활발하게 작업을 해 와서 나름대로의 성과도 얻은 작가이다. 국내, 국제 공모전에서 여러 번 수상하면서 자신의 리얼리스트로서의 형식과 실천의 방식을 구축했다. 철저하게 사람들의 표정과 느낌을 화면전면에 내세우면서 우리시대의 일반적인 사람들의 삶의 전형을 그 내면을 통해서 찾고자 했다. 한편으로는 정신대 할머니들의 삶을 추적하는 작업과, 자신이 살고 있는 마을사람들을 소재로 한 「대석리 사람들」연작을 통해 목판화가 취할 수 있는 역사적 리얼리즘과, 개인적인 실존, 보편적인 휴머니즘을 동시에 구현하고 있다. 특히 근작에서는 형상 뿐 아니라 여백에 대한 배려가 커지면서 좀 더 여유로워지는 화면을 보이고 있다.
80년대 후반기부터 이와는 또 다르게 새롭게 자신을 가다듬으며 목판화의 칼을 갈고 있던 순수미술을 지향하는 목판화가들이 새로운 실험적 기법과 감수성으로 등장했다. 임영재, 안정민, 김익모 등이다. 이들은 일명 소멸법이라 불리는 일판 다색의 방법으로 이미지와 판각, 그리고 프린팅의 효과 모두를 중시하는 판법을 선택했다. 작업의 재료인 판면에 소멸이라는 철학적 명칭을 붙인 다소 과장되어 보이는 명칭이 된 이 방식은 이후 90년대부터 지금까지 가장 유행하는 방식이 된다. 그러나 이 방식은 작업과정에서 지나치게 엄밀한 규칙성과 패턴화 된 반복성을 드러냄으로 오히려 목판의 다양한 성질과 작가의 표현가능성을 축소시키는 단점도 있다. 최근의 2, 30대 젊은 작가들이 구사하는 이 방식의 작품에서 보이는 기능적인 숙련도에 비해 그 표현성이나 이미지, 목판의 물성이 풍부하지 못하게 드러나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 임영재는 이런 일판다색 기법을 구사하는 대표적인 작가다. 서정적인 소재와, 세련된 화면구성과 색채감각으로 김상구 이후 가장 두드러진 대중적 인기를 얻었다. 거기에 10여회나 겹쳐지는 프린팅에서의 잉크의 물질성이 더해져서 두터운 텍스쳐를 형성하여 대단히 중후한 발색을 드러낸다. 그의 화면은 자연이라는 소재를 마치 포근한 대지의 여신과 같이 안락하게 드러내면서도 정겹고 소박한 느낌을 자아낸다. 그의 궁극적 주제인 사람다운 사람, 인간다운 인간을 지향하는 따뜻함을 전통적 서정성과 현대적 세련성의 결합으로 밀도 높은 이미지를 구축한다. ● 김익모는 일판다색의 방법으로 기하학적인 구성의 추상을 드러낸다. 목판화에서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 추상작업을 함으로 조형요소들이 최대한 부각되어 상쾌한 공간을 만들어낸다. 바다 풍경으로부터 변주하는 듯한 색채와 공간해석은 모던한 구성으로 연결되고, 밝고 시원한 청색과 백색의 겹쳐지는 변주는 세련된 도회적 감각에 바탕한 추상으로 전이된다. 기술과 이미지가 잘 연결되어 구상적 추상이자 추상적 구상으로 보인다. ● 50대의 유일한 여성작가인 안정민은 호쾌한 칼의 구사로 운동감 있는 화면을 구축한다. 대담한 구도가 화면을 율동적으로 구축한 위에 칼은 육체의 큰 움직임을 따라 호방하게 진행된다. 전체는 큰 질서로 짜여 있고, 부분들은 칼의 꺼실꺼실한 디테일을 드러내며 그 흔적을 남긴다. 그 안에서 무수한 변화와 균형이 갖추어지는 공간해석으로 인하여 종내에는 모든 조형요소들이 사라지고 동(動)적인 무브먼트만 남는다. 그 운동이 에너지로 보이고, 삶과 인생과 육체가 남긴 것은 오직 이 동세뿐이라는 듯 조형적 질서로 환원된다. ■ 김진하
Vol.20060309b | 木印千江之曲-한국현대목판화의 滿歌 ②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