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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6_0301_수요일_05:00pm
인사아트센터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8번지 Tel. 02_736_1020
2001년에 프랑스로 건너가 작업 활동을 해오던 조각가 박상희의 귀국 후 첫 개인전이 인사아트센터에서 3월1일부터 7일까지 열립니다. ● 이번 전시는 2001년 한국에서의 개인전 이후 5년만의 전시입니다. ● 작가는 지난 4년간 프랑스에 체류하며 여행했던 아프리카와 중동, 유럽 등지에서 마주쳤던 다양한 인종의 얼굴들을 오브제로 형상화 한 작업을 해왔습니다. ● 이번 전시에서는 다인종사회인 프랑스에서 유럽과 아프리카, 인도, 네팔, 캄보디아 등의 땅을 오가며 보고 느낀 그들의 서로 다른 얼굴 이면에서 마치 세균처럼 유전되어 온 그들의 꿈과 문화, 침략과 짓밟힌 역사, 그리고 에로틱한 신화 등의 아우라를 조각가의 입장에서 다양하게 형상화 한 작품이 전시됩니다. ● 작가는 여행을 통해 접했던 이들과 소통하며 지금의 현실이 아닌, 가깝고도 먼 , 또 다른 세계를 경험했으며, 그 세계에서 본 것들을 작품으로 형상화하는 과정에 아프리카인으로, 때로는 캄보디아인과 프랑스여자로서 무형의 점토에서 하나의 형태로 살아나는 이 모습들을 되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 그들만의 잊혀진 숲의 정령과 강의 삶, 그리고 뜨거운 들판에 서있었던 잡초, 그 신화와 역사에 대해서.....
작업 노트 ● 처음 만나는 사람들은 내가 조각가라고하면 어떤 재료를 주로 쓰느냐고 묻는다. 그럴 때 나는 난감해진다. 나는 조각의 고전적인 재료인 나무와 돌, 청동은 물론, 유리와 시멘트, 흙, 하물며 금붕어와 새의 깃털 등 주변의 모든 사물들을 내 작업의 소재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 그리고 사랑과 분노와 욕망까지도 내 작품의 재료로 쓴다고 말한다. 나는 스스로 낯선 기표를 찾아가고 그것에 친숙해지는 것이 즐겁다. 오브제와 함께 하는 여행이 기쁘고 이들과 꿈꾸는 것이 또한 행복하다. 이들은 나를 통해 변용되고 기존의 표상에서 새로운 상징의 이름을 부여받는다. ● 나는 이들과 소통하며 이들은 나를 통해 세상과 소통한다. 그리고 나는 어느새 이들과 지금의 현실이 아닌, 가깝고도 먼 , 또 다른 세계를 경험한다. 그 세계에서 본 것들이 나의 작품들이다. ● 2001년부터 살고 있는 다인종사회인 프랑스에서 유럽과 아프리카 등 이의 땅을 오가며 마주쳤던 다양한 색의 얼굴들이 또 다른 나의 오브제이다. ● 그 수많은 얼굴들의 이면에서 세균처럼 유전된 그들의 꿈과 문화, 침략과 짓밟힌 역사. 그리고 에로틱한 신화를 훔쳐본다. 때로는 낯설게, 때로는 가깝게 내게 질문을 던지는 나의 또 다른 얼굴, 얼굴들... 내 페르소나에 가려진 눈이 열리고 갑자기 귀가 가렵다. 나는 시를 쓰기보다 시를 만들고 싶다. ● 며칠째 작업실에서 잠을 자며 꿈을 꾼다. 아니 꿈을 꾸며 작업하고 작업하며 꿈을 꾼다. / 손끝에서 나오는 또 하나의 생령, 그 형상은 꿈꾸듯 나왔지만 신기하게도 연기처럼 사라지질 않는다. / 이 미완의 생명. 마치 스스로의 호흡을 갖지 못한 양수 속의 태아지만, 내 손에서 슬픈 표정하며, 웃다가 삐지다가 서럽게 통곡하기도 한다. / 내 앞에서 꿈을 꾸듯이, 먼 곳을 바라보는 그의 고향은 어디인가? 나의 손끝인가? 아니면 저 바람 속의 허공? / 그들은 이미 내 안에 있던 이들인가? 나를 통해 만들어진 그들은 누구인가? 자신이 만든 조각작품을 사랑했던 고대, 그리스의 조각가 피그말리온은 그 해답을 알고 있었을까? /이 거친 손에서 아프리카인으로. 때로는 캄보디아인과 프랑스여자로서. 무형의 점토에서 하나의 형태로 살아나는 이 모습들을 보며, 발칙하게도 나는 아담과 이브를 만든 이(?)의 심정을 헤아려 보기도 한다. 그리곤 애초에 있지도 않았던 이들의 망향의 그리움을 달래고자 나는 손안의 보드라운 점토의 감촉을 느끼며 그들의 고향얘기를 빗고 있다. 그들만의 잊혀진 숲의 정령과 강의 삶, 그리고 뜨거운 들판에 서있었던 잡초, 그 신화와 역사에 대해서..... / 나는 어느새 그들이 되어가고 있었다. 도대체 이 꿈은 언제쯤 끝날 것인가? / 2006년 1월 15일 ■ 박상희
얼굴과 표정 안에서 찾아내는 '영혼의 미학' ● 바로 지나간 시대의 모더니즘 조각가들은 흙이나 대리석으로 뭔가를 만드는 대신, 자신의 손에 들려져 있는 것이 흙이나 대리석이라는 사실이 더 본질에 가까운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이 믿음에 의해, 자연의 재현과 그것을 통해 새어들어 올 세속의 잡다한 이야기와 질서들은 반드시 사전에 차단되어야 할 오염원 정도로 간주되었다. 적어도 우리의 앞뒤 세대를 학습시켜 온 강령은 예컨대 로댕의 「칼레의 시민들」을 보면서 그것이 브론즈라는 사실 외에 다른 요인엔 결코 주의를 빼앗기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같은 미학은 거시적으로는 플라톤적 이원론과 존재의 궁극을 물질에 두는 어떤 유물론적 전망으로부터 유래된 것이다. ● 다행스럽게도 이런 '쓸모없어 보이는' 지식에 철학적으로 뿐 아니라 윤리적으로도 동조해 온 사람들의 역사가 거의 끝나가고 있고, 사물을 그런 방식으로 보아야하지 않을까를 정치적으로 망설였던 어리석은 대중들도 거의 다 흩어져버렸다. 이젠 지난 시절 모더니즘 역사의 지독한 선동자였던 주역들조차 이 흥미없는 지식에 계속 머물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전시대의 이 교조적인 미학 덕분에 단지 돌무지나 흙더미, 쇠붙이나 널빤지에 지나지 않는 것들이 숱하게 만들어졌고, 미술관이라는 현대문명의 사원들을 가득 메우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미술사의 상당 페이지는 지나치게 과대평가되었던 이 골치 아픈 불량 자본재들의 매각을 둘러싼 일종의 유산싸움으로 채워지고 있다. ● 박상희의 세계도 많은 재료들의 실험에 의해 지지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 역시 '실험 미술'이라는, 만연한 과학주의가 쏘아올린 작은 공 같은 동시대의 터널을 지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작가에게 재료는 문자 그대로의 재료일 뿐이다. 그것이 브론즈건 깃털이건, 유리건 플라스틱이건, 손 흔적이 여실한 소조건 레디메이드건, 그것들은 다만 인간의 표정을 주조해내는 더, 혹은 덜 중요한 재료들일 뿐이다. 그의 2004년 작 「깃털사이에 바람을 품고, Les Plumes portant du vent」를 보라. 여기서 깃털은 깃털 그 자체로서, 예컨대 금속의 묵직함과 인위적인 광택에 저항하는 안티테제로서가 아니다. 그것은 부상당한 존재, 또는 존재의 부상을 표상하는 가장 극화된 서글픔과 절망의 표정에 바쳐지는 헌물인 것이다. 마치 예수의 발에 뿌려진 유황 같이 말이다.
박상희는 인간의 표정을 찾아내고, 느끼고, 느끼게 하는 데 관심이 있다. 그는 자신이 만났던 사람들의 슬프고, 두렵고, 주눅들어있고, 우울하고, 상처가 있는 표정들을 기록하고, 그것들을 바탕으로 그린버그적 강령 안에서 거세되었던 존재의 심리적이고,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지표들을 꼼꼼하게 다시 복원해낸다. 가능한 모든 재료를 올가미 삼아 감정을 포착해내는 '표정 사냥꾼', 이것이 작가의 정체성으로 제격이다. 사실, 표정만큼 이 모든 것들의 교차로며, 역사이자 동시에 상황이고, 심리학이자 정치술인 드라마가 어디 있으랴! 재료에 집중하거나 예술의 입증에 관한 논 설 따위는 작가의 관심 밖이다. 그는 차라리 '예술가와 시인에게 필요한 것은 오로지 가슴'이라는 알프레드 드 뮈세(Alfred de Musset / 프랑스의 낭만주의 시인)의 계보에 더 가깝다. 그는 천재를 만나기 위해서는 판단의 문을 여는 대신, 여전히 가슴을 두드려야 한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 박상희가 만든 얼굴들엔 유럽과 아프리카, 몽골과 캄보디아가 있다. 문명과 야만이 있고, 승자와 패자가 있으며, 전쟁과 평화도 있다. 민족, 종교, 문화 뿐 아니라 역사와 상황도 반영되어 있다. 두상 전체가 시계로 덮여있는 인상적인 작품 「시간의 초상, Le portrait du temps」2004)은 문명을 앓는 현대인 전체의 상황이 함축되어 있다. 그것은 빠르게 달음박질치는 문명, 장 보드리야르의 표현을 빌자면 '정지공식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앞으로만 달리는 사회'의 시각적 메타포로서 놀라울 정도로 적합하다. 또 그것은 시간을 운명이 아니라 통제 가능한 하나의 조건쯤으로 여기면서, 제트비행기를 타고 분주하게 이동하는 성공한 비즈니스맨의 상징적 초상일 수도 있다. 일테면, 오만으로 인해 재난에 휩싸여버린 포스트 뉴튼 시대의 전형적인 인간형! 시계바늘을 붙잡고 씨름하면서 제아무리 동분서주한들 주어진 시간을 1초도 늘릴 수 없는 존재의 욕망과 상실에 관한 한 탁월한 드라마가 아닐 수 없다. ● 얼굴은 역사와 사회, 젠더를 넘어서는 어떤 본연이 궐기하는 장이기도 하다. 표정의 하부는 존재의 보다 깊은 차원에서 올라오는 영혼으로 채워져 있다. 일례로 프란시스 베이컨을 떠올려 보자. 그는 인물들의 얼굴을 가차없이 파괴하고, 심하게 손상된 표정을 그릴 수밖에 없었다. 뒤죽박죽으로 뒤섞인 살과 뼈를 갈라지고 터진 피부 밖으로 노출시키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다. 그것은 마음의 깊은 곳에서 외치는 재난당한 영혼의 절규가 아니고선 결코 가능하지 않은 표현이었다. 또한, 만일 우리의 가슴에 던져지는 시선의 그윽한 응시, 그것을 통해 한 존재가 고스란히 다른 존재 안에 전사되는 듯 한 깊은 표정이 아니었다면, 램브란트의 자화상들에 오늘날까지 바쳐지는 예찬은 반감되고 말았을 것이다.
박상희가 표정을 추구하는 것은 그것이 '구축된 영혼'의 차원을 지니기 때문이다. 즉, 그에게 표정을 만든다는 것은 영혼을 가시화하는 것이다. 얼굴이 신체라면 표정은 영혼인 셈이다. 뛰어난 성형술도 표정까지 손댈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표정에는 사상과 이념, 타인에 대한 태도, 심지어 신에 대한 자세에 이르기까지 삶의 전 영역이 드리워져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작가의 「깃털사이에 바람을 품고」에서 부상당한 존재의 깊은 시름은 순결한 흰 깃털들의 극적인 상징성으로 인해 영혼의 차원으로까지 깊어진다. 마찬가지로 흰 깃털로 되어 있는 이카루스의 반짝이는 시선은 자신의 과도한 욕망에 내재하는 깊은 공허감을 정직하게 고백한다.(이카루스의 미소, Le sourire d'Icarus)(2004) 아이들의 전쟁놀이를 위한 작은 병정인형들을 덮어 '전쟁이 끊이지 않는' 땅의 진실을 보여주고자 했을 때, 작가는 꿈틀거리는 듯한 두상의 표정을 조율해 그것이 얼마나 두렵고 추악한 것인가를 직관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도록 했다. ● 같은 맥락에서 순박해 보이는 아프리카의 원주민, 명상에 잠긴 인도인, 깡마른 캄보디아인, 그리고 도전적인 몽골인들에게서 보아야 할 것 역시 그들 각각의 고유한 해부학적 특성이나 문화와는 거리가 멀다. 중요한 것은 결코 가면이 아닌, 즉 내면의 깊은 차원을 긴밀하게 반영하는 것으로서의 표정, 곧 영혼의 한 표상인 것이다. 작가가 우리에게 원하는 것 역시 그들의 깊은 정신과 만나고 교류하며 사랑하는 것이다. ● 이상하게도, 박상희가 만든 얼굴엔 우리 모두의 모습이 있다. 아프리카와 몽골인에서 뿐 아니라 산책 중인 프랑스 여성과 심지어는 큼직한 볼트가 얼굴에 박힌 두상에서조차 그리움, 존재의 연약함의 공유, 따스한 연민, 어떤 잠재적인 연관성-흔히 인연이라 하는-이 직관된다. 그들은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이방인이라고 할 수 없는 가까움을 느끼게 한다. 박상희가 '타인을 형제로 만드는', 폴 엘뤼아르(Paul Eluard)가 말하는 '인간의 부드러운 법칙'을 잘 알고 실천했기 때문일 것이다. ■ 심상용
Vol.20060305b | 박상희展 / PARKSANGHEE / 朴相禧 / sculp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