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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6_0303_금요일_6:00pm
이희중_김억_김선두_조병연
부산시립미술관 3층 대전시실부산시 해운대구 우동 1413번지Tel. 051_744_2602
근대에 현대의 시간대기_오래된 밭에 새물을 대다 ● "다르게 질문할 때만 문학은 다른 답변을 제시한다."(문학이론 연구회편_담론분석의 이론과 실제_문학과 지성_2002_p54)● "새로운 사실조차 이전의 기억 속에 다시 집어넣는가. 아니면 기억된 것을 새로운 배치로 탈영토화 시키고 변형시키는 가"(이진경_노마디즘 2_휴머니스트_2002_p48) 아마 이것이 당면하고 있는 우리 미술의 화두가 아닐까. 포스트모더니즘의 급격한 수용과 반발에도 불구하고 그 영향과 징조를 부정할 수 없다. 그런 가운데 정체성에 대한 물음이 다시 재기되고 심각해지는 현실은 분명 우리에게 또 다른 문제를 던져주고 있다. ● 이 전시는 옛 그림의 어법, 익숙한 우리 문화이면서도 이제 낯설게 보이는 어투를 끄집어내어 우리어법의 독특함으로 재연하려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선 땅을 짚고서야 일어설 수 있다는 지적은 옛것을 새것으로 읽으면서, 옛것을 새것의 시선으로 바라봄으로 지금의 제 것을 제대로 볼 수 있다는 뜻일 것이다.
이희중이 잡한 현실과 정보와 인식, 그리고 일상에 얽힌 근대적 사유와 시각방법에 대한 현대적 이해로 민화에 새롭게 접근하고 있다면 김억은 전통 산수화의 공간구성을 그대로 이어내면서 판화로서 전이된 면모를 보인다. 이들 작업은 이런 면에서 이 전시의 주제에 부합된다. 하나는 민간의 신앙적 수준에 이른 회화로서 민화를 현대적 어법으로 다시 읽어내는 작업이고, 다른 하나는 교양인의 문기를 나타내는 전통 산수화로 이상향을 그린 선대의 세계로 거슬러 올라가 보는 것이다. 하나는 소시민들의 잡다한 욕망을 표현하는 것으로, 하나는 피폐된 산하에 대한 애증과 오늘날 우리가 닿을 수 있는 유토피아로 재건되고 있다. 김선두의 이야기 있는 그림은 전통 초화도와 산수도를 습합한 독특한 관점을 보여 준다. 삶의 일상과 곤고함을 그렇게 풀어 볼 수 있다는 것은 모더니즘 미술에서 금기시된 서사적 특징들이 이제는 어떻게 회복시킬 것인가를 고민하게 한다. 그것의 일차적인 형태를 포스트모더니즘 유의 작품에서 흔하게 보아내듯, 결코 옛 것이 아니게 되었다. 그의 작품에서 문학과 그림, 아취 있는 전통적 그리기의 한 형태를 목격할 수 있다. 서사 없는 서사를 읽어야 하는 산수화의 전통과 서사만으로 읽히는 풍속화의 면면을 조합하려는 노력은 돋보이는 부분이다. 이에 비해 조병연은 전통적 그리기에 대해 담담하다. 도리어 미확정적인 형상을 통해 준법의 새로운 이해를 시도하고 전통적 그리기가 어떻게 현대적 세계관을 담을 수 있는지를 보아내려 한다. 그리고 화면 전체를 하나의 색상, 낡고 오래된 듯한 색상으로 처리해서 마치 옛 시간을 담고서 현재에 와 있는 듯한 표현으로 현실을 담아내고 있다. ● 이들 작품들이 개별적 성과를 얻어내고, 그것이 평가의 변별점이 되고 있지만 전통적 그리기의 기법이 그대로 드러난다는 점에서 새롭게 접근하고 새로운 이해를 요청하고 있다. 방언을 표준어로 만들어내는 이들의 작품에서 근대의 시간에 현대의 시간을 대어 하나의 물줄기를 만들어내는 법고창신의 새로운 미학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이들의 그리기 태도에 깔린 어떤 것, 현대화의 조급함과 전통적 그리기에 대한 신뢰와 당당함의 기저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김선두_감성화 된 땅이 만들어내는 질문들 ● 화면의 구상적 구체성을 포기한 듯 색면 추상에 가까운 작업에도 화면 밖 어딘가로부터 시작한 길이 화면 하단까지 이어져 있다. 그 길 끝에 집 몇 채가 동네를 이루면서 현실성을 확보한다. 그곳에 두 그루 나무가 서 있고, 화면 전체를 이끌어가는 산과 그늘진 능선의 어스름이 면분할로 다시 나타난다. 면의 색상 대비에서 오는 경직된 면 분할의 밋밋함을 선이 섬세하게 흔들어준다. 면의 경계가 경계이면서 접합점으로 화면 전체를 엮어내는 그의 독특한 조형방법이다. 그것은 세계를 바라보는 태도이다. ● 면이라는 중성적 조형으로 그가 속한 땅을 분할한다. 그 분할된 땅은 면으로 추상되어 현실을 얻어내지 못한다. 그러나 그 면은 그가 판단하거나 인지할 수 없지만 세계를 이루는 거대한 힘의 표현으로 존재한다. 추상으로서 세계의 존재는 그에게 알 수 없는 거대한 힘으로서 공포이다. 그러나 그 알 수 없는 추상 사이에 집이나 나무가 들어 안고 현실이 비집고 들어선다. 그가 보는 현실은 언제나 추상 사이에 있는 작은 부분으로 드러난다. 그의 이해에 속하는 현실이 된다. 그 현실은 언제나 그가 통어할 수 있는 구상으로 추상으로서의 세계에 대한 일종의 균형의식으로 여겨진다. ● 그의 작품 전체적인 인상은 조감된 정경이다. 그리고 조감된 정경을 통해 그곳에 내재된 지나칠 수 없는 고통, 소외, 상실과 안락함, 애틋함 등으로 일상을 드러내려는 것이 그의 특장이다. 그러나 현실적 눈높이를 벗어난 조감된 풍경은 현실로부터 적당한 거리를 만들어주고, 현실의 구체성을 객관적 사건의 분별에 매이기보다 내면화시키고 감성화 한다. 조형적 배려가 공간 이동이나 시간을 현실성에서 벗어나게 하여 현실의미를 확장시킨다. 그리고 평면화 된 공간의 특징은 많은 것들을 한 공간에 담을 수 있게 하고, 대신 현장감 혹은 현실감을 상쇄시킨다. 그러나 현실구속을 벗어나는 거리를 확보한다. ● 김선두의 작업은 전통채색기법과 산수화, 초충화의 전통적 그리기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으면서 화면 가득 길과 밭, 밭고랑과 논길, 언덕이 핏줄처럼 화면 전체를 유기적으로 연결시켜주고 있다. 그 연결의 선 사이로 일상의 곤고함으로 얽혀 있는 삶의 거처를 보여주고거리감을 확보한다. 그를 통해 오늘의 삶을 이해하고 드러내려 한다. ● 그의 화면 구축 과정에서 드러나는 채색법과 선의 활용은 단번에 올린 원색이든 중첩으로 올린 분채이든, 아니면 먹색이든 그것이 의미의 흔들림, 섬세한 질문이 함유된 것이 아니라면 단지 기법일 뿐이다. 무관한 형상들에서 긴밀한 삶의 의미를 물어내는 것, 그게 그림 그리기 아닌가. 김선두의 작업은 분명 이런 것들에 대한 섬세한 감성의 움직임을 간취하게 해준다. 감성화 된 땅이 던져주는 질문이다.
이희중_분절된 주술과 욕망의 장치 ● 이희중의 작품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소재주의와 민화채용에서 생긴 평면구성과 전통적 채색효과이다. 그리고 그는 소위 서양화를 전공했고 독일에서 유학생활을 했다. 그런 걸 염두에 두고 보면 의외의 소재와 구성방법이다. 그러나 이 구성방법은 그의 작업 초기에서부터 보이는 분할적인 특징으로서 맥락을 갖는 부분이다. 피상적 인상으로 섣불리 민화의 채용에서 온 특징으로 단정할 것이 아니다. 민화에서 채용한 소재의 영향도 없지 않겠지만 분할된 병치적 공간구성의 맥락은 우리 민화를, 자신의 세계로 전이시켜 놓은 양식적 성과로 자신의 조형 감각과 세계관에 연유하는 것으로 보인다. ● 한 작품 속에서 보이는 도라지, 풀, 소나무, 나비, 대, 영지버섯, 갓 쓴 사람, 총석총, 연꽃, 돌다리, 돌무더기들은 흔한 민화의 소재들이다. 그 소재들은 검고 뚜렷한 윤곽선으로 둘러싸여 구획 지어져 있고, 그 안에 단색으로 처리된 색상은 날렵하고 세련되기보다 어둔하고 서툰 선과 형태를 만들어낸다. ● 돌다리 위를 지나거나 바위산 위로 지팡이를 짚고 가는 노인 있는 작품들「대송풍경(大松風景)」,「산행(山行)」도 이런 특성을 잘 드러낸다. 바위 사이로 기화요초들이 피고, 벗인 듯하지만 서로를 돌아보지도 않고 자기 앞만 보고 나아가는 바쁜 걸음의 인물들이 보인다. 몇 개의 선으로 선분된 듯한 구도 안에 산들의 능선이 중첩되고, 반복되는 구조로 사이로 인물, 건물, 나무, 나비, 꽃, 호랑나비, 진달래, 매화, 복사, 앵두가 이런 분할과 무관하게 전개되면서 등장한다. ● 그것들은 평면으로 구획되어 원근에 의한 현실적 긴밀성보다 여기저기 놓여 있다는 개념적 배치에 가깝다. 사물간의 관계로 놓여 있기보다 기호들의 병치나 집적으로 보인다. 사물로서의 체계적인 공간이나 시간적 연계보다 병치된 기호로서의 공간을 확보하고 있다. 이 병치는 무시간성의 화면, 이질적 공간의 조우에서 오는 독특한 공간의식을 보여준다. 그리고 화면 전체를 통괄하는 시점보다 흩어져 있는 공간과 사물들이 어떻게 의미를 구성하고 세계를 이해시키고 있는가 하는 점에 주목하게 된다. ● 이런 구성은 색상의 평면적 처리와 더불어 공간을 평면화 하고 병치하는 분할로 새로운 공간을 환기시키는 독특함이 있다. 이것은 시점 이동이라는 전통적 시각방법으로 시간과 공간을 연접시키기보다 분절시킨 현대적인 해석이나 접근으로 이해된다. 때로 이 방법은 산재된 욕망의 네트워크로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기도 하다. 이상향으로 둘러싸인 세계란 욕망의 잡한 현실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는 역설이다. 민화를 이루는 담론들의 체계, 욕망과 주술로서의 세계란 지난 시대의 산물이 아니라 우리 시대와 초상에 다르지 않다. 근대가 현대의 기층을 이루고 있음을 보여준다.
김억_거슬러 오르는 시간의 연접들 ●「강화염하(江華鹽河)」, 강화도 실경을 소재로 한 두루마리 판화이다. 섬이라 해변을 따라 형성된 길을 중심으로 포대, 돈대 등의 옛 군사시설이 이어지고, 옛 전장의 기억들을 연결시켜 나간다. 그 사이 낚시꾼, 조업하는 작은 어선들, 길가에 세워준 자동차, 관광객들의 모습도 보인다. 영락없는 현실경이다. 이뿐 아니라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서원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장대한 파노라마식「도산구곡」역시 계곡과 정자와 서원과 작은 마을, 계곡을 건너는 다리, 새 길을 내는 데 쓰이는 포크레인, 지게차, 트럭, 승용차, 행락객의 모습이 잡혀 있다. 이도 마찬가지로 지금의 모습을 잡은 장면들이다. ● 그러나 이 화면의 정경은 결코 한 군데 서서 찍은 사진이거나 스케치한 것들로는 불가능한 시점과 거리이다. 몽타주나 콜라주 된 화면 구성임이 분명하다. 여기저기 스케치한 것들을 조합하고 사진으로 담겨진 내용들을 보충해서 만들어진 화면이다. 그것은 두루마리나 족자 형식의 틀에서 가능한 정경들로 되어 있다. 두루마리가 가지는 공간 구성의 독특성은 전통적인 산수화에 다르지 않으며 그 시점을 '움직이는 시점'이라고 하는데 그런 속성에 그대로 들어맞는 정경이다. 옛 시각방법으로 현재를 보는 것에서 현재는 옛 풍경으로 전이되고, 옛 그림의 재연에서 도리어 현재의 시간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는 완강한 현실의 중력을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파노라마식 구성과 시각방법은 풍경화로 읽어내기 힘든 구석을 분명 드러낸다. 그의 작품을 보기 위해서는 두루마리를 펼쳐놓을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한 시각적 전개가 첫째 관문이 된다. 그러나 시점이동이라는 산수화의 전통적 시각방법에 의해 현실경을 재현할 경우 그것은 결국 옛 그림의 틀에서 벗어날 수 없고, 현실을 보는 시점 역시 구태의 방법으로 새로운 것이 없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그 의문이 이 작업의 진정성, 독창성을 의심하게 하지만 시각 이미지에 시간적 속성을 부여해서 고정된 형상을 벗어나려는 것이야말로 포스터모더니즘의 전형적 특징 아닌가? 여기에 김억의 착안점이 있고, 이 작품의 새로운 이해의 단서가 있다. ● 풍경이기보다 풍경을 읽어내는 시간으로 산세를 보이고, 짙은 먹색 사이로 묻혀 있는 집들의 가는 선과 계곡의 흰 물살, 검고 강한 계곡돌과 물 흐름을 그저 풍경으로 보기에는 녹록치 않다. 중첩된 선의 느낌이 독특하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목판으로 찍은 특성 때문인지 선이 길지 않고 단선이 주를 이루고 있다. 집들은 어눌하고 복잡한 곡선 사이로 일어나는 산세와 그 사이를 비집고 나타나는 동네의 한적함으로 강하고 섬세함, 빠름과 느림, 빽빽함과 성김이 흑백 대비를 통해 시간이 필요한 풍경이 된다.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은 결국 서사로 보이고, 그 서사는 사건이 없는 감성화 된 시간의 특징을 보인다. 그의 작품은 시간을 거슬러 오르는 현재의 과거 혹은 과거의 현재형을 통해 우리에게 이어져 오는 이상향을 보여준다. 현실의 이상적 관념화와 이상의 현실화라는 양 극단을 오가는 동양화의 세계를 다시 확인하게 된다.
조병연_분절되지 않는 풍경의 투명성 ● 월출산 주변의 정경들, 구림으로 접어드는 영산강의 샛강, 월남리, 학송리, 개실리, 영암, 바람폭포와 천황사를 잡은 화면은 중국 산수화에서 흔히 목격하게 되는 대관적 시점의 전통적 태도를 확인하게 된다. 산의 한 면이 아니라 산 이쪽에 가려진 저쪽의 풍경을 같이 담아냄으로 원근법이나 한 시점에 의해 통일된 체계를 보여주는 풍경화를 벗어난다. 그리고 산속의 풍경도 잡아내어 빠뜨리지 않고 배치한다. 심원과 고원, 부감의 시각방법이 모두 동원되어야 가능한 풍경이다. 완결된 형상에 대한 분명한 이해와 표현이 아니라 한 곳에서 불가능한 시점을 마련하려는 태도와 한 시점으로 처리하기 힘든 묘사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려는 것이다. ● 그 형태들은 물상 자체를 투시하는 듯한 공간의 투명함을 안겨준다. 이 공간의 확보를 경물간의 구체적 완결성에 두기보다 미완결성에 두고 형태간의 연접으로 경계를 흐리면서 소통되는 공간을 확보하는 것으로 대치하려 한다. 그런 면에서 그의 준법은 낡으면서 새로운 것이다. 이런 구성과 필법, 공간의식 이해 외에 그의 작품의 독창성을 이루는 것은 화면 전체를 덥고 있는 황톳물 채색의 활용이다. ● 현실경에 대한 전통준법의 활용은 근대적 시간으로 풍경을 옮겨가게 하지만 그 위에 황톳물 채색을 올려 풍경이 주는 시간성을 중성화시킨다. 현재와 근대라는 두 시간대에서 적당한 거리로 멀어진다. 화면 속의 정경은 현실과 비현실에 속하지 않는 은유체계로 바뀌게 된다. ● 다른 작품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이런 접근은 앙시와 부감, 평원법이 한 곳에 있는 구성이 될 수밖에 없다. 개념의 조합이라기보다 실경의 조합, 실경을 바탕으로 하지만 풍경을 그리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풍경이 안아내는 감성적 영역을 확보하고 실경이 가진 한계를 벗어나서 다른 경물과 교호하는 세계로서 풍경을 읽어내려는 것이다. 풍경화를 벗어나지만 풍경화의 면모를 가지고 있고, 대관적 구성이 주는 전통적 틀에도 불구하고 수없이 가능한 여러 시점이 통합된다. 한 풍경을 보아낼 때 그곳에 겹쳐지는 수많은 앞선 정경의 영향을 감안하는 그리기이다. 그의 대관법이 어느 것 하나 완전한 경물로 보이게 하지 않지만 그 속에 내재된 시간과 공간을 읽어내는 불확정성으로 제기된다면 그의 풍경은 현대인의 편집증적 증세의 하나를 보여주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런 특징은 주체를 부정하는 오늘의 시각방법의 전형에 다르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시점이동도 대관법에 연유되는 시각방법이자 구성법이지만 방법론이 아니라 그 해석의 다름, 시점이동을 미완성, 혹은 완성으로 나아가는 주저함으로, 수많은 시행착오의 중첩에 의해 형성 중인 특성을 드러내려는 태도로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옛 것을 그대로 두고 현대적으로 읽어내는 또 다른 접근이다. 변용이나 왜곡이 아니라 현실을 읽어내는 새로운 준거가 될 것이다.
"어느 사회에서나 담론의 산물은 언제나 통제, 선택, 조절 된다"(문학이론 연구회편_ 같은 책_p6)는 것인데, 우리의 근대적 산물인 그림이나 그림에 대한 담론 역시 통제, 선택, 조절된 것은 아닐까 하고 물어본다. 그것이 유학적 덕목이든 불교적 이해이든 또는 민속적 믿음이든 중국화의 맥락에 있는 산수화의 이해이든 자체의 논리보다 기층사회의 이념들이 만들어낸 것들이라는 점이다. 근대적 그리기가 가진 공간관, 그림을 통해 닿으려는 지향점 등도 실은 그런 담론의 결과이지 않은가 하는 회의에서이다. 그것이 문화적 틀로서 작용을 한 것이라면 오늘 우리가 당면한 그림 속의 이념적 범위, 영향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시각과 시각성」을 번역한 최연희는 책의 후기에 "시각양식이라는 개념은 또한 시각의 주체가 대상을 바라보는, 즉 대상과 관계를 맺는 방식을 사회문화적으로 매개하고 주조한다는 점에서 개인을 일정한 방식으로 보는 주체, 즉 시각적 주체를 구성하는 사회적 방식을 가리키는 개념이기도 하다"(헬 포스터 엮음_최연희 옮김_경성대출판부_2004_p240)고 한다. 그러므로 근대적 그리기에서 찾아지는 이념들은 해석이거나 설명이 아니라 그림을 통한 세계 이해의 총합이라는 점에서 권력에 대한 경험을 추체험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 그림에서 우리가 만나는 것은 권력에 의한 결과일 뿐인가 하는 물음을 제기해본 것이다. 기존하는 시각 방법이 "우리의 막연한 믿음과 달리, 시각이 단순히 자연스럽고 중첩적인 생리적 지각과정이 아니라 그에 앞선 능동적인 심적 과정의 산물이며, 이러한 능동적 심적 과정은 사회적으로 학습된 관념이나 선입견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이미 심리학의 여러 이론들에 의해 밝혀진 사실"(헬 포스터_같은 책_p240)이 듯, 우리가 이들 작품에서 얻어내려는 것은 기존하는 시지각이 어떻게 영향을 주고 현대적 그리기로 변모되고 읽혀지는 가를 확인하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늘의 이념으로 또다시 그림을 읽고 담론화 함으로 오늘의 이해의 권력 형태를 재구축하는 것이 될 것이다. 물론 여기서 "권력은 모든 단계를 총괄하는 단일한 기원이 아니라, 주체가 끊임없이 조우하는 일정한 권력의 관계일 뿐이다"(문학이론연구회편_같은 책_p209)라는 이해가 필요하다. 낡은 그리기라 전제하고는 현대적 의미를 찾는다는 것 자체가 이미 현대적인 담론을 가져가 근대를 본다는 것으로 순환되는 권력관계를 보이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 "푸코는 담론을 권력과 지식의 복합체로 이해하며, 권력은 새로운 지식의 생산을 가능케 하고 이 지식의 활용은 동시에 새로운 권력효과를 수반 한다" (문학이론연구회편_ 같은 책_p22)고 한다. 이 시대의 그림 읽기 역시 그런 지적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근대를 현대로 읽어내려는 작가나 그것을 다시 담론화 하려는 기획자의 입장이나 결국은 이 시대의 권력 양상의 하나이다. 그러나 오래된 밭에 새 물을 대어 옛것을 새로운 것으로 얻어내려는 노력을 굳이 이런 잣대로 잴 필요는 없지 않을까 한다. ● 이 기획은 근대와 현대 사이에서, 그림에 대한 지식과 학습, 세계 인식의 연속과 불연속의 체계를 설명하고 형성과 변형을 밝히려는 것이다. 그러나 밝히려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이 현대로 어떻게 이입되고 수용되고 새로운 미감으로 자리 잡고 성과를 보이고 있는가 하는데 있다. "문학은 끝없는 중얼거림과 기존담론 질서에 대립하는 대항담론으로 이해하는 푸코의 문학관"(문학이론연구회편_같은 책_p55)은 그대로 미술에도 해당될 것이다. 그림 그리기 역시 끝없는 중얼거림에 다르지 않다. 그림 그리기란 기존질서에 대해. 그것은 기존하는 철학의 범주 혹은 보기의 범주를 파괴하는 사고의 장소가 되며, 기존 "담론의 질서 외부에 있는 언술이며, 낭비적인 소모이며, 추방당한 부분의, 위반의 언어"(문학이론연구회편_같은 책_p76)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위기에서 우리는 근대와 현대라는 시간과 공간이 우리의 경험으로 바뀌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 이희중의 분할은 세계를 면분할로 조합한다. 욕망과 연관된 개별적 면의 집합으로 세속적 구원과 그것에서 일탈하려는 기원으로서 세계를 보아내는 것이라면, 김선두는 일정한 풍경, 땅을 면분할 한다. 일정 풍경의 내면, 여러 겹의 성층으로 이루어진 시간과 여정을 보여주려는 것으로 그가 속한 땅의 이력, 질곡, 소외, 분열을 위해서 분할의 방법을 쓴다. 땅 위의 잡풀이 뿌리내린 내면의 경계를 위해서이다. ● 김억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방법으로 시간의 전개와 그가 바라보는 땅의 이력을 위해서 긴 거리를 파노라마로 보이려 한다. 하나의 시점으로 잡힌 풍경이 아니라 시간에 의해 전개되는 공간을 보이려는 것이다. 이에 반해 조병연은 결정되지 않는 공간, 하나로 분절할 수 없는 삶의 켜, 시간과 공간의 켜를 드러내는 풍경으로 잡아내려 한다. 유동적인 형상, 한 곳에 머물지 않는 감성적인 풍경을 위해 시점이동이라는 위반을 도모하는 것이다. ● 이들에서 목격되는 것은 길을 떠나 전개되는 현실경에 주목하고 있고, 화면을 구체적 공간으로서 맥락을 갖기보다 단편적인 요소들을 담아내는 개별공간으로 취급, 평면적 느낌이 강하다. 민화이든 산수화이든, 초충도이든 그곳에서 목격되는 전통적 그리기의 소재와 기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모두 현실경이고 현실 이해라는 점이다. 그런 면에서 이들은 기존하는 한국화와 동양화의 특성에 기대는 것이고 기존하는 인문학적 성과에 편성하는 것에 다르지 않다. 시각적 주체를 구성하는 사회적 방식에 기대어 그 효과를 자신의 성과로 활용하는 것이기도 하다. 현대화라는 입장에서 다시 읽기를 통해 옛 담론을 새로운 담론으로 열어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새로운 사실조차 이전의 기억 속에 다시 집어넣는가. 아니면 기억된 것을 새로운 배치로 탈영토화 시키고 변형 시키는가" .하는 태도를 통해 유연한 삶의 태도를 보아내려 한다. 법고창신은 옛것을 새롭게 배치시켜 탈영토화 시키고, 새로운 미학으로 재영토화 하는 것이다. 새로운 어법으로 변한 근대의 모습은 분명 현대를 새롭게 만나게 할 것이다. ■ 부산시립미술관
Vol.20060304a | "근대에 현대의 시간대기 : 오래된 밭에 새물을 대다" 기획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