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 난 길을 나서다

신창수展 / SHINCHANGSU / painting   2006_0210 ▶ 2006_0302 / 월요일 휴관

신창수_S/T007A_장지에 먹, 아크릴채색_50×137cm_2005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부산시립미술관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6_0210_금요일_04:00pm

책임기획_부산시립미술관 월요일 휴관

부산시립미술관 용두산미술전시관 부산시 광복동 2가 1-2번지 Tel. 051_244_8228 art.metro.busan.kr

밤에 난 길을 나서다 ● 신창수의 풍경은 바깥 풍경을 보아내기 보다 보는 이의 내적 흔들림을 불러낸다. 밤에 난 길을 따라 나서보면 그의 작품은 빛에 갇혀 있는 풍경을 교란 시키면서 풍경의 깊이를 들여다보게 한다.

신창수_초현리_장지에 먹·아크릴릭_51×72.5cm_2001

한적한 집 몇 채가 마을을 이루고 있다. 잘 다듬은 논과 신작로를 가진 마을이다. 같은 모양을 한 집들이 추녀를 맞대어 마당을 만들고 등 뒤로 나무 몇 그루가 전부인「초현리」풍경이 펼쳐진다. 인적이 없어 적요하다. 그러나 작은 나무 몇 그루들이 그 한적함을 친근하고 살갑게 만들어준다. 집은 안온함으로, 길은 소통으로서 삶의 일상을 보인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 집들은 '집들'이라는 복수에서 한 채의 집, 단수로 바뀌고, 나무는 「폭우」에 심하게 흔들린다. 집들은 이제 마을을 이루지 않고 한 채씩 흩어져 「섬」을 이루고 있다. 섬으로 변한 집은 길을 잃고 그 자체로 폐쇄되고 만다. 그리고 창을 닫아버린 집, 「창. 문 없는 집은 무덤이다」고 하면서 집 옆으로 무덤이 들어서 있다. 음택(陰宅)과 양택(陽宅)이 마주 서 있는 셈이다. 때로 출입문이 보이는 집 속에서 「휴식」을 취하지만 양택의 맞은편에 음택이 놓여 있는「마음의 풍경」으로 대체되고 만다. ● 부산에서 양평으로 거처를 옮기고 난 후의 신창수 작업들인데 2001년에서 2002년 사이에 생긴 작품의 변화이다. 마을이 섬으로 변하고 그 섬은 창이 없는 집들로 변하고 말았다. 한 채의 집이 하나의 섬으로 변한 그곳에는 어둠이 짙고 어떤 길도 보이지 않는다. 갈 수도 없고 가도 창이 없어 소통할 수 없는 지경이다. 한발 더 나아가서 창이 없는 집을 아예 소통이 불가능한 집, 음택으로 표현하고 있다. 음택이란 영원한 휴식이지만 소통이 불가능한, 가닿을 길 없는 곳이다. 이 기저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음택과 양택을 하나의 짝으로 표현하는 그의 표현은 자신 속으로 심연의 길을 만들거나 그 길을 들여다보는 것에 다르지 않다. 안온한 집의 이미지와 창 없는 집과 무덤의 이미지가 겹쳐 있다.

신창수_섬_장지에 먹, 아크릴채색_72×104cm_2001
신창수_마음의 풍경_장지에 먹, 아크릴채색_50.5×71.5cm_2001

2003년 그는 앞과 양쪽으로 길이 난 창이 많은 집 -「양동 가는 길」- 한 채를 둔다. 길을 따라 선 나무들은 전체적으로 어두운 색조에도 불구하고 한적한 풍경을 드러낸다. 집과 나무를 제외하고는 같은 색조의 터치로 전체를 감싸 안듯 표현하고 있다. 이 시기 길이 화면의 중심으로 들어 선 작품-「고송리 옛집」-들이 제작된다. 어딘 가로부터 와서 어딘가로 빠져 나가는 길이 가로, 세로로 나고 어딘가에서 서로 닿아 폐곡선을 이룰 것 같은 샛길을 만들어주기도 하면서 화면에 들어찬다. 길가에 붙은 밭뙈기도 보이고 미루나무나 비탈에 선 잡목들도 보인다. 화면은 원근법이 무시된 전면화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바깥의 풍경에 대한 분명한 시선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2004년, 2005년에 들면서 작품들은 풍경이기를 거부하듯 화면 전체를 옅은 스크래치의 흔적들로 구성된다. 얼룩처럼 보이는 흔적들에서 나무나 숲, 밭, 논배미, 언덕이 화면 바탕에서 올라온다. 그려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올라오는 연상으로서 풍경이다. 그 흔적들 사이로 길이 드러난다. 풍경은 길의 풍경이고, 그 길은 인위적 도로가 아니라 그냥 난 길이다. 주변은 어둡고 길만 환하다. 그 길에는 낮의 소란함도, 갖가지 표정도, 온갖 것들의 수선함도 없다. ● 작가는 밤중에 몇 시간씩 지쳐서 쓰러질 만큼 걸어본 경험을 말한다. 그때, 길을 둘러싼 풍경들, 어둠에 묻힌 길과 그 어둠을 뚫고 길을 나설 때 만나게 되는 것들의 모습이다. 어둠은 모든 것을 묻어버린다. 그러나 그 어둠 사이로 사물은 다시 일어서고 자신을 보이려 한다.

신창수_양동가는길_장지에 먹, 아크릴채색_33×73cm_2003

어둠에 눈이 익어갈 쯤에 시선은 사물에 가 닿지만 보이는 풍경은 낮에 봤던 것들과 다르다. 음영과 입체와 소리와 색상과 형태들이 어둠에 묻히고 어둠에서 다시 일어선다. 그것들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걷는 것이 아니라 어둠 속의 걸음으로 이제 모든 것이 비롯되는 길을 나선 것이다. 그의 풍경이 여느 풍경과 이곳에서 갈라선다.

신창수_고달사 'L'형 작업실_장지에 먹, 아크릴채색_103×73cm_2003

그 길은 고속도로나 잘 정비된 길처럼 시원하게 통행이 좋은 곳이 아니다. 수많은 주저함, 굴곡, 요철, 꺾임, 가파름, 좁고 넓음, 그런 성질이 다 드러나는 길이다. 연속적 선분이 아니라 불연속적 점으로 흩어지고, 점은 사물이 된다. 빛이 있어 밝은 것이 아니라 어둠에 인광처럼 빛나는, 걷고 있는 발에 채여서 만들어진 길이다. ● 경사 급한 밭뙈기와 몇 그루 나무와, 작은 숲, 불이 꺼진 집이 연결도 단절도 아닌 흔들림으로 그곳에 있다. 그의 화면은 그 길에 묻어나는 것들의 울림으로 곳곳이 무너져 있는 길로 이루어져 있다. 그 길은 지도 위에 표기된 선분의 길이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교란이다. 길의 모든 상투성을 뒤흔들어버리고 오직 자신만 남겨두는 길이다. 기존의 길을 교란 시키고 비로소 자신의 안으로 길을 내게 한다. 상투적인 만남, 상습적 보기에 대한 공격이며 자신의 관행에 대한 상처로서의 길이다. 산도, 나무도, 언덕도 흔적처럼 자연스럽게 상처를 묻고 있음을 드러내는 길이다. 희부연 달빛 아래 걷는 길이 아니라 안으로 눈부셔 오는 길이다. 걸어서 스스로 난 길이다. 사람의 길이 아니라 길과 길이 서로에게 가 닿는다. 흔적처럼, 그 속을 알 수 없는 짙은 상처처럼, 길은 눈앞으로 다가왔다 천천히 풍경 속으로 엷어진다. ● 풍경을 이루는 사물들은 어느 것 하나 분절되지 못하고 시간을 담고 그곳에 있다. 무엇인가로 변해가고 있는 거대한 상형문자처럼. 모든 것들이 새롭게 읽혀지기를 바라며 길가에 도열해 있다. 그 길의 처음과 끝에 집이 보인다. 길의 옆구리를 터고 앉은 집이다. 혼자 걷는 길 끝과 시작에 집이 있는 풍경, 「고달사'L'형 작업실」가는 길이 보인다. ● 길과 창, 그리고 집과 무덤이라는 이중 장치로 연결된 그의 세계는 어둠에 묻혀서 모든 것들이 창을 닫고 무덤이 되고 있지만 그 어둠 속에 길을 내는 걸음에서 비롯된 세계를 만나게 한다. 어둠은 많은 것들을 묻어버리지만 길은 많은 것들을 만나게 하는 통로이다. 그 길은 어둠에 묻히지 않고 새로운 통로로 자신의 내면을 보여준다. 그 내면은 어둠을 뚫고 가는 걸음에 의해서 난 길이다. 그것은 내 속으로, 풍경 속으로 접어들어 객관이 아니라 주관이 되게 하고, 표층이 아니라 내면이 되게 한다. 어둠이 아니라 은폐된 것들을 들추어낸다. ● 길은 소통이지만 어둠에 의해 막혀진다. 그러나 그 어둠 속에서 사물은 분절로 세계를 만나게 하지 않고 어둠 자체의 언어로 길을 에워싸면서 새롭게 드러난다. 그렇게 해서 그의 풍경은 길과 무덤과 창 없음이라는 장치에 의해서 새로운 빛이 얻어진다. 풍경의 심층, 무덤으로 덥힌 어둠 속에서 사물의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길을 내어준다. 눈으로 보는 표층의 풍경이 아니라 눈이 길에 길들 때 비로소 일어나는 풍경이다. 풍경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안으로 끌어들인다. ● 걸어서 모든 것들이 다시 보이기 시작하는 그의 풍경은 어둡지 않고 깊다. 그렇게 깊어간다. 풍경은 얼마나 깊을 수 있을까. ■ 강선학

신창수_무왕사 가는 길_장지에 먹, 아크릴채색_33.5×103.5cm_2004

감성의 풍경 ● 눈은 우리의 모든 감각 중 가장 먼저 반응하는 기관이다. 하지만 눈의 감각이 있다하더라도 물체에 부딪혀 각막으로 반사될 빛이 없다면 시각은 여느 때처럼 제일 먼저 반응할 수는 없을 것이다. 눈의 감각을 유보한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거나 안다고 믿었던 인식체계에 대한 회의이기도 하다. 그것은 타인에 의한 던져진 삶이 아니라 온전히 '나'의 경험으로 오직 '내'가 살아가는 삶을 선택하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풍경을 바라봄에 시각이 아닌 다른 감각들이 먼저 반응한다면 일상의 풍경은 어떻게 다가올까. ● 신창수의 길 작업은 풍경이지만 풍경이 아니다. 그의 풍경에는 낮 시간에 보는 시골길 한켠의 들꽃도, 따스한 햇살도, 철없이 뛰어노는 강아지 한 마리도 없다. 그것은 그냥 거기 던져져 있는 그 흔한 풍경이 아니라 '나'의 내면이 비추어진 밤길의 풍경이기 때문이다. 빛이 사라진 밤의 풍경. 외부에 대한 세세한 관찰이나 사실적인 묘사에서 비롯한 풍경과의 교감이 있기보다 내부를 향한 단색조의 거친 붓자국의 중첩과 흐릿하지만 역동적인 형태들이 있다. '나'의 내부가 만들어낸, 나 자신과의 대면이기에 그의 풍경은 다소 두려움이 엄습해오기도 한다. 외부세계보다 내면에 호응하는 풍경을 만난다.

신창수_Y/T003D_장지에 먹, 아크릴채색_147×211.5cm_2004
신창수_C/T005B_장지에 먹, 아크릴채색_66×94.5cm_2005
신창수_C/T006D_장지에 먹, 아크릴채색_136×207cm_2005

이번 전시에 출품된 길 작업은 도식적인 형태의 집이나 나무,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길이 있는 마을 풍경에서 시작한다. 평온하고 따뜻한 「초현리」풍경에서의 집은 한적하지만 온정이 있다. 그러나 이웃했던 집들은 '마을'을 벗어나「섬」에서 보듯 개개의 섬위에 지어진 집 한 채처럼 적막한 쉼터로 변한다. 독립된 개체성에 대한 의문은 급기야 「창. 문. 없는 집은 무덤이다」에서 보이는 집과 무덤의 대비처럼 들어서지도 나서지도 못한 채 세상과 단절되어 가는 '공간(나)'에 대한 불안으로 커져간다. ● 외부와의 소통이 없는 개체성에, 자신조차도 들여다 볼 수 없게 된 '밀폐된 내부'에 회의하듯 내면으로 들어갈 통로를 찾아 길을 나선다. ● 해질녁 길을 나서서 「고달사 'L' 형 작업실」로 향하거나 집으로 돌아가는 걸음걸음을 마치 약도로 그려내는 듯, 초기의 길 작업은 밀폐된 내부에서 나와 세상과 접하는 길, 소통으로서의 길을 그려낸다. 그러나 이내 향할 고달사가 사라지고, 돌아갈 집이 숨어버린 채 길과 벌판, 황량한 언덕만이 남는다. 길의 종착점에는 이제 집이 없을뿐더러 길의 목적이 되었던 어떠한 '공간'도 화면에서 모습을 감춘다. 그 길은 「Y/T006A」처럼 알파벳 Y모양이기도 하고「C/T005B」에서와 같이 C형태를 이루기도 하며 때로는 그저 I자의 가는 끈처럼 보이기도 한다. 마치 여러 장의 그림을 모아 퍼즐 맞추기를 해야 종착지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아니 찾지 못할 것 같다. 이제 '집(나)'은 어디에 있는가. 무한한 공간에서의 단절을 보듯 사각프레임으로 잘려진 공간에서 길은 내리막인지 오르막인지, 평평한지 울퉁불퉁한지도 알 수 없다. 그 막막함 때문에 불안하다. 시작도 끝도 없이 가느다란 끈이 놓여져 있는 까마득하고 막막한 시골 밤길의 풍경. 어둠속에 내려앉은 한줄기 빛처럼 길은 그렇게 뻗어 있다. 그러나 빛이 사방의 사물들을 밝혀내지 않기에 풍경은 낮과 달리 보이는 그 자체의 풍경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길 곳곳에 어렴풋히 자리한 그늘진 미루나무 몇그루가 서정성을 드러낼 뿐이다. ● 마치 삶의 각양각색의 자국들을 쏟아내듯 칠하고 짓이기고 덧발라 만드는 수많은 중첩의 덩어리들은 비록 형태의 명확성은 갖지 못하더라도 밝은 빛 속에서 숨어버렸던 진실처럼 내면의 흔적들을 서서히 드러낸다. 부드러운 황색조의 땅이 여유롭게 메꿔지고 거칠은 숨으로 검은 잡풀들이 자라난다. 무수한 붓자국의 중첩이 만들어 놓는 풍경은 먹이 쌓여가듯 삶의 흔적들을 쌓아간다. 어둠으로 밝혀진 밤풍경은 적막 속에서 서서히 그러나 재빠르게 숨겨놓았던 내면을 풀어놓는다. 그것은 묘사의 측면이 아니라 행위에 의한 감성의 표출이다. 그렇게 밤길은 감성의 풍경을 거닐게 된다. 이제 '나'의 내부는 무한한 공간 자체가 된다. ■ 강선주

Vol.20060212b | 신창수展 / SHINCHANGSU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