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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6_0110_화요일_05:00pm
2006 환경재단 그린페스티벌 전시지원 프로그램 주최_환경재단 / 후원_EPSON_문화일보 갤러리
문화일보 갤러리 서울 중구 충정로 1가 68번지 Tel. 02_3701_5755 gallery.munhwa.co.kr
이번 전시에서는 흔히 생활 쓰레기라 불리는 파지, 페트병, 헌옷, 자동차시트지, 음료수 캔 등이 거대하게 쌓여져 있는 공간성과 그 색다른 이미지들을 새롭게 주목하고자 한다. 이들 생활 쓰레기들은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물들이긴 하지만, 재활용을 위해 거대한 산처럼 쌓여져 있는 모습은 매우 이색적인 느낌으로 다가온다. 쓰레기 더미에서 연상되는 온갖 잡다한 것들이 아무렇게나 뒤섞인 혼란스러운 이미지들이라기보다는 전체적으로 정돈되어 차곡차곡 쌓여져 있는 이미지들이며, 그런 면에서 매우 인위적이고 인공적인 느낌을 던져준다. 그렇기에 황량한 느낌을 던져주는 공간에 수없이 층져있는 쓰레기들의 거대한 덩어리를 보는 일은 마치 새로운 구조물을 보듯, 생경하고 새롭기만 하다. 그 독특한 조형성이나 패턴들의 구조, 빛바랜 색상들의 생생한 조합들이 생활 쓰레기들이라는 익숙한 이미지들을 넘어 새로운 공간의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다. 본인의 시선은 이런 생경하고 독특한 이미지들을 하나의 거대한 건축적 구조물로 읽어내어 보는 이로 하여금 새로운 공간성의 느낌을 받았으면 한다. 그 공간성은 단순한 물리적인 공간성의 문제가 아니라 온갖 시간의 때들이 쌓여지는 공간성의 이미지이며, 죽음과 생성이 서로 맞닿아 있는 공간이기에 오히려 정신적인 유비를 가능케 하는 공간의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세상의 모든 때들이 그대로 묻어있는 것만 같은 이들 쓰레기 더미들을 자세히 보면 마치 퇴락한 삶의 끝자락을 연상케 하듯, 서로 엉킨 채 일그러져 있어 씁쓸하고도 충격적이기도 하다. 디테일들이 살아있는 이런 사진들은 썩은 냄새들을 풍기며 서로 엉켜있는 이들 쓰레기들의 촉각적인 느낌, 그 물성의 느낌을 그대로 전해준다. 그런 면에서 이른바 폐기 처분된 사물들의 뒤안길을 생생한 방식으로 보게 되는데, 이러한 시선의 과정은 삶의 끝자락이라는 퇴락한 여운을 느끼게 하기에 모자람이 없는 것 같다. 한때는 세상의 많은 이들을 위해 용도를 다했던 사물들의 마지막 모습들을 보면서 우리는 이들 쓰레기 더미들이 마치 우리 내 삶의 축소판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다른 의미에서의 삶의 기호들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것은 단순한 죽음과 소멸로 끝나버리는, 그렇게 퇴락한 삶의 끝자락만을 호명하는 의미의 차원이 아니라 재활용이라는 또 다른 생성의 차원으로 상승하는 의미를 포함하는 기호들이라는 면에서 남다르다. 동시에 더럽고 썩은 냄새를 풍기는 쓰레기의 일상적인 의미의 차원이 아니라 색다른 이미지들의 풍경으로 다가오는 낯설고 기이한 사물들의 풍경이라는 면에서 신기하기조차 하다. 본인은 쓰레기 더미들의 물리적 현존을 단순히 제시하는데 머물지 않고 그 숨겨진 의미들을 새롭게 끄집어내고 반추시키고자 한다. 이를테면 저 거대한 쓰레기 더미들의 겹겹이 축적된 집합적인 이미지가 마치 우리 자신들의 모습(더미, the me)일수도 있다는 소박하지만 의미심장한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퇴락한 것들에 생명을 불어 넣길 희망하고, 소멸하는 것들에 유난히 관심이 많은 본인의 시선 앞에 놓인, 저 쓰레기 더미들은 새로운 건축학적 풍경으로 다가온다. ■ 이경애
생성과 소멸의 사진적 웅변 ● 어떤 대상에 대하여 그것과 다른 이름으로 지시하는 수사법을 은유라고 한다. 그런데 심리학적 측면 특히 무의식적 심리기능에서 이러한 은유를 이전(移轉)이라고 한다. 특히 꿈에서 촛불의 불꽃이 한편으로는 꽃봉오리로도 보이고, 예쁜 젖가슴으로도 보이고, 심지어 산봉우리처럼 보이기도 하는 경우인데 여기서 꽃봉오리, 젖가슴, 산봉우리는 공통적으로 연상자 자신의 억압된 욕구에 관계한다. 이처럼 이전은 정서적으로 부담을 지우는 대상을 대체 요소로 옮겨놓는 행위이다. ● 이전은 또한 어떤 공격성 혹은 지향성을 보조적 사물로 대체시키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닭싸움 과정에서 한 닭을 다른 닭으로부터 멀리 떼어 놓으면, 이 닭은 자기 범위 안에 있는 대상에 마구 화내며 쪼기 시작한다. 사람의 경우로 말하면 싸움을 말리면 말린 사람에게 행패를 부리는 경우이다. 마찬가지로 어린아이를 어머니의 젖가슴에서 떼어내면, 아이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엄지손가락을 빤다. 이와 같이 이전은 무의식에서 어떤 긴장을 완화하는 대체 역할을 하고, 이때 선택된 대상을 전이물(轉移物) 혹은 전이 오브제라고 한다. ● 프로이트는 우리가 의식에서 무심코 하는 실수 행위, 어린아이와 같은 유아적 행동, 미친 이의 이상한 짓이라 할지라도, 이러한 행위들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무의식의 욕구와 지향성으로부터 전이된 것들이라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예술 작품으로 드러나는 시각적인 것 역시 실행자의 무의식과 결코 분리하여 설명될 수 없다. 결국 우리가 작품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전이물을 지칭하는데 엄밀히 말해 형이상학적인 존재가 시각적인 이미지로 전이된 것을 말한다. 왜냐하면 작품은 원래 작가 자신의 주관적 의식이 대상에 투영되어 반사되는 자기 반향 다시 말해 감성적인 공명(共鳴) 혹은 "사물과의 교감"이기 때문이다. ● 특히 사진예술에서 이러한 자기 반향은 보다 분명히 나타난다. 그 이유는 손 중재를 통해 표현적이고 조형적인 특징을 가지는 그림과는 달리, 대상의 절대적 복사만 허락하는 사진적 사실주의는 비록 그 이미지가 흐려지거나 왜곡되어 형태가 불확실하게 나타난다 할지라도 여하간 그것의 원인적인 것을 암시하는 지표적인 특징(index)을 가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 원인적인 것으로서 자기 반향은 특별히 작가가 실행하는 예술적 행위에 있어 가장 원천적인 무엇이 된다. ● 그때 사진 이미지는 자신의 경험담을 쓰듯이 적어도 작가 자신의 체험이 투영된 자기 반영 혹은 그러한 존재를 대체하는 대용물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생산된 작품이 작가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앎이나 보편적인 경우라면 그것은 근본적으로 정보 전달을 위한 진술일 것이다. 이는 곧 주체부재의 생산물로 비록 모든 응시자들로부터 공감대를 가진다 할지라도 역사를 만드는 예술이 아닌 대중을 위한 대중예술일 것이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하찮은 폐기물 더미를 보여주는 작가 이경애의 사진 작업은 바로 이러한 예술적 이전으로서의 전형을 잘 보여준다. 작가가 보여주는 이미지들은 첫 눈에 우리의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장관적인 풍경이나 결정적인 어떤 특별한 사건 혹은 상황진술이 아니라, 분리 수거된 빈 깡통, 빈 병, 빈 페트병과 플라스틱 폐품이 만든 죽음의 산들, 종이 짝 같이 압축되어 빼곡히 쌓인 폐차들, 거대한 짚단 더미와 같은 폐지들, 어두운 양탄자를 연상시키는 폐차장 자동차 시트 조각들 등 그야말로 밋밋한 일상 구석에서 전혀 우리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폐기물 더미들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면의 투시 공간이 납작하게 평면으로 축소되어 나타나는 몇몇 이미지들은 희끄무레한 색과 엄격한 구성 그리고 조형적 리듬을 강조하면서 응시자에게 일종의 추상 표현주의나 단색화를 상기시킨다. 그것들은 이상하게도 폐기물과 쓰레기의 지저분한 이미지들이 아니라, 오히려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서정적인 측면을 들추어내면서 우리로 하여금 가던 길을 멈추게 한다. 그것은 곧 작가의 예술적 마력에 의해 보잘 것 없고 하찮은 폐기물들이 갑자기 위대한 예술적 대상으로 이동되는 상황적 변신 그 자체이다. ● 또한 화면을 꽉 채우는 단편적인 큰 구도는 모든 의미의 확실성을 중단시키면서 알 수 없는 무의미의 파토스를 드러낸다. 이러한 큰 구도는 우리에게 아무 상황으로 다시 재구성되는데, 특별히 응시자 자신의 경험적 상황과 심지어 반-체험적인 상황까지 상상하게 한다. 우리를 자극시키는 것, 그것은 장면을 꽉 채우는 구체적인 장소와 확실한 정보들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상상을 자극시키는 불확실한 단편들이다. 예컨대 이미지는 모든 구체적인 장소와 촬영된 대상의 정확한 정보를 감추면서 유일하게 폐기물 더미가 있다는 존재적인 상황만 보여줄 뿐이다. 거기에는 더 이상의 해석학적인 정보가 없다. 이때 이미지는 유일하게 응시자의 경험적 상황으로 환원시키는 자극-신호의 기능만 가진다. ● 여기 보이는 각종 폐기물 이미지들은 비록 단순한 소재라 할지라도 적어도 일상을 살아가는 현실의 비평적인 측면과 사회적 문제를 숨겨 놓고 있는 듯 보인다. 첫 눈에 작가는 현실의 구석진 장면을 의도적으로 비현실적인 상황으로 연출하면서, 사회적 명분과 테마기획으로서 자연보호와 환경문제 등 오늘날 물질사회의 어두운 딜레마를 던지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이러한 성급한 의미 규명이 특별히 문제가 되거나 잘못된 해석이라고는 할 수 없다. ● 그러나 이러한 소재들은 작가의 표현적 매개물일 뿐, 사회적 문화적 코드 안에서 그 대상 자체가 가지는 상징적인 소재가 아니다. 말하자면 작가가 던지는 궁극적인 메시지는 폐기물 더미가 가지는 사회적 코드로서 비평이 아니라 오히려 지극히 개인적인 어떤 철학적 문맥에 관계한다. 핵심적으로 말해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진적 주제"로서 이미지가 은닉하고 있는 작가 고유의 경험적인 침전물이다. 왜냐하면 그림의 경우와는 달리 사진 이미지가 드러내는 메시지는 작가 고유의 내부적 경험으로 소급되어 올라가는 특별한 이미지 읽기에 있고, 결과적으로 사진의 이해는 의미의 조합에 있는 것이 아니라 누설되는 그 출현의 원인성에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우리가 무심코 스쳐 지나는 것들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땅에 떨어진 무엇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모습, 바로 그것은 나의 모습이고 우리 모두의 모습이다 - 오히려 소멸되는 존재에 삶의 진정한 가치와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소멸은 소생의 또 다른 측면이기 때문이다"라고 자신의 노트에 적고 있다. ● 이와 같이 작가를 유혹한 것은 이미지의 외관이 외시하는 단순한 조형적 효과나 상투적인 암시 혹은 맹목적인 사회적 이슈가 아니라, 그 외관 이면에서 폐기물 더미로 위장된 메시지 즉 자신의 삶이 투영되어 포착된 위대한 자연의 진실과 순리이다. 결국 사진 이미지로 나타난 폐기물 더미는 자신이 체험한 삶의 진실을 은밀히 들추어내는 지표(index)로서, 작가 자신의 발생적인 침전물을 대체하는 무의식적인 전이물이 된다. 작품이 궁극적으로 함축하는 것, 그것은 자신도 모르는 어떤 과거의 애착과 아쉬움으로부터 잉태된 순수 그 자체의 느낌 즉 자연의 섭리로서 생성과 소멸이다. ■ 이경률
Vol.20060110a | 이경애展 / photograph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