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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6_0110_화요일_05:00pm
송은미술대상전 대상수상 기념展
후원_송은문화재단_한국문예진흥원
2006_0110 ▶ 2006_0126 / 송은갤러리 서울 강남구 대치동 947-7번지 삼탄빌딩 1층 Tel. 02_527_6282 www.songeun.or.kr
2006_0210 ▶ 2006_0226 / 드루아트스페이스 서울 종로구 화동 50번지 Tel. 02_720_0345
나뭇잎으로 그린 상상의 지형도 - 근원적 삶으로의 여정 ● 김희정의 근작들은 나뭇잎 가루로 이루어져 있다. 떨어진 낙엽을 주워서 수분을 완전히 말린 후 가루로 만들어서 아교풀과 섞어 작품의 재료로 사용하는 것이다. 나뭇잎을 줍고, 가루로 만들고, 작업하면서 직접 쓴 '나뭇잎 일기'에는 그가 떡갈나무, 포도나무, 느티나무 등 다양한 나뭇잎들에서 느꼈던 감정들과 작품으로 이르게 되는 제작과정이 마치 실험일지를 쓰듯이 찬찬히 기록되어있다. 나무들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특성들을 기록한 일기를 읽으면서, 이미 수명을 다해 떨어진 낙엽들에도 나무의 본래 속성이 분명하게 남아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나는 맨드라미 가루로 그린 진홍색 그림 앞에서 혹시 맨드라미의 향기가 나지는 않나하고 나도 모르게 코를 가까이 대보기도 했는데, 아마도 많은 관람자들이 이 그림 앞에서 냄새를 맡아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지 않았을까 싶다. 이미 노화되어 나무줄기에서 떨어진 꽃잎의 가루에서 아직도 그 자연적 생태의 자취가 느껴지는 것은 이 가루들이 자연의 순환 속에서 여전히 마지막 제 생명의 몫을 행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김희정의 근작들은 건조하고 바삭거리는 질감으로 인해 마치 바람결에 바스라질 듯 연약하다. 낙엽이 애초에 가지고 있던 메마른 느낌이 그대로 전해진다. 더욱이 이 작업들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아교풀의 수분이 증발해감에 따라서 서서히 더 메마르게 건조해가서 마치 언젠가는 사라져버릴 것만 같다. 작가가 보여주는 자연적인 재료에 대한 관심이 파릇파릇 돋아나면서 싱싱한 생명감을 뿜어내는 잎들이 아니라, 왜 하필 생명이 다하여 나무에서 떨어진 채 수분이 말라버린 낙엽에 집중되는 것일까 궁금해진다. 작가는 왜 그 모든 작업의 결과물(이것은 작업 과정의 유난한 어려움을 생각했을 때 적지않은 노동의 결과물이다)이 스러져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일까? 더욱이 그 과정을 왜 작업의 일부로 삼고 있는 것일까? 김희정의 작업이 드러내는 그 건조하고 바삭거리는 느낌은 분명 노화된 육체가 메말라가는 죽음의 과정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그의 작업은 삶이 죽음을 향해가는, 그 필연적이고 집요한 일선적(一線的) 방향이 안겨주는 심리적 무게를 초월한다. 거기에는 죽음에 대한 감정의 개입이 전혀 없으며, 단지 그것을 응시하고 관찰하는 매우 관조적인 시선만이 남겨진다. 그 결과로 형성되는 아우라는 모든 것을 놓아버린 듯한 무상함이다. 그러고보니 김희정의 이전 작업들에서도 이와 비슷한 무상함이 발견되어진다. 검은 비닐봉투를 반복적으로 똑같이 이어서 만든 작품, 혹은 첫번째 개인전에 보여졌던 「지루한 여섯 개의 상자」와 같은 작품에서는 하나의 구조가 지루할 정도로 방점 없이 수평적으로 반복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김희정의 작품 속에서 나타나는 생태적 특성은 결국 삶과 죽음이라는 두 차원을 순환적 사이클을 통해 바라보고자 하는 세계관의 표현이다. 「묘소(墓所)」라는 이전 작품에서도, 낙엽가루 같은 자연적인 재료들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건조되어가는 과정이 작품 내용의 일부를 이룬다. 이 작품은 김희정의 작업이 내재하고 있는 독특한 감수성을 드러내고 있다. 건조하게 바스러져가는 질감은 죽음의 그림자를 강하게 표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연약하게 숨쉬고 있는 것과 같은 살아있는 생명의 느낌을 전한다. 이러한 표현을 통해 작가는 죽음 자체가 결국 자연적 삶의 일부임을 상기시키고 있다. ● 이와 같은 작업들은 작가가 직접 경험한 여행의 기억과 관계된다. 메마른 나뭇잎의 질감은 티벳과 북인도의 고산지대에서 보았다는 척박하고 건조한 산의 느낌과 연결된다. 티벳이나 인도와 같은 지역에 대한 작가의 관심은 이국적인 문명이 아니라 문명의 저변에 깔려있는 근원적 삶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근작들에서는 특히 티벳에서 경험한 삶에 대한 향수가 현저하게 발견되는데, 이는 특정한 물리적 장소에 대한 그리움이라기 보다는 죽음과 삶이 원형 그대로 공존하는 보다 근원적인 삶의 장소에 대한 향수를 반영하는 것이다. 작가 스스로 '오아시스'라고 일컫고 있는 근원적 장소로 향하는 여정은 김희정의 근작들에 나타나는 가장 중요한 모티프이다.
이번 전시작품에서 김희정은 그의 정신적 여정을 통해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세계를 하나의 섬과도 같이 서로 연결된 풍경으로 구성하였다. 이 세계는 상상 속의 세계이며 미지의 영역이지만, 사막 속의 오아시스처럼 어디엔가 필연적으로 존재할 것이라 믿어지는 세계이기도 하다. 그 세계 속에는 나무, 산, 달, 두더지, 오아시스와 같이 자연적이고도 환상적인 분위기를 표현하는 장소 혹은 생물들이 나뭇잎 가루로 빚어져 존재하고 있다. 이 풍경이 시작되는 지점에는 그곳을 안내하는 상상의 지도가 역시 나뭇잎 가루로 그려져 있다. 그곳은 마치 지구 저편 어딘가 실재하는 장소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 먼 우주 어느 편의 낯선 공간처럼 보이기도 한다. 달빛 비치는 나무 주변에 원시부족들이 둘러앉아 알 수 없는 주문을 외우고 있을 듯한 신비로운 풍경이기도 하다. 근원적 상상 속에서 존재하고 있지만 현실에서는 더이상 찾기 어려운 풍경이기에 그것은 김희정의 작품 속에서 끝없는 향수의 대상일 수 밖에 없다. 그의 나뭇잎 일기에서 발견한 인상적인 구절이 떠오른다. "근원으로 돌아가서 처음부터 다시 살면 그것은 마법이나 신앙이겠지." 김희정이 떠나는 여정은 '자연'과 '근원'과 '마법'과 '신앙'이 하나로 존재하고 있는 세계를 향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 세계가 현실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기에 찾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부재하기에 찾고있는 것일까? 어쩌면 그 둘다 인지도 모르겠다. ■ 이은주
"미지의 지역 오아시스에서는 거룩한 나무를 만들어 거기에 피를 바른 후 그 위로 올라가 하늘로 사라졌다. 오아시스인은 언제나 그것을 갖고 다니며 중요한 일이 있을 때면 그것이 기울어지는 방향으로 이동하곤 했다. 그들은 계속 움직여 다녔으나 언제나 그들의 세계 속에 있을 수가 있으며 이와 동시에 사람들이 사라져간 하늘과 교섭할 수 있었다." ■ 김희정
Vol.20060109b | 김희정展 / KIMHEEJEONG / install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