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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6_0104_수요일_06:00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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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적이고 환상적인", 류해윤옹의 그림 이야기 ● 류해운옹은 71세라는 늦은 나이에 그림을 시작한 특이한 화가, 아니 연로한 신인이다. 1999년 노부가 돌아가시자 제사상에 올려놓기 위해 고인의 작은 사진을 보고 그대로 그려본 것이 화업 시발의 단초가 되었다. (10번 이상 사진을 보고 베끼다 보니 돌아가신 아버지 얼굴과 비슷한 모습이 나오더라고 한다.) 그 이후 가업인 복덕방 한구석에 화실을 차리고 그림을 그려온 지 8년째로, 그동안 그려온 그림이 총 420점에 달한다. ● 왜 그는 이 나이에 그토록 집요하게 그림을 그리는 것일까. 어린 시절 천재화가였다는 일화가 있는 것도 아니고, 젊은 나이에 붓을 꺾어야 했던 청년작가의 경력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단지 누구나 한번쯤 그럴 수 있듯이, 국민학교 당시 군 교육청에서 미술상을 받아보았을 뿐이다. ● 그는 그림을 그리면 잡념과 고민이 없어지고 만사형통이라 정신 건강에 좋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와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일요화가나 아마추어 같지 않게 자신의 작품에 결코 만족하지 못하는 치열한 작가정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의 불만은 그림이 실제와 닮지 않게 그려진다는 것이다. 원근법, 명암법과 같은 기초적 모방기술을 배우지 못한 그로서는 당연한 불만이다. 그러나 그는 대부분의 독학 화가가 갖고 있는 개성적 표현력과 순진무고한 감수성을 갖고 있다. ● 모방의 기술을 터득하지 않았기 때문에 얻어지는 변형과 왜곡, 그만의 고유한 조형적 특성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러한 사실을 모른 채, 그는 모방을 추구한다. 그의 최대 목표는 모방적 재현이다. 그러나 인물이나 풍경 등 실제 대상을 놓고 그리기에는 기술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탓인지 그는 대부분 이미 재현된 이미지를 모방하는 것으로 자신의 화업을 시작한다. 그가 주로 참조하는 이미지 원천은 신문사진이나 텔레비전 화면인데, 아마도 신문이나 텔레비전이 그가 접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화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 여기서 특이한 점은 이미지 모방의 과정에 자신 특유의 상상력을 발동시키는 점이다. 그 상상력은 예술적 영감이라기보다는 기억과 추억으로 아롱진 개인적 감흥이다. 시간 속을 흐르는 동영상일 경우는 기억에 의존하지 않고는 그 재현이 불가능하지만, 그는 신문사진을 참조할 때에도 일단 보아둔 형상을 기억으로 되살리며 그려낸다. 기억을 화폭으로 옮기는 과정에 상상과 환상이 개입되는데, 그 결과 원본과 다르게 그려지고 다르게 말해지는 그 특유의 조형과 그만의 내러티브가 도출된다. 1999년부터 현재까지 이렇게 그려진 그림의 대부분은 일부 인물화와 화조화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풍경화이다.
그의 풍경화는 나무, 꽃, 계곡, 호수 등을 그리는 산수풍경화와, 풍경 속에 집, 사람, 동물이 등장하는 풍속풍경화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대부분의 산수풍경은 실제 대상을 사생한 것이 아니라, 앞서 말했듯이, 이미 재현된 이미지의 기억을 토대로 그린 것이다. 예컨대 「금강산 계곡」(2003)을 비롯한 금강산 연작은 대부분 텔레비전에서 본 금강산을 토대로 그린 것이고, 「백두산 천지」(2004)나 「산정호수」(2004), 전라도「울금바위」(2005) 역시 신문 사진을 보고 그린 것이다. 뱃사공이 노를 젓는 거제도 앞바다 풍경「어왕도서 고기잡이」(1999)는 서울 역전에 붙어있는 그림을 토대로 재구성한 것이다. 「풍류도」(2001)에는 정자 안에 고풍스러운 선비가 등장하는데, 그것 역시 신문에서 본 고구려 벽화의 인물도를 기억으로 그려 넣은 것이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길바닥에 늘어놓고 파는 상화를 보고 집에 와서 그린「산수화 여름」(2005)도 있다. ● 일종의 장르페인팅이라고 볼 수 있는 그의 풍속풍경화는 어린 시절의 기억이나 일화를 기초로, 또는 경험적으로, 개념적으로 알고 있는 사실을 독자적으로 형상화한 풍경이다. 옛 어린 시절의 추억을 회상하며 그린 「고향마을 초가집」(2005),「베 짜는 아낙네」(2000),「한우」(1999),「한우목장」(1999),「자연의 토종닭」(1999), 또한 「가을걷이」(1999)와 같은 추수와 타작 광경, 「구정」,「대보럼날」(2004) 등 명절날 광경, 온 식구들이 한데 모인 잔칫날「농촌초가집에서」,「제사엄식」(2005), 상투를 튼 어민들과 머리에 띠를 두른 농민들이 야외에서 잔치를 벌이는 「조선시대 어민과 농민이 함께 모여 5월 단오절을 마자 흥겨운 노리잔치」(2005) 등이 대표적 풍속풍경화이다. 그는 또한 옛 동네의 실풍경이나 실제 역사적 사건을 기억으로 재현하기도 한다. 자신이 살았던 집에 부부 자화상을 그려넣은 「부부내외」(2000), 터널을 지나가는 구식「증기기관차」(2000), 신혼여행을 마치고 고향 다리를 건너는「신혼의 젊은 부부」(1999), 6.25동란 당시 교량은 폭격 맞고 기차를 타거나 걸어가는 피난민 행렬 「6.25동란에 피란민덜」(1999), 인민군이 동네를 점령하고 강제로 끌려가 노동하는 동네주민들「6.25 낙동강 강변전투고지에 야전병원」(1999) 등, 갖가지 일화들이 자신의 도상으로 양식화된 풍경속에서 희화화된다. ● 때로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를 그린다. 그가 지금 살고 있는 길음동 가옥, 복덕방과 살림집이 한데 있는 3층짜리 건물을 그린「우리집」(2004)이 그의 생활상을 엿보게 한다. 근자에는 남북 대화의 의미나 이산가족의 고통을 암시하는 시사적 풍경화를 그리기도 한다. 「통일동산」 (2003)은 김대중 대통령이 방북하여 김정일을 만나는 보도 사진 배경에 나타난 풍경을 모사하여 그린 것이고, 「통일의 동산」(2003)은 남과 북을 상징하는 두 인물의 대화 장면을 자신의 풍경화 속에 삽입한 그림이다. 또한 「30년만에 상봉한 부녀의 이산가족」(2004)에서는 상봉의 슬픔을 서로 포옹하는 부녀의 손과 얼굴의 부분도로 강조하고, 정주영 회장이 끌고 간 소가 남향을 바라보고 있는 풍자적 장면「북한농장에서 고향을 바라보는 남한소」(2004)을 통해 남북 분단의 비극을 은유하기도 한다. ● 그의 풍경화에 사람과 동물, 그리고 이야기가 등장하듯이, 그의 인물화나 화조화에는 대부분 유사한 양식의 풍경이 축소판으로 등장하면서 맥락을 부여한다. 어떻게 보면 그의 인물화나 화조화는 풍속풍경화의 클로즈업 버전이자 그것의 특정 장르화라고 볼 수 있다. 인물화는 주로 가족과 주변의 친구들, 즉 기억으로 재현이 가능한 가까운 인물들의 초상화인데, 그 역시 상상과 환상이 개입된 특정 양식과 내러티브로 형상화된다. 말탄「자화상」(2000), 옛마을 풍경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한「들판의 자화상」(2000), 빨간 스포츠차를 타고 나들이하는 부부 자화상「나들이」(2000), 무명한복을 입은 농부 모습의「삼형제」(2001) 등, 가족들 초상이 비현실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또한「육체미」(2001)에서와 같이 속옷이나 운동팬츠만 입은 반나체의 친목회 친구들의 초상이 있다. 배경 풍경을 뒤로 하면서 앞으로 달리고 있는 친구들의 모습이 해부학적으로 부자연스럽지만 그 특이한 캐릭터로 시각적 즐거움을 선사한다. ● 그의 화조화에는 화병에 담긴 흐드러진 국화다발「생화」(2001),「청송 학」(2004),「매화」 (1999),「송학」(1999) 등 정통 화조화를 비롯해, 키치화된 민화적 호랑이가 등장한다. 「먹이를 쫒는 호랑이」(1999), 강아지를 물고가는 「호랑이」(1999) 등, 그는 다수의 호랑이 연작을 주로 천위에 그리고 있는데, 이 때문에 키치적 성격이 더욱 강조되고 있다.
풍경화, 인물화, 화조화를 통틀어 그의 그림들은 기법과 양식을 외면한 조형의 자유를 구가하고 있다. 기초 드로잉 기술은 물론, 원근법, 투시도법, 명암법을 학습하지 않은 까닭에 반/탈모더니즘 의지에서 비롯되는 포스트모던 탈형식, 탈양식과는 다른 자발적이고 무목적적인 형식과 양식의 일탈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미술사의 외곽에서 비주류 흐름을 형성하다가 모더니스트 아방가르드 손에서 재해석되면서 부각되었던 타자적 원시성과 비견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작업의 원시성은 "프리미티브 아트"로 규정되는 원시부족미술의 그것과 다르게 집단성과 제식성, 그리고 양식상의 일관성을 결핍하고 있다. 그대신 그는 전적으로 비학습에 의거한 조형적 해방과 표현적 자유로, 동시에 고독한 실험과 그리기의 반복적 훈련으로 터득된 작가 특유의 원초적 조형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 그의 작업의 조형적 특징을 비평적 용어로 말하자면, 비원근법, 미시적 시각과 거시적 시각의 중첩, 복수시점에 의한 평면성, 표면성, 단순성, 추상성, 그리고 산등성이, 파도, 초가집 등의 재현에서 드러나듯이, 소재와 도상의 반복으로 인한 패턴화된 장식성이다. 결과적으로 어떤 그림은 크리스마스 카드나 초등학교 교과서나 신문 도판같이 삽화적이고, 어떤 그림은 달력 그림, 이발소 그림같이 키치적이다. 그러나 다수의 풍경화는 그가 이미 회화적 경지에 이르고 있음을 말해준다. 「금강산 삼부강」(2004)을 비롯한 일련의 산수풍경화는 화면을 가득채운 달필의 스트로크와 풍요로운 색채로 보는 이의 감흥을 자아낸다. 인물화 경우, 「가족도」(2000)는 프리다 칼로의 원시 스타일을 방불케 하는 회화적 밀도와 원색적 색감으로 독창적 표현을 성취하고 있다. 실로 그의 그림의 미덕은 고행에 가까운 극기적 자기숙련으로 한뜸한뜸 수놓듯 화면을 가득 채우는 달필의 붓질에서 비롯된다. ● 그의 그림이 양식적으로 원시성을 표출한다면, 내용적으로는 환상성을 함의한다고 볼 수 있다. 환상성이란 현재와 과거, 현실과 초현실의 경계가 애매모호한, 아니 그 경계에 있는 비고정적인 상태에서 생성되는 판타지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만든다는 어원(phan, fan)에서 비롯된 이 판타지는 거울이미지와 실제이미지 사이의 분열, 이중성, 위험, 그리고 그에 대한 위반적 매혹으로 설명될 수 있다. 그 매혹은 결핍에 대한 욕망으로 분출되며, 대리만족, 보상심리의 맥락에서 통합된 현실을 갈망하며 부재와 상실로 경험되는 것을 추구한다. 환상이란 결국 말할 수 없는, 말해질 수 없는 트라우마를 건드리고, 지배적 문화질서로부터 은폐된 무질서, 무의식을 이야기하는 비언어적 언어, 유령적 언어로 풀이될 수 있다. ● 그의 그림을 환상성에 비견시키는 까닭은 무엇보다 그의 작업이 현실과 초현실의 경계에서 밀어적 내러티브를 산출하기 때문이다. 실로 그의 그림은 기존의 재현 이미지를 재생산한 것이나 개념적, 상상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나 간에 현재와 과거, 실제와 상상, 현실과 초현실의 범주를 하나로 녹이고 있다. 특히 기억과 상상에 의존하는 풍경화에서 이러한 특성이 두드러지는데, 이렇게 특정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고 있는 그의 환상적 풍경화를 그의 아들 류장복 화백은 "무릉도원"이라 칭하고 있다.(류화백은 산수풍경에 해당되는 일부 풍경화를 무릉도원으로 분류하고 있지만 필자는 그의 모든 그림이 환상적 무릉도원에 해당된다고 본다) ● 그의 그림을 환상성으로 풀이하는 또다른 이유는 그것이 작가 본인의 뜻과는 무관하게 위반적이고 전복적인 힘을 내재하고 때문이다. 그 힘은 바로 미술의 조형적, 미학적, 정서적 규범을 벗어나는 원시성에서 비롯된다. 그는 재현기술의 원시성 뿐 아니라 지성과 감성의 원시성으로 침묵의 시각언어, 무의식의 형상언어를 개발하고, 이를 통해 주류미술과 다른 타자적, 대안적 표현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순수미술의 인식론적 한계,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의 홍수 속에서 새로운 자극과 충동을 갈망하는 현대 미술인들에게 류해윤 옹의 이 순진무고하고 원시적인 환상적인 그림들은 분명 청량음료같이 시원하고 일탈의 돌출구를 마련하는 것으로 보인다. ● 그러나 우리는 이 자리에서 자문해야 한다. 우리가 원시에의 동경과 이국적 충동으로, 또한 탈문명적 도피심리로 그를, 그의 그림을 타자화하는 것은 아닌가. 고갱, 피카소, 마티스를 비롯한 19세기말-20세기 초 서구 아방가르드들이 아프리카조각과 현대미술의 양식적 유사성을 통해 원시미술을 현대미술의 영감으로 간주하고 그 미학적 가치를 높이려 했지만 그들의 예술적 실험은 결국은 양식과 형식만을 강조함으로써 원시미술의 집단성, 제식성, 서사성을 배제시키며 그 본질을 왜곡시켰다. 우리가 그러한 식민주의적 과오를 또다시 범하는 것은 아닌가.
류해윤옹의 이번 전시는 현대속의 원시미술의 예시라기보다는 현대미술의 다양성의 예증으로 기획되었다. 동시에 한 개인의 회화적 열정과 열망은 연령에 구애받지 않고 펼쳐질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키는 기회가 되고자 했다. 신세대의 등장과 그들의 국내외 활동이 각광받으며 미술계의 지형도를 바꾸고 있는 한국 현대화단에서 연로한 독학화가인 그의 존재는 주변의 주변에 해당된다. 어느 주변부 작가의 첫 개인전, 연로한 신인화가의 데뷔 무대가 중심과 주변의 경계를 흐리고 주변과 타자를 다시 보는 성찰의 기회가 되었으면 하는 기대를 걸어본다. 동시에 이 전시가 화단 뿐 아니라 한국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연령차별주의에 대한 가벼운 경종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 김홍희
Vol.20060106b | 류해윤展 / RYUHAEYOON / 柳海潤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