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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6_0104_수요일_06:00pm
갤러리 룩스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5번지 인덕빌딩 3층 Tel. 02_720_8488
전통과 민족의 표상공간-임민수의 박물관사진을 떠올리며 ● 임민수의 사진들은 다양한 종류의 박물관과 기념관 그리고 종교관련 시설물들을 보여준다. 전쟁기념관, 기독교순교자기념관, 천주교순교자기념관, 성철스님기념관, 대종교신전, 무속인의 신당, 한약방, 성물(聖物)제작소 등 그가 이러한 공간들을 사진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단순한 시각적 재현을 넘어서, 그 공간들의 기능과 기원에 대해서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서다. 그의 사진에서 우리는 단군초상에서부터 성철 스님과 김대건 신부의 초상과 성물, 항일투쟁 관련 민중들의 역사화와 재현물, 그리고 무속관련 성상과 무구들을 볼 수 있으며,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의 초상과 유교적 의식행위를 재현한 미니어처 등도 확인할 수 있다. 박물관의 성격을 갖는 이러한 기념비적 공간(이하 박물관으로 총칭)들은 박물관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기 전에 만들어진 것도 있지만, 대개 1984년 '박물관법'과 그것을 대체한 1991년 '박물관및미술관진흥법'의 제정과 더불어 생겨난 것들이다. 특히 박물관을 육성, 발전시키기 위해 각종 등록요건 및 설립규제를 대폭 완화한 '박물관및미술관진흥법'이 시행됨에 따라 책박물관, 짚풀박물관, 쇳대박물관, 사진박물관 등 다양한 성격의 박물관들이 최근에 우후죽순 세워지고 있다. 그런데 임민수는 이렇게 많은 종류의 박물관들 중에서 왜 하필 앞서 소개한 내용들의 박물관들을 선별촬영하는 것일까? 그리고 그것들 사이에는 어떤 연관성이 있는 것일까?
그가 이러한 박물관들을 선택한 기준은 우리들에게 '전통'이라고 표상되고 몸각된 도상들과 관련해서다. 그는 이런 전통적 도상들이 어떤 특정한 시기에 창출되었다고 보고 있으며,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우리들을 일정한 틀- 민족이라는 울타리에 가두는 기제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러한 효과들을 만들어내는 공간으로서의 박물관을, 그리고 그것을 가동시키는 국가주체의 이데올로기적 장치로서의 박물관에 주목하고자 한 것이다. 결국 그가 보여주고자 한 것은 '박물관의 재현'이 아니라 '박물관에 재현된 전통이라는 표상을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박물관이 문제인가? 여기서 우리나라 박물관의 기원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은데, 오늘날의 박물관과 운영주체만 다를 뿐이지 그 기능과 시각적 재현의 효과는 동일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서구에서 박물관은 근대적 재현의 장으로서, 국민국가 형성과정에서 국민을 하나의 상상적 공동체로 묶는 역사담론의 전시공간으로 탄생되었다. 이러한 박물관의 기능에 주목한 일제는 일찍부터 자국에 박물관을 짓기 시작했으며, 식민지조선에서도 자신들의 정책적 필요에 따라 다양한 종류의 박물관을 설립하였고 그것이 우리나라 박물관의 기원이 되었다.
박물관의 기능은 무엇보다도 '교육'에 있다. 일제강점 당시 개성박물관장을 지냈던 고유섭은 '박물관'을 정의하면서 "대범한 뜻으로 말한다면, 자연과 인문 양방면에 걸친 실물 교육기관의 하나라 하겠다. 말하자면 일종의 교화기관"이라고 피력했다. 물론 당시의 박물관이 순수하게 자연과학적인 입장에서 국민들을 교화 내지 교육시키기 위해 세워진 것은 아니었다. 식민통치의 수단으로서 박물관이 건립되었으며, 식민담론을 교육시키는 장으로서 활용되었던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발행된 잡지 『삼천리』는 당시 '조선 내 박물관의 총수'에 대한 통계자료로서 이왕가미술관, 은사기념과학관, 조선총독부박물관, 개성부립박물관, 평양부립박물관, 조선총독부박물관경주분관, 부여고적보존회진열관, 황해도향토관 등 8곳을 들고 있다. 하지만 이 외에도 조선총독부시정기념관, 조선총독부상품진열관, 조선총독부미술관, 총독부박물관부여분관, 조선체신박물관, 조선민족박물관, 공주읍박물관, 북선과학박물관 등 다양한 종류의 박물관들이 세워졌다. ● 이러한 박물관들의 건립은 학교를 중심으로 한 식민지 교육의 한계를 극복하고 사회전체를 대상으로 한 사회교육적 차원에서 비롯되었다. 특히 박물관은 한 민족의 역사를 생산하고 그것을 '공식' 역사로 제도화하는 기능을 담당한다. 일제에 의해 새롭게 구성된 박물관 속 식민지조선의 역사는 일선동원론과 내선일체의 논리를 뒷받침할 수 있는 고대의 유물 중심으로 쓰였으며, 그 과정에서 당시 조선의 현재적 의미는 잃고 만다. 이러한 역사서술은 박물관을 관람하는 조선인들에게 이중적 효과로 나타나는데, 박물관에 전시된 식민지 조선의 역사를 읽어가면서 조선민족으로서의 정체성(전근대적 민족, 미분화되고 정체된 민족, 미개한 민족 등의 정체성)을 부여받는 동시에 일본민족에 비해 열등한 이등민족으로서의 지위를 확인하게 된다. 일제는 박물관에서의 역사서술을 통해 그들이 필요로 하는 식민지조선의 '민족'과 '전통'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해방이후 박물관의 이러한 정치적 기능에 주목하면서 국가정책에 적극적으로 반영하기 시작한 것은 박정희정권에 이르러서의 일이다. 정권획득의 정통성을 결여한 박정희정권은 경제개발이라는 근대화프로젝트에 매진하면서 여기에 국민들을 적극적으로 동참시키고 그들 모두를 조국에 헌신하는 산업역군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이를 위해 재호출한 것이 '민족'과 '전통'이었다. 이러한 호출은 한편으로는 역사학을 동원하여 식민담론에 대항하는 민족담론을 만들어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전통문화정책을 전개하면서 민족주의프로젝트를 가동시켰다. 특히 문화정책적인 차원에서 문화재보호법의 제정(1962년)과 더불어 문화재의 관리와 복원, 그리고 발굴작업 등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으며, 박물관과 같은 문화시설들이 새롭게 확충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특징적인 것은 그 대상들이 호국선현과 국방유적들에 집중되었으며, 민족문화의 우수성을 보여줄 수 있는 것들로 한정·홍보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고도의 상징조작을 위한 것으로, 민족의식 고취와 민족적 우월성의 발현을 통해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이 곧 국민 자신들의 운명임을 자각시키기 위한 장치였으며, 이 과정에서 조국근대화를 위한 새로운 국민 새로운 민족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 이때 '민족'과 '전통'으로 상징·표상되는 대상들을 박제하여 영구보존할 공간이 요구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1972년)과 지방분관 그리고 국립민속박물관(1975년) 등의 박물관이 새로 건립되었고, 순국선열 및 호국영웅들을 신성화하고 찬양하기위한 전당으로서 현충사(1966~75년)와 세종대왕기념관(1973년)을 비롯한 수많은 기념관이 건립·중건되었다. 오죽헌과 불국사 등의 문화유적, 무령왕릉(1970년)과 천마총(1973년)등의 고대 유적·유물 등도 이때 함께 복원·발굴된 것들이다. 국민들은 이 곳을 순례하면서 민족적 자긍심과 민족문화의 우수성을 확인하고 민족적 유대를 강화하게 된다. 이러한 역사와 전통의 정치적 이용은 12·12와 5·17을 통하여 권력을 획득한 5공화국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특히 전두환정권은 헌법 제8조에 "국가는 전통문화의 계승·발전과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야한다"라고 규정하면서까지 '전통'과 '민족'을 강조하였고, 정권찬탈의 정당성 확보와 군사정권의 폭력성을 희석시키기 위한 수많은 문화유화정책들을 전개하였다. '국풍 81', '대한민국국악제' 등은 대표적인 전통문화정책 중의 하나였다.
이쯤되면 임민수가 촬영한 박물관들이 어떤 맥락에서 출현했는지, 그곳에 전시된 다양한 초상과 역사화들의 재현효과가 무엇인지 눈치 챌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통해 창출된 '전통'의 전당들을 사진으로 다시 재현하는 것은 박물관의 재현욕망과 그것의 허구성을 드러내 보이고 싶어서다. 물론 박물관에서 전시되는 전통의 재현물이 허구적 산물이라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엄연히 하나의 실체로서 우리 곁에서 우리 안에서 작동하고 있으며, 어떤 의미에선 여전히 유효하고 앞으로도 유효할 것이다. 따라서 그것의 진위여부를 묻는 것보다 전통의 재현물들이 작동되는 방식을 폭로하는 일이 더 효과적인 전략처럼 보인다. 표상이 만들어진 기원을 추적해서 그것이 전통과 민족의 담론체계와 어떻게 상호 간섭해왔고,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 표상의 효과는 무엇인지를 폭로하는 일이 중요해진다. 그래서 임민수는 '전통'과 '민족'이라는 것을 고대로부터 영속해온 불변의 가치와 문화로 절대화하고, 재현주체에 의해 선택된 역사적 사건을 공식역사로 제도화하고 훈육시키는 박물관의 허구성을 폭로하려는 것이다. 나아가 그는 '국민교육헌장'(1968년 제정)을 무턱대고 암기해야했던 과거의 기억에 비추어 '전통'을 주입시켜온 박물관의 지난 역사에 대해 반성하고, 그것의 태생이 식민권력과 독재권력의 지배를 정당화하고 합리화한 도구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또한 임민수는 박물관에 관한 메타비평과 더불어, 전통의 허구성을 깨뜨릴 실천에 무게를 두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그가 주목하는 것이 박물관의 재현체계이다. 박물관의 재배치를 통해 전통의 허구성을 내파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박물관은 '전통'의 신성함과 영원성, 신비감을 강화위해 수많은 장치들과 배치의 효과를 이용하고 있는데, 그는 이것들을 의도적으로 약화시키거나 전복시키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그것은 극단적인 프레임을 통해 전통의 도상들을 거칠게 드러내거나, 전시설명문과 금줄 그리고 도상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키치적 소품이나 가격표 등을 시각적으로 강조하는 방식을 통해서 실현된다. 도상 자체만을 촬영하여 그 대상을 투명하게 바라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재현하는데 동원된 장치와 소도구들을 함께 보여줌으로써 박물관의 재현주체와 재현체계를 '의식'하게 하는 것이다. 전통의 신성함을 만들어내는 박물관의 효과가 탈맥락화에 의존하여 나타난다면, 전통의 허구성을 내파하는 임민수의 사진작업은 탈박물관화를 통해 달성된다.
이러한 박물관의 재배치와 함께 중요한 실천은 역사서술의 문제이다. 지금까지 국사책이나 박물관에서의 역사서술이 '위로부터의 역사'(호국영웅이나 선현 중심의 역사)를 다루어왔다면, 그동안 공식기록으로부터 소외되고 배제되어왔던 민중들의 삶을 복원하는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서술하는 방법론이 요구된다. 사진작업과 관련해서 '영상구술사'를 하나의 방법론으로 모색해 볼 수 있는데, '역사 담론에서 소외된 계층들을 대상으로 한 사진기록이며, 영상으로 기술하는 구술사 작업'을 지칭한다. 작은 주체들의 과거 경험들을 보존하고, 자료화된 기억들을 역사화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시간뿐만 아니라 과거 시간에 대한 재현이 중요하다. 따라서 그들의 현재모습에 대한 사진적 기록뿐만 아니라 과거의 기억을 반추할 수 있는 기념사진들을 함께 아카이브화하는 '사진기록'과 함께 과거의 기억과 경험을 말로서 서술하는 '구술사연구'를 공동으로 하는 영상구술사가 하나의 대안이 되지 않을까 한다. 임민수의 경우에도 박물관에 대한 현재의 사진기록뿐만 아니라 박물관에서 자체생산한 과거의 사진기록까지도 함께 모아 보여준다면, 재현주체(역사서술 주체로서의 국가권력과 사진가 개인)에 따라 그리고 배치방식에 따라 전통이라는 동일대상이 어떻게 다른 의미와 효과를 내게 되는지 비교해서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 최근 그의 사진행보를 보면 영상구술사를 통한 다큐먼트사진의 연대를 호명하고 있는 것 같다. 중앙시장을 중심으로 대전시가의 역사공간들을 다층적으로 기록하려는 집단창작을 통해 그 가능성을 실험해 보고 있는 것이다. 해체된 전통의 자리를 어떻게 메울지 다음 작업이 자못 궁금해진다. ■ 이경민
Vol.20060104b | 임민수展 / photograph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