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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5_1207_수요일_06:00pm
스페이스 빔 인천 남동구 구월동 1367-14번지 3층 Tel. 032_422_8630 www.spacebeam.net
감각의 언어로 육화된 풍경 ● 예술이 삶을 반영한다고 할 때, 작가가 현실에 대한 모든 답과 결론을 내려서 작품에 담아내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현실은 늘 유동적이며, 덩달아 우리의 감각과 감정도 어느 것 하나 고정되지 않은 채 꿈틀대고 분열되기 때문이다. 특히 현대의 예술가는 밖으로 향한 더듬이가 잘 발달되어 있어서 밖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 상황에 걸맞은 작품을 생산하기도 한다. 타이밍의 적절성이 작품에 대한 평가를 좌우하기도 하며, 현대의 빠른 시간 흐름으로 인하여 작품의 독창성은 이제 1년 이상을 유지하지 못하는 듯 보인다. ●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이탈은 지난하게도 여러 해 동안 살(날것)덩어리 연작을 보여 왔다. 실제 날(生)것의 오브제를 설치한 것이 아닌 그와 비슷하게, 그러나 실재와 너무도 닮아있는 것들이다. 그것들은 십자가의 처형을 의미하기라도 하듯 공중에 매달려 있다. 프란시스 베이컨은 푸줏간에 걸린 고기를 보며 "거기에 걸려있는 게 왜 내가 아닌가?"하며 당혹해 했다고 한다. 사실 인간이 동물보다 우위에 있다고 하는 논리만큼 허구적인 게 어디 있는가. 인간의 한계를 초극하기 위해 '창조적이며 동시적인 역행(들뢰즈)'으로서 베이컨은 짐승으로 돌아가려 한다. 위대한 동물적 감성은 때론 이성보다 더 강력하다.
이탈은 사회의 거대한 흐름을 촉각적으로 감지하고 그것을 감각으로서 제시한다.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들, 권력에 좌지우지되는 편린들, 그와 별반 다를 것 없는 미술계의 상황 등 우리의 길들여지고 이미지화 된 모습들을 뒤집어보고, 비꼬고, 역설하고... 허위의식이나 껍데기를 버리고 그대로의 모습 또는 속살을 드러내 보이면서 삶의 무섭도록 진실 된 모습을 이야기한다. 비틀어서 실재를 더 잘 그려내는 것, 그 '날것'들은 모든 작위적이고 인공적인 외투를 벗은 채 벌거벗은 '육화된 풍경'이 된다. ● 때로 사람들은 그의 작품 앞에서 폭력이라는 단어를 연상하기도 한다. 작가의 삶을 조금만 들여다보아도 사회적 냉소에서 기인하는 처절함의 온기를 눈치 챌 수 있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일종의 충격을 받아들이기 힘겨워 할 수 있다. 물론 폭력이라는 단어의 의미부터 재 상정해야 함을 전제로 하지만, 어쨌건 폭력은 충격을 수반한다. 그러한 충격의 기법은 작가가 바라본 냉소적 사회의 일면에 대해서 손발 묶인 사람처럼 단지 묵상함으로서만 대응할 수밖에 없는, 작가의 극도로 소심함을 포장한, 일종의 감정의 뻥튀기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마술사의 수건처럼 덮었다 걷어내면 놀라운 세상이 펼쳐지는 상상은 어린아이에게나 통용될 일일 테니까. 그래서 거기엔 울림이 있고, 아우라가 있고, 시적인 감정마저 느낄 수 있는 정서적 폭력이 있는 것 아닌가.
창작은 어떤 대상이나 상황으로부터 포착된 자신의 감각을 재현하는 행위이고 그 행위의 생산물을 작품이라 본다면, 작품은 깊숙한 주관성에서 비롯되면서 동시에 언제나 그 작품이 있게 한 본질적인 무엇을 지시하게 되어있다. ● 그러나 우리의 눈에 시각적으로 전이된 결과물은 그 배경으로 간주되는 본질을 부재의 형태로 은닉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들을 논리적으로 규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사실상 작품이라는 것이 작가 자신조차 정제되지 않은 내면세계에 대한 끝없는 혼돈과 충돌의 과정 속에서 잉태되는 무엇이라고 할 때, 작가 자신도 명확히 설명해 내지 못하는 부분들의 진실을 찾아 나간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그래서 필자는 작가의 조형적인 연결성과 의미적인 연관성을 하나씩 퍼즐 맞추듯 유추하고 조합하는 과정을 통해 또 다른 해석의 열림, 의미 생성의 가능성을 타진해볼 뿐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태워서 짓이겨지거나 형체가 불분명해진 인형이라든지 누군가의 가죽을 떼어 펼쳐놓은 것 같은, 엉클어진 체모마저 생생한 피부, 아니 '껍질'들을 제시한다. 그 껍질들은 이탈이 굳이 그렇게 표현해내려 애쓰지 않아도 손을 통해, 몸을 통해 채화돼 쏟아내어 진다. "난 왜 만들기만 하면 이렇게 되지..." 라고 스치며 하던 말이 기억난다. 필자는 얼마 전 어떤 연유로 휴점 중인 백화점 안을 거닐 기회가 있었다. 항상 붐비고 정신 없던 그 곳. 뭔가 생각할 여지를 주지 않는, 마냥 욕망에 찬 물건들을 내 호주머니 속에 넣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게 하던 그 장소. 그 곳에 화려한 구두들이 빼곡이 줄지어 쇼를 하고 있었다. 순간 소름 돋는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그 아름답게 뽐내고 있던 것들이 마치 육신은 사라지고 가죽만 남은 발의 유령들로 변하여 축제를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욕망은 모두 사라지고 남은 한 조각 껍질마저도 꿈틀거리게 하는 힘이 있나보다. ● 이탈의 껍질들은 그 때의 그 상황을 다시금 기억하게 한다. 너무도 놀라웠다. 다른 방식으로는 도저히 만날 수 없는, 오직 예술만이 간직하고 예술을 통해서만 인지되는 작가의 영혼과 대면하듯,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 불가능한 고유 영역을 소통하는 힘, 그것이 작품 안에 있었고, 우리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야스퍼스는 "오직 스스로의 고립 속에서 자기와 합일할 수 있는 자만이 다른 고립된 자와 만날 수 있다"고 했다. 스스로 밑바닥 저 은밀한 곳에서 자신의 한계를 인지하고 그것을 넘어서기 위해 자신 내부의 타자를 해체하고 분열시켜 외부와의 상호연계망 속에 있는 존재들을 인식함으로서만 가능한 조우이다.
작품 안에서 감각의 촉수로 인간을 읽고, 세상을 읽고 느끼며, 바라보게 된다는 것. 참 흥분되는 일이다. 싱글채널 「요단강 가는 길」은 광대라는 허상을 뒤집어쓰고 구름 위를 걷듯이 황량한 묘지 위를 반복하여 걷는 상황의 연출이다. 마치 꿈을 꾸고 돌아오듯 광대는 저 멀리 사라져갔다가 이내 다시 돌아온다. 슬로우 비디오 화면과 처연한 오르골 멜로디의 조합은 우리로 하여금 현실과 꿈의 중간지대를 부유하게 한다. 작품은 단순하다. 그래서 한 눈에 읽혀진다. 한 눈에 들어온다는 것은 오히려 켜켜이 중첩되어 있는 작품 속의 의미가 전체로 읽힌다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낯익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주 낯선 그 무엇을 안고 있다. 그것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찾아 나서게 된다. 그 멈출 수 없는 의문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그의 작품이 의식과 무의식의 외줄타기를 전제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우리는 낯설어 보이지만 결코 낯설 수 없는 우리 안 깊은 곳 무의식과 마주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의식의 저 아래에 머물러 잠들어있는 심연을 드러낸다는 것, 그것이 곧 감각을 언어로 숨쉬게 하는 것이다. 감각의 언어, 그것은 구체적이고 생생한 인지의 힘이며 호흡인 것이다. 이탈은 그 만의 언어로서 우리에게 호소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이 얼마나 처절한 곳인지를... ■ 이소영
Vol.20051206a | 이탈 영상ㆍ설치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