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休휴

2005 경기문화재단 기획展   2005_1125 ▶ 2006_0131

쉼,休휴展_경기문화재단_2005

초대일시_2005_1125_금요일_06:00pm

참여작가 권종환_김태중_방혜영_이부록_이중근_최혜광

주최_경기문화재단

부대행사 2005_1126_토요일_현대미술과 함께하는 가족주말나들이

경기문화재단 1,2층 로비 경기 수원시 팔달구 인계동 1116-1번지 Tel. 031_231_7200

'일상과 예술'에서 '일상의 예술'로 ● "결국 예술은 그 모양새로 보아, 어떤 경험을, 즉 유기체와 세계가 일상적으로 만나는 그러한 느슨하고도 비체계적인 경험을 하나의 경험으로 만드는 에너지들의 교류를 통일시키는 것으로 자리하고 있다."(존 듀이John Dewey) ● 문명인에게 도시가 자연적으로 필요했듯이, 도시는 예술을 필요로 하는가? 서로에게 무관심하게 하고, 자신의 독립성을 추구하게 하는 현대 도시 공간에 현대인은 타인과의 정신적 거리를 가시화하는 인공의 예술을 시선의 사이사이에 채우고 있다. 자신의 인간 존재를 확인하기 위함이고, 자신과 타인의 생활공간 고유의 질서와 구성의 원리를 예술가들의 감각으로 재확인하고 싶은 것도 한 이유가 아닌가 싶다. 생활이 곧 예술이 될 수가 없기에, 도시에 사는 우리는 우리 자신의 활동영역의 확대와 정신적 자유의 역사적 상관성 때문에 특정한 공간을 정복, 개인적 문화의 퇴화와 어찌할 수 없는 불평등한 계약을 예술의 힘으로 잊고자한다. 그래서 상징적이고 자의적이지만 그 어느 것보다 추상적인 '예술'의 질서가 많은 무명의 동의를 쉬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리고 진정 쉼터가 되고 휴식이 되어주는 일상의 예술을 원하고 기다릴수록 우리는 다소 골치 아픈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이 문명에게, 이 도시에게, 우리 자신에게 말이다. 왜 이 문명은 예술을 필요로 하는가? 왜 도시는 '순수(純粹)'의 계보로 영광을 누려온 예술을 그토록 고귀한 시상대인 미술관에서 시민 곁으로 내려오게 하는가? 일상 공간에서 만나는 예술에서 우리는 어떤 울림을 느껴야하는가? ● 이번 기획전의 특색 아닌 특색은 미술관 내 전시장이 아닌 관공서 내부 곳곳에 작품이 전시되었다는 점이다. 특색이 아니라함은 이러한 시도가 그다지 생소한 예술 기획이 아니라는 뜻이다. 특색인 이유는 공공장소에서 창작자와 기획자와 감상자의 새로운 공간적 상상력을 선보이려 한다는 점이 전시 자체의 전략으로 내세워졌다는 뜻이다. 따라서 왜 전통적인 미술작품 전시공간을 벗어났는지, 그리고 그런 목적이 어떤 성과를 거두었는지를 판단하는 일은 어찌 보면 설시된 작품 하나하나에 대한 미적 평가만큼이나 중요한 작업일지 모른다. 물론 이는 전시 기간 동안 매일 작품을 대하는 건물의 일상적 사용자들과 비일상적 사용자들이 공공건물의 가치와 예술의 가치를 각각 상이하게 느끼도록 하는 의도와 과정에 대한 고찰로 드러나는 문제일 것이다.

김태중_쉬는사이_유리에 드로잉_2005
권종환_뿌리깊게 인식된 기억_뼈대에 솜_2005
방혜영_꿈2_혼합재료_2005

역사가 증명하고 있듯이, 대중들에게 미술관이라는 곳이 공개되면서 미술관은 계몽이라는 구호아래 지배자들의 정복욕과 취미를 대변하는 컬렉션 중심의 관조적 전시로 시민들 곁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곳의 형식적 장치들은 이미 르네상스에 만들어졌다. '갤러리'와 '캐비닛'이 그것이다. '갤러리'는 긴 홀 양쪽에 밝은 조명이 달려있어 회화와 조각을 비추었던 공간이었고, '캐비닛'은 말 그대로 작은 사각형 형태로 박제품이나 희귀 수집품을 담아 두었던 곳이었으니, 오늘날 미술관의 전형적인 시각적 구성의 시작이 어디서부터인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공간감 덕택에 제 아무리 정신없는 속세에 있다고 하더라도 미술관에 일단 들어가면, 그 소란스러움의 시간이 멈춘 전혀 새로운 공간을 만나게 된다. 마치 정신적인 풍요로움이라도 주는 듯, 국가는 별다른 희생 없이 시민들에게 우아한 지적 만족감을 안겨주고 시민으로서의 책무를 스스로 다지게 하는 이른바 이상적인 문명화 교육장으로서 미술관을 활용했다. ● 그러다 사회의 다양한 권력과 저항의 역사가 만들어내는 담론에 대한 인문학적 포럼의 장으로 미술관이 변모한다. 그 시기는 그리 오래 전이 아니다. 이는 미술관 자체의 변모를 정치화하고, 미술의 역사를 제의적 제도 혹은 사회적 실천의 맥락에서 파악하려는 비판적인 노력과 더불어 행해진 결과다. 다시 말해, 아도르노의 말처럼 예술작품은 '창문 없는 단자'처럼 스스로의 단자성 내에 세계의 본질을 드러내면서도 다른 담론에 대해서 비판적 심급으로 작동할 수 있기에 그것 둘레에 지식의 배치를 조정하는 미술관은 문화?사회?인간성의 구조적 성분들의 복합체라 할 수 있다. ● 그런데 현대 '사회'가 명사가 아닌 동사이듯, 현대 예술작품이 닫힘이 아니라 열림의 자리를 모색하고 있듯이, 어떤 형이상학적인 본질에 의한 규정보다는 삶 그 자체를 형성시키는 관계들이 끊임없이 그 경계를 유동하며 스스로를 형성한다는 사실이 미술관을 벗어난 오늘날의 공공 미술의 태동을 추동해오고 있다. 그로 인해 도시의 공공 공간에서의 미술은 작가에 의해 조정되는 수동적 개체가 아닌 작가와 나란히 공존하는 능동적 주체를 요구하고 있다. 감상자나 관객에게 전지전능한 권력을 행사하려는 무모한 시도는 공공 공간이라는 특수성과 그것을 수용하는 의식의 구성작업에 의해서 또 다른 생명력을 획득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의 심미적 가치는 하나의 계속적 과정에서 발견된다. 이 과정과 진행은 한편으로는 작품의 구조 자체의 내재적 발전을 통해 규정되기도 하지만, 오히려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적인 공동생활 구조의 움직임과 변위를 통해서 규정된다고 할 수 있다. ● 최근 들어 '일상의 예술'이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된다. 우체국에서, 지하철에서, 동사무소에서 예술가들은 자신의 작품에, 자신의 삶의 한 질서인 공공 공간에 제2의 삶을 부여하려고 하고 있다. 그런데 사실 '일상'과 '예술'이라는 단어는 지금껏 양극단에서 서로를 동경하는 듯 지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술가라는 직업을 달고 사는 통에 별다른 수입도 없이 힘겹게 일상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은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그런가하면, 예술작품 감상을 통해 전혀 '딴' 세상의 천재의 영혼을 느끼거나 어느 것으로도 측정될 수 없는 그 정신의 무게에 기꺼이 돈을 지불하며 우아한 예술을 찾아다니는 사람도 있다. 상황이 이러하니 오늘날 예술은 다양한 인간 군상의 일상 삶의 질서에서 그 삶의 의미를 규정짓거나 힘을 부여할 수 있는 노동의 역할을 충분히 대신하지 못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는 사회의 정책이나 제도의 문제라는 식의 '합리적인 척'하는 일시적 수사(修辭)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다. 어쩌면 자신의 삶을 밖으로 표출해 낼 수 있는 능력이 곧 노동하는 일상적 삶에서와 동일한 권리와 의무를 가질 때 그 문제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런데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더 나은 솜씨와 숙련도를 갖추어야 함과 동시에 자신의 작품이 어떤 효과를 낼지 고민도 해야 한다. 그래서 예술가에게는 일상과 예술의 문제가 다소 복잡한 윤리적인 테제이다.

최혜광_선인장정원_대리석, 백규사_2005
이부록_동상이몽_렌티큘러, 픽토시트지_2005
이중근_꽃기둥_사진, 컴퓨터그래픽, 디지털프린트_2005

그렇다면 대중들은 어떠한가? 미술관 안에 전시된 작품에는 가장 완결된 이상적인 삶의 형식을 대하듯 경외의 시선을 보내다가도, 일상적인 노동의 공간에서 만나는 예술작품에 대해서는 자신의 삶의 감정과의 교호(交互) 과정을 그다지 시도하지 않는다(못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여전히 일상 공간의 시각적 에피소드에 대한 관심은 전체적인 인식구조의 중심에서 매번 변방이지 않은지 궁금하다. 다시 말해 새롭게 자리를 점유하려드는 예술작품들에 기존의 공간구조가 마치 텃세를 부리듯, 감각의 위계에서 시감각적 권위는 다른 미디어 공간에서와 사뭇 다르게 상대적으로 위축되어 버린다. 공공 공간의 예술작품 역시 예술이라는 구조의 중심공간인 미술관 전시장 내에서 누렸던 대접과는 한참 거리가 먼 운명을 갖고 창조되고 사라진다. 그것의 감상자는 그저 유쾌한 낯섦과 충격의 감각적인 형상화를 경험함으로써 행하는 형식적 가치의 평가에 익숙해져가고 있을 뿐이다. 관공서의 화장실에 (예술가가 놓아둔) 선인장, 계단에 (예술가가 깔아둔) 푸른 잔디를 보며 공간을 일상적인 노동의 공간으로 접하는 직원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곳을 방문한 시민들은 또 어떠한가? 이 질문에 대한 답과 그 차이를 심리적이거나 디자인적인 요소에서 찾는 것은 단순한 미학적 유희에 머무를 위험이 있다. 이제 일상의 노동 공간에서의 예술작품은 그 창작자와 감상자 모두에서 성스러운 루소주의적 동경을 버리게 할 때이다. 소통가치로서의 공공 예술작품의 존재는 공간과의 조율에서 생겨날지 모르지만 그것의 생명력은 특정한 역사적 발전 과정에서 가능하다는 사실에 주목할 때이다. 즉 작품 자체의 발전적 가치와 나중에 이루어진 공간적 구체화들 간의 관계에 대한 관찰에서 더 나아가 예술가와 감상자의 목소리가 공적인 노동의 공간에서 서로 만나 어떻게 이른바 미술관 미술의 종교적 독단주의 혹은 신비주의의 경건성에서 벗어나는 해방의 길을 걷는지 살피는 것이 일상 공간에서의 예술작품을 대하는 적극적 태도가 아닐까 싶다. ● 아울러 오히려 예술 자체가 일상 삶으로부터 기원한다는 건강한 윤리학을 전제함으로써 앞에서 던졌던 질문의 그러한 낯모를 차이의 원인을 좀 더 분명하게 밝힌다면, 즉 예술가의 재기발랄한 '디스플레이'보다는 특정한 노동의 공간에 스며 있는, 그래서 그 공간을 오가는 시민들의 삶을 지탱해주는 관념들에서 일상의 예술의 전향을 찾는 다면 공허한 시각적 양식화와 장식화를 피할 수 있을 것이다. ■ 임산

Vol.20051201c | 쉼,休휴-2005 경기문화재단 기획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