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_2005_1201_목요일_07:00pm
젊은 사진가와의 만남_2005_1203_토요일_02:00pm
기획_김남진
후원_한국문화예술진흥원
금호미술관 서울 종로구 사간동 78 Tel. 02_720_5114 www.kumhomuseum.com
'도시소년' 그 속에 머금은 어떤 허전함 ● 바야흐로 시대는 그들이 그저 소년으로 성장해 나가는 것 조차 버겁게 만들고 있는 듯 하다. 급속한 테크놀러지의 발달은 그들에게 이미 영육의 수준을 뛰어넘는 가치체계를 요구하는 듯 하고 그에 따라 변모하는 온갖 사회현상들은 그들을 가끔 시험에 들게 하기도 한다. 도심속 거대 상업자본은 교묘함의 극치로 내닺고 있다. 그들은 막대한 자본의 힘을 이용해 서서히 소년들의 감성을 자극하고 나아가 정신적인 체계마저도 통제하려고 한다. 도시라는 울타리에 처해진 그들이 온당하게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자아의 형성이나 미래에 대한 실현의지보다는 도처에 깔려있는 트랩들을 별탈없이 넘어서는 것 일런지도 모를 일이다. 불과 몇 년전만 하더라도 내게 나아가 우리들에게 '소년'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거의 정형화되어 떠오르던 기억 또는 이미지들이 오늘에 와서는 그렇게 되기를 거부하고 있는 듯 하다. 몇장의 사진으로 그들을 보여준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발상이며 무모한 시도인지는 작업을 실행한 사진가로서 통감한다. 다만 동시대에 던져진 작가로서 이러한 시기에 우리가 주목해야 할 몇가지 단서들을 제시하고, 거대한 기계조직의 부품처럼 만들어지는 듯한 '도시型소년'의 단면들을 보여줌으로써 소년이 살고 있는 우리사회가 품어내는 근본적 모순들과 상업적 욕망을 잘 보이는 탁자위에 올려놓으려 한다. 설명할 수 없는 혹은 관여할 수 없는, 일이나 상황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만 충실한 기록뿐이다. ■ Area.Park
감춤으로써 드러내는 정직한 기록. ● 어느 날, 사진을 들고 찾아온 젊은이를 만났다. 수줍은 듯 내민 명함에는 사진가 Area Park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와 동행한 친구는 내가 '형님'이라 부르던 분의 아드님이었다. 이름은 찬. 찬은 그와 함께 젊은 날 사진공부를 했으며, 그 즈음 같은 방을 썼다고 했다. 찬은 지금은 더 이상 사진을 찍지 않는다고 말했다. 재능 때문이라고 짧게 말했지만, 찬이 여전히 사진을 찍고 있는 친구 앞에서 그런 말을 남의 일처럼 덤덤하게 말할 수 있기까지 걸린 시간을 나는 잠시 추측해본다. 얼마나 힘든 시간이었을까. 사진을 공부하고 찍던 젊은이가 그것을 포기했다고 말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하지만 찬의 목소리는 과장되지 않았고, 그 말을 할 때의 얼굴은 평안했다. 하지만 옆에 있던 그가 찬의 말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아마 그가 하고 싶은 말은 찬의 말이 틀린 말이라는 뜻으로 느껴졌다. 그때 나는 그의 친구에 대한 배려를 보았다. 친구의 소개로 곧 전시할 자신의 작품들을 들고 생전 처음 만나는 한 소설가를 찾아온 일에 대한 쑥스러움, 친구가 포기한 일을 자신은 계속 하고 있는 데 대한 겸연쩍음, 혹은 찬이도 사실은 여전히 사진을 찍고 있어요, 라는 말이 그의 얼굴에 어려 있었다. 그는 비교적 겸손하고 세심한 성격의 사람으로 느껴졌다. ● Area Park의 사진들도 그랬다. 너무나 조용하다. 동작들은 절제되어 있고, 사건은 감춰져 있다. 사진이 말하려는 것은 낮은 목소리였다. 감동을 강요하지 않았고, 주제를 잘 전달하기 위해 작가가 웅변하지 않았다. 그의 작품이 보는 이에게 요구하고 있는 주문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주의력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만약 당신이 자세히 보려고만 한다면 저도 보지 못했던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거예요",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실제 그랬다. 하지만, 한국사회처럼 요란한 일이 자주 일어나는 곳에서 그의 작품은 시선을 끌기에는 어딘가 부족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한국사회는 좋게 말해서 역동적이지만, 달리 표현해서 광적으로 에너지가 넘치는 사회다. 모두 들떠 있고, 뜨거운 난로 같은 기운 속에서, 흥분한 얼굴로 살고 있다. 타인에게는 적대적이고, 공공질서보다 자신의 감정에 더 충실하며, 친절의 가치는 자주 외면 당한다. 사건사고도 이 지구촌의 어떤 사회보다 자주 일어나는 곳이다. 다리도 무너져 내리고, 어떤 때에는 멀쩡한 백화점 건물이 주저앉기도 했다. 한국사회는 그런 치욕스러운 경험과 기억에서 아직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오래 기억하기에는 지금 닥친 일들을 해결하고 제대로 해석하기에도 벅차다. 거리는 상업광고물로 덮여 있고, 차들이 질주하는 열기는 지구온난화와 관계없이 뜨겁다. 그보다 뜨거운 것은 충분히 분출하지 못한 듯이 보이는 사람들의 불만 어린 얼굴들이다. 어딘가를 향해 질주하는 데 그 방향과 도착지에 대한 확신이 불투명한 곳이 한국사회다. 그냥 달려야 하기 때문에 달릴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다. 누군가 질주의 태엽을 감아놓았는데, 정작 태엽만 감아놓고 그 누군가는 도망을 친 것 같은 사회가 바로 한국사회다. 모두 여기 태어났기 때문에 어떤 소용돌이에 휘말려 든 것 같은 사회, 그곳이 바로 그가 사진가로서 지속적으로 탐구하고 있는 한국사회다. ● Area Park은 다큐멘터리 사진가다. 말하자면 증언자다. 그는 자신이 증언자라는 것을 잠시도 잊은 적이 없다. 하지만, 그가 증언하는 방식은 다른 증언자와 사뭇 다르다. 그는 한국사회의 어떤 부분적인 특성을 일부러 외면하거나 묵살한 것 같기도 하다. 거기에 그의 작가적 성격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Area Park은 잘 선별된 주제에 의해 역동적인 한국사회를 증언하되, 매우 비역동적인 방식과 기법으로 한국사회를 묘사하고 증언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그는 독창적이라기보다 인내심이 더 돋보이는 작가다. 한국사회처럼 역동적인 사회에서 역동적인 주제를 쇼킹한 방식으로 표현하고 싶은 욕구와 거리를 두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는 우리 사회의 특성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 그 점에서 그는 사진예술의 특성을 알고 있는 작가라고 생각된다. 그는 존 버거(John Berger)가 말했듯이 이미지(사진)가 문학보다 더 정확하고 풍부하다는 것을 잠시도 잊은 적이 없다. 그러나 그는 흥분하지 않는다. 자신의 작업에서 그는 자신이 미처 보지 못했던 것을 발견하고 배우고, 그 발견을 통해 자신의 인식을 조용히 확대하고 있는 듯하다. 그 점에서 그는 자신의 자연나이보다 더 오래 남을지도 모를 자신의 작품의 미래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그가 흥분하지 않고, 빨리 주목받지 않으려고 하는 인내심의 바탕에는 그런 확신이 깔려 있는지도 모른다. 강한 충격을 통해 주의력을 환기하는 일도 사진의 일이지만, 순간을 영원으로 고착시켜 재해석의 공간으로 남겨두는 지루한 작업도 증언자의 임무라는 것을 그는 자신의 작품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Area Park의 이번 작업은 '도시소년'이다. 21세기 초반, 한국사회를 살고 있는 청소년들이 바로 이번 작업의 주제다. 한국의 청소년들, 이들은 누구일까. Area Park은 그들이 '그저 한 소년으로 성장해 나가는 것조차 버거워 보인다'고 말하고 있다. 그들의 가치관과 욕망과 세상의 진행은 그 내용이나 속도에서 정비례하는 행복한 관계로 흐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왜 이런 주제를 택했을까. 아마 작가의 청소년기 또한 지금의 청소년들처럼 힘겨웠던 것은 아닐까. 결국 오늘의 청소년들을 카메라에 담으면서 그는 자신이 보냈던 청소년기를 위로하려는 무의식이 작동하지는 않았을까. 두 소년이 국립묘지 앞 갈림길에 서 있다. 소년들의 가슴에는 조의를 뜻하는 리본이 달려 있다. 조국을 위해 죽었다고 죽은 자들의 의지와 관계없이 그 죽음의 의미가 단정되었고, 그랬기 때문에 국가의 이름으로 모셔진 영혼들의 집에 이 청소년들은 사실 관심 없다. 더 이상 오늘의 청소년들에게 낡은 국가주의가 설득력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소년들은 여전히 같은 셔츠와 같은 색깔의 바지를 입고 있으며 같은 형태의 모자를 쓰고 있다. 누가 이 소년들을 엄숙하게 국가가 조성한 날, 이곳 신성한 길모퉁이에 세웠을까. 여전히 국가주의가 팽배해 있는 학교제도가 이 소년들을 이곳에 세웠다. 소년들이 서 있는 포즈는 이 무료하고 짜증나는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이때 소년들의 자세가 바로 소년들의 내면이다. 참배객들 누구도 이 소년들에게 무관심하다. 강요하는 국가는 늘 불안하다. 그 불안이 소년들에게 제복을 입히고 국가적 기념일에 안내자 역할을 요구하게 만든다. 엄숙한 자세로 무릎을 꿇고 참배를 하는 초로의 신사와 도열된 묘비들과 함께 소년들의 강요된 길안내 사진은 비로소 완성된다. Area Park의 작품은 자주 대비를 통해 그 주제를 드러내곤 한다. 소년들은 그래서 제도권 교육의 시간표가 끝나는 즉시, '자신의 옷'으로 갈아입고 거리로 나선다. 제복을 벗은 소년들이 선택한 개인의 옷은 그 고유의 계층을 기호처럼 드러낸다. 어떤 옷을 입었는가는 개성의 표출이라기보다는 어떤 계층인가를 드러내기 십상이다. 자본주의의 극복해야 할 문제점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한국사회에서 학교를 마친 청소년들이 자본의 질서에서 자유롭기란 참으로 힘들다. 인라인 스케이트 강습을 받는 아이들의 빨간 모자는 새로운 의미의 제복이다. 강습을 받지 않는 소년들과 차별되는 표지로서 빨간모자는 작동한다. Area Park의 작품세계는 노골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깊은 계층의식이 도사리고 있다. 빈부의 양극화 현상이 극심해지고, 그 간격이 메워질 일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한국사회에서 그의 그러한 사회의식과 시선은 정직성 이전의 기본적인 태도가 아닐 수 없다. 때로 청소년들은 자동차 전시장 앞에서 '몸'의 거짓 신화에 의해 새롭게 주목받게 된 여체들 사이에 서서 감춰진 성적 욕망을 수줍게 표현하기도 한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는 소년들의 확고한 관심은 새로 개발된 자동차에 있다기보다는 레이싱걸들에 있는 게 틀림없다. 때로 소년들은 오토바이로 자신의 주체 못할 젊은 힘을 발산하기도 한다. 헬멧도 쓰지 않고 친구의 오토바이에 함께 탄 소년들은 그들의 세계와 무심하게 진행되는 어른들의 일상 한복판을 질주한다. 질주하는 소년들을 어른들은 단지 소음 이상의 대상으로 주목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오토바이 주변의 청소년들에게는 폭주의 기쁨이 없다. 그 외로움은 결국 스포츠에 몰두하게 만든다. 한국사회는 문화의 힘보다 스포츠의 힘을 더 숭배하는 사회다. 태권도는 고독한 스포츠이지만 한국사회의 국기다. 태권도는 그것이 스포츠이면서 동양적 도의 가치가 구현된 무예이기도 해서 도복(道服)은 거리의 복장이 아닐 뿐 아니라 금기시된다. 그렇지만 때로 소년은 도복을 입고 거리 한복판에서 자신을 표현하기도 한다. 소년들은 본래 그 특성상 외로운 존재들이다. 잔디가 잘 깔린 경기장에 진출하기 위해 맨땅에서 연습을 하는 소년들은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싶은 욕구의 발현, 그 자체다. 거리는 상업광고로 점철되어 있고, 학교는 밀집된 아파트숲 속에 감금된 기형적인 모습으로 간신히 자리잡고 있다. 자연은 도시화된 자연이다. 소년들은 자연과 제대로 된 온전한 관계를 맺기가 어렵다. 자연은 신축공사장의 그림으로 존재하기 일쑤다. 그것은 상업광고가 거짓말인 것처럼 거짓말이다. 소년들은 그 거짓말의 뿌리를 명쾌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느낌으로는 알고 있다. 이것이 21세기 벽두, Area Park이 그린 한국사회의 청소년들의 모습이다. 소년들은 이와같은 환경에서 어떤 꿈을 꾸고 있을까. 그는 작업이 깊어질수록 소년들에 대한 이해가 더 오리무중에 빠진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 하지만 그는 서둘러 해석하려 들지 않는다. 다만 보여줄 뿐이다. 올바른 해석은 차라리 지금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의 환하고 밝지만 어둡고 음울한 사진들은 '오늘'을 미래의 시선으로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게 한다. 그게 바로 Area Park이 겨냥한 지점이고, 그의 인내심이고, 또한 작가적 야망이다. 달리 말하면 '지금 이곳'을 남의 눈으로 해석하지 않겠다는 책임의식, 말이다. Area Park은 틀림없이 다큐멘터리 사진가이고, 다큐멘터리 사진가는 시대의 증언자라는 것을 잠시도 잊지 않고 있다. 그렇지만 그는 친절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설명할 수 없는 일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만 충실한 기록뿐이다" 그는 아마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그의 조용한 작품들은 격동적인 드라마로 점철되어 있지는 않지만, 주의 깊게 살펴보면 숨은 이야기들이 살아 숨쉰다. 숨은 이야기들은 마치 벌판의 풀처럼 조용히 아우성을 친다. 이야기들을 감춤으로써 드러내는 일, 그것이 바로 Area Park이 자신의 파노라마 사진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 최성각
어른이 소년을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이유, 그리고 그들이 같이 구원 받는 길 ● 소년들에게는 집이 없어 보인다. 북한에서 압록강을 건너 바로 귀순했는지, 사진 속의 두 소년은 삐쩍 말랐고 정처 없어 보이며 어떤 곳에도 속할 만한 자신이 없어 보인다. 그들은 그냥 강물이 흐르는 강변 억새풀 속에 몸을 누이며 쉴 수 있는 공간을 찾을 것만 같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집인지 입을 옷인지 돈인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그들은 소년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의 강변은 한강처럼 콘크리트로 뒤덮여 있지 않고, 억새와 누런 풀이 가득하며, 물 속의 퇴적물이 보일 정도로 물도 맑다. 소년들의 강인 것이다. 반면, 사장님은 사장님의 강물 속에 빠져 죽었다. 그는 콘크리트로 뒤덮여 있고, 자살한 장소를 찾기 좋게 큰 다리 옆에, 방송국 취재팀 까지 올 수 있도록 차를 대기 좋은 곳에서 죽었다. 그는 의전이 갖춰진 어른의 강에서 죽었다. 물에서 건진 그가 입고 있던 바지에는 줄이 빳빳이 서 있을 것 같다. 소년과 어른이 이렇게 다를 수가 있다니. 이 소년들은 누구나 성장기에 한때 겪었던 그 소년들이 아니라, 외계에서 뚝 떨어진 소년으로 보인다. 사실 솔직히 말하면 소년으로 보이는 게 아니라 '소년'이라는 별종의 인간들로 보인다. 자기들 만의 어휘를 가지고 있고, 자기들 만의 행동양식을 가지고 있으며, 자기들 만의 사물을 가지고 있다. 물론 어른들은 이 들을 절대로 이해 못한다. 어른들이 이해 못 하는 곳으로 도망가는 것이 이들 소년들의 직업이기 때문이다. 직업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들의 도주욕망이 어른들이 한때 가지고 있다가 별 볼 일 없으면 때려치고 마는 그런 직장 보다 훨씬 질기게 그들의 목숨에 붙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애들은 쇼바를 올린 오토바이를 타고 밤거리를 휘젓고, 어떤 애들은 간판이 요란한 먹자골목에서 침을 찍찍 뱉으며 삐끼 노릇을 한다. 그들의 생김새나 옷차림, 몸가짐이 어른들은 통 마음에 들지 않는다. 당연하다. 어른들 마음에 드는 순간 그들은 소년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소년들을 어떻게 어른이 사진 찍는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 소년들에 대한 사진은 다큐멘타리가 아니다. ● 사진으로 찍힌 것은 소년들의 삶의 태도와 어른들의 삶의 태도 사이의 간극이다. 이 간극은 요즘 인터넷에 소년들이 직접 찍어서 올린 사진들에 나타난 그들의 몸가짐과 태도를 보면 금방 확인할 수 있다. 이런 간극을 뛰어 넘어, 진실된 어른이 소년들을 진실되게 찍는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사실은 불가능의 범주가 아니라 불성립의 범주라고 해야 할 것이다. 어른들의 카메라에 소년들은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카메라에 들어온 것은 소년들이 잠깐 어른을 위해 포즈를 취해준 그 순간이다. 어른은 소년을 사냥한다고 믿고 있지만, 소년들은 잠깐 포획된 듯한 표정을 짓고는 자신들의 정글 속으로 몸을 숨긴다. 소년들의 생태를 더 잘 조사하여, 정글로 따라 들어가면 더 진실된 소년들의 모습을 잡을 수 있을까? 아마 가능할 것이다. 그들이 어떤 동네에 잘 출몰하고, 몇시에 출몰하고, 어느 술집에 가서 무슨 표 뽄드를 마시는지, 아니면 엑스타시를 사 먹는지 포착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게 소년인가? 소년이기는 하지만, 소년들에게는 훨씬 미묘한 결이 숨겨져 있는 것 같다. 우리가 소년일 때는 그게 딜레마였다. 왜 어른들은 우리를 인정하지 않을까? 그게 꼭 불량소년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아마 감수성이 예민한 소년이라면 누구나 중고등학교 때 자살충동이나 가출충동을 느껴봤을 것이다. 아직 쓸모 있는 인간이 아닌 소년이 길거리 말고 어디를 가겠는가? 가정도 능력과 경쟁의 장인데. 어른들이 소년을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소년이 아직 쓸모 있는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소년이 아무리 새벽에 일어나 신문배달을 잘 한다고 그를 칭찬해주는 어른들은 없다. 차라리 쇼바를 올리고 폭음을 내며 길거리를 휘젓는 것이 더 일찍이 인정받는 방법이다. 그러나 그 인정은 우호적인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죽고 죽이는 가혹한 인정투쟁의 결과로 일어나는 것이다. 결국 인정은 죽음을 의미한다. 이순신 장군도 죽었기 때문에 인정 받았지 않은가. 그래서인지 소년의 얼굴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어 보인다. 실제로 많은 소년들이 죽고 있다. "성적 때문에 죽었대"나 "왕따에 시달리다 죽었대"는 그들을 인정하는 언표는 아니다. 그것은 신문기사를 읽은 것이지, 소년을 인간주체로서 인정해주는 것은 아니다. 소년은 보장받기를 원한다. 어른들 만큼의 명예나 지위나 돈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어린 것이 뭘 아느냔 식의 경멸은 안 받았으면 한다. 그런데 그런 인정을 가로 막고 있는 것은 어른들의 편견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카메라다. 진실의 기계로서의 카메라는 많은 편견을 숨기고 있지만 그런 사실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고약한 기계다. 그러나 사람들은 카메라가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안 보여주는지 모른다. 그들에게 카메라는 모든 것을 보여주는 백설공주 동화 속의 거울이다. 그러나 카메라는 차라리 플라톤의 동굴에 가깝다. 그것은 아무리 디지털이 발달하고 광학이 발달한 오늘날의 카메라라도 마찬가지이다. 이 세상에 17밀리와 300밀리의 초점거리를 동시에 찍을 수 있는 카메라는 없으며,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찍을 수 있는 카메라도 없다. 카메라가 강력한 진실의 기계로 기능할 수 있는 이유는 그런 한계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라도 자신의 개인적인 단점을 다 드러내놓으면 장관이나 대통령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발기부전의 장관, 강아지를 무서워 하는 총리, 치질 걸린 대통령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 병명들이 훌륭한 인간으로서의 그들의 쓸모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별반 쓸모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소년들에게는 그런 단점들이 잘 어울린다. 침 찍찍 뱉는 소년들, 운동화 찌그려 신은 소년들, 짝다리 집고 바지가 구겨진 소년들 다 잘 어울린다. 카메라가 그들을 찍을 때 어떻게 될까. 당연히 그들은 이중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가뜩이나 추래한데, 깔쌈하게 인정받기란 글른 것이다. 그러나 인정받지 못한다고 해서 아직 사람이 아니라고 한다면, 누구나 자신의 어릴 적 과거에 한 때 있었던 소년이라는 시기를 홀랑 삭제해 버리는 것 같이 무서운 일이다. 좀 위선적으로 들릴지 몰라도, 소년이란 아직 인정을 받지 못했지만 언젠가는 인정을 받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에 있는 인간들이다. 실업자를 취업준비생으로 부르는 것 같이 낯간지럽게 들리는 이런 표현은, 그러나 어른들이 얼마나 위선적으로 소년들을 대하는지 솔직하게 표현해서 좋다.
소년들이 어른이 되면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가? 사진의 시퀀스로 볼 때 어른이 되면 짜장면을 나르던가 공사판 인부가 되던가 경마장에서 눈이 뻘개서 마권을 뒤지고 있던가 회사 사장이 됐다가 강물에 뛰어들어 자살하던가 사창가에서 몸매 자랑하고 있던가 하는 일 밖에 없다. 어른이 돼도 별 볼일 없는 것이다. 훌륭한 일을 하는 어른들은 다 어디 간 것일까? 인정 속에 있다. 인정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사회의 초자아 속에, 지도이념 속에, 언론보도 속에. 윤리 속에, "착하게 살자"는 메시지 속에 들어 있다. 어른들은 다 죽은 것이다. 그들이 입고 있는 줄 선 양복, 그들이 타고 다니는 고급 승용차, 그들의 지위, 그들의 점잖은 공식적인 말투, 그들이 먹는 훌륭한 음식은 죽은 시체의 텅 빈 내부에 솜을 채우듯이 채워 넣은 충전재일 뿐이다. 그것보다는 비록 폭주족이거나 뽀다구 안 나는 옷을 입었거나 아직 거칠은 말투 덕분에 소년들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닐까? 비록 그들이 추래한 옷 입고 서 있는 길거리가 그들의 것이 아니고, 아무리 쇼바 올린 오토바이를 타고 누비고 다녀도 길거리는 결코 그들의 것이 되지 못할 테지만, 침을 찍찍 뱉을 자유를 가지고 있는 그들이야말로 길거리의 주인공이 아닐까? 광화문 네거리에 똑바로 줄을 맞춰 앉아서 대기하고 있는 전경들이나, 똑같이 줄을 맞춰 서서 농성중인 농민들이나, 자살한 사장이나 길거리의 주인은 아니다. 그들은 길거리를 너무 정치적으로 대하기 때문이다. 정말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었으면 왜 만인이 보는 공공장소인 강물에 뛰어들었겠는가? 아무도 안 보는 집구석에서 조용히 사라지지. 그의 자살은 너무 정치적이고 시각적이다. 그는 죽으면서까지 인정받고 싶었던 것이다. ● 폭주족의 질주는 탈정치적이다. 그들은 어른들이 정해 놓은 길거리의 정치학이 싫었다. 어른들은 그 질주 마저 '청소년 문제'라는 식으로 정치적으로 해석하지만, 그것은 정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행위다. 그것이 얼마나 정치와 상관 없는지 알려면, 소년/어른의 구분이 사실 무지하게 정치적인 것이라는 점만 알면 된다. 소년이 됨으로써 그들은 마음대로 섹스도 결혼도 음주도 흡연도 할 수 없다. 소년과 어른을 구분하는 행정과 담론의 체계는 신체와 취향 마저 규제해버리는 엄청난 권력이다. 어른들은 소년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그들을 꽁꽁 묶어 버린다. 소년은 타자화의 핑계일 뿐이다. 그렇다고 소년들이 당당하게 "우리도 인간 주체로 인정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되면 또 다른 얄팍하게 감동적인 드라마를 만들고 말게 될 것이다. 소년들은 밥맛 없는 어른의 세계를 슬금슬금 피할 뿐이다. 마치 개미들이 인간의 눈을 피해 땅 속에 방대한 구축물의 조직을 만들어 놓듯이, 소년들은 어른들의 시선의 아래 지층에 자신만의 거대한 지층을 만들어 놓는다. 거기에 어른들의 어휘로 된 생태학을 부여한다면 소년들은 죽고 말 것이다. 관찰하는 순간 개미집이 사라지듯이 말이다. 소년들이 길거리에 내팽개쳐져 있는 듯이 사진 찍히고, 어른들도 길거리의 주인공이 아닌 내팽개쳐진 존재로 사진 찍는 것은 둘 사이의 간극을 없애는 아주 좋은 방법이다. 양 쪽 다 나락으로 떨어트려, 존재의 헛된 긍정성을 보장해주는 가짜 장치들, 즉 체면, 지위, 소유 등을 벗겨 버리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이 다 극도로 한심한 상태에서 영화가 끝나고 마는 파스빈더의 「폭스와 그의 친구들」을 보는 듯 하다. 카자 실버만은 주체의 공허에 대한 라캉의 논의를 빌려, 그의 영화가 인간 존재의 공허를 허위로 메꾸어 주고 있는 모든 가설적 장치들을 없애 버린 작품이라고 평가했는데, 사실 이런 식의 극단적인 부정성은 도달하기 힘들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구원에 대한 갈망이 약간이라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이 죽어버린 이 세상에서 구원은 긍정성을 통해서가 아니라 부정성을 통해서 온다. 서로 멱살 잡고 벼랑 아래로 떨어지는 전략을 통해서 오는 것이다. 밑바닥이 훤히 보일 정도로 아주 솔직하고 깨끗한 자살전략을 통하여 소년과 어른들은 구원받는다. '이웃을 사랑하자'는 식의 헛된 자선이나 희망을 품은 병신 같은 메시지를 버린 곳에 박진영의 구원이 있다. ■ 이영준
Vol.20051201a | Area. Park 사진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