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_2005_1126_토요일_06:00pm
관람시간 / 06:00~11:00pm
코소_SALON DE COSO 서울 마포구 창전동 2-53번지 Tel. 016_9540_0141
strange fruit Note ● 1.누구나 그렇겠지만,나도 사람과 사람사이의 온전한 소통에 대해,관심이 많다. 나는,미카엘 엔데의 소설,'모모'에 나오는 거북이 카시오페이아처럼, 내 마음도 등에 글자로 나타나 의사를 전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생각했었다. 그러니 이런 내가, 야마모토 다이스케의 말대로-정보의 70%를 수집하게 되는 시각의 이미지들에, 사로잡힌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이시이 신지의 '그네타기'에 나오는 손가락 소리라는 개처럼, 다른 사람의 생각들도, 그들을 대신해서 여러사람들에게 전달해줄 수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내가 하는 말들이 혼잣말에 지나치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귀기울여 들을 만하기를 바라고 있다. 기왕이면, 사람들의 가던 길을 멈추게하고, 들여다보아도 이야기가 있고, 돌아서서 생각해보면 다시 떠오르는 그런 작업들을 하고 싶다. 그리고 그러한 작업들이 나라는 사람, 자체에서도 느껴지는, 그런 사람이 되려고 한다. ● 2.오랫동안 나는 쓸쓸한 배출구로서 그림을 그렸다.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만을 보았다. 어쩌다 감당할 수 없는 진실을 맞닿뜨린 경우에도 사람들은, 불편함을 감추지 못했다. 충격적이고 바늘로 찌르는 듯한 날카로움을 요즘 사람들이 좋아한다고들 하지만, 그 것은 일시적인 흥미에 지나지 않으며, 정말로 사람들의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은, 가볍고 이해하기 쉬운 것들이었다. 타인의 the other side도 마찬가지였다. 더군다나 말재주도 없던 나는 그렇기 때문에, 오랫동안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늘 가지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나의 그러한 이야기들은 가볍지 않은 이야기들이며, 이해하기 쉽지도 않았다. 하지만 무릇 대화라는 것은 청자만의 문제만이 아니라, 화자도 청자에게 맞추어 말을 해야하는 법이다. 나는 여전히 소통에 미련을 버리지 않았고. 여전히 나의 대화법을 찾으려 노력했다. 나는 이제 이야기를 처음인 듯 시작하려한다. 아쉽게도 미카엘 엔데의 '모모'에 나오는 거북이 카시오페이아처럼 내 마음이 등에 글자로 나타나 의사를 전달할 수는 없기 때문에 나는 이번 전시를 기획하게 되었다. 누군가 말하듯, 예민한 더듬이를 가진 내가 감지한 상상(FICTION) 혹은 진실(NONFICTION)이 일궈낸 열매, '기묘한 과일'들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 누군가와 공감하고 또 누군가의 또다른 이야기를 끌어낼 수는 작업들이기를 기대한다. ● 3,NONSEXUALITY 내가 작업을 할 때,내 사고에서 성적인 측면은 배제하여진다.그것은 내 모든 작업에서 일차적인 감정은 배제하고 싶기 때문이다.일차적인 감정에서 느껴지는 것들에 관해 열심히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그것은 일반적인 사람들도 가능한 영역이라고 보고 있으며 지금의 나는 그러한 것들에 관심이 없다. 하지만 나는 남성성과 여성성에는 관심이 많다.미술계에서 힘있는 작업으로 인정받는 작가들이 남성이고,그 남성성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움도 매력적이지만,나는 여성으로서 작업을 한다는 것을 잊지 않고 있다.(그것은 내가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작업한다는 의미와도 연관성을 가지고 있지만 나라에 관한 것은 지금 언급될 이야기가 아니므로 차지하고..) 여성으로서 내가 작업을 하겠다는 것은,현실이 아직 남성위주 사회를 아직 탈피하지 못했기에 미술계를 바라보는 대중의 눈도 그 관점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다는 뜻이다. 여성성을 가진 작업이란 하이힐이나 화장품 같은 부류의 여성적인 측면도 아니고,어머니라던가 소녀라는 것도 아니다.내가 생각하고 보여주고 싶은 여성성이란 좀 더 총괄적인 측면에서 여성성이며 대표적인 남성적으로 힘을가진 작업에 필적하는 다른 의미의 힘을 가진 여성성이다.아직 이 생각은 구체화시키지 못했지만,이 부분에 있어서는 차후에 내 작업에서 이끌어 가게 될 것이다. ● 4.수학 초등학교 시절엔 '페르시아 왕자'라는 롤 플레잉 게임에 매혹된 적이 있다.이 게임은 첫번째 스테이지가 끝나고 암호에 맞는 알파벳 물약을 먹어야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그런데 여기에 어떠한 규칙이 있을 거라고 머리를 짜내어보아도 한번도 성공한 적이 없었다. 어느날 헌책방에서 그 패스워드가 적힌 페르시아 왕자 안내서를 발견했다.나는 정말 어이가 없었다.가까운 곳에 쉬운 길이 있다.그리고 나는 그런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어쩐지 나는 그 컴퓨터 게임에는 당장 흥미를 잃어버렸다.'인생은 게임이다'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그렇다면 안내서도 있을까? 혹은 우리보다 먼저 산 사람들이 자신이 걸은 길만큼의 지도서를 만들어놓지는 않았을까? 나는 그 후로 모든 enemy를 물리치고 stage clear를 할 수 있는 절대진리를 찾아헤매기 시작했다.
이번에 '3일만에 읽는 수학의 원리'라는 고바야시 미치마사의 책을 읽으면서,나는 이 책에 나온 많은 것들이 어릴 적 어머니가 자주 내시던 기묘한 문제들임을 깨달았다.피타고라스의 정리에서 부터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수학교수이시던 어머니는 학생들에게 수학을 재미있게 가르치기 위해서,7개의 다리를 한번에 건너는 법같은 아리송한 문제들을 찾아내셨고,언제나 나에게 먼저 실험해보시곤 했었다. 나는 그런 문제를 붙들고 즐거워할만한 성격이 아니라 대개는 건성으로 풀고 말았었지만,어쩐지 아리스토텔레스나 가우스의 이야기에서 세상의 규칙같은 것을 느끼고는 있었다. 죽기직전에 눈을 감으며 인생은 이런거야라고 한마디 던질 수 있을 그 진리,그 규칙같은 것.많은 사람들은 각자의 결론을 내리고 지금의 생을 떠나갔고,더이상은 볼 수 없는 그들이 내린 결론이 맞았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하지만,"나는 생각한다,고로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말에 맞먹는 절대진리가 있어 우리는 어쩌면 삶을 좀 더 쉽게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혼자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지만,나는 사람들이 나처럼 절대진리를 찾아헤매고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해왔다.어떤 사람들은 종교에서,어떤사람들은 예술에서ㅡ그리고 각자의분야에서.원불교에서는 많은 종교들이 하나의 산을 오르는 수많은 길의 갈래라고 가르친다.나는 그것을 세상전체에 적용시켜 산을 오르는 각자의 종교가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수학은 완전한 것이 아니다.종교나 예술처럼.고바야시 미치마사도 말했지만,수학의 증명에 대한 생각도 시대의 변화에 따라서 달라진다.그러나 (제목처럼 3일만에 읽기는 무리지만)내가 읽은 이 책에 쓰여진 많은 규칙들만으로도 (나는 공식을 규칙이라고 부르겠다) 나는 철학자나 예술가들의 남긴 말만큼이나 많은 것들이 분명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그래서,그렇다면. 수학도 종교나 예술만큼의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닐까. ● 1.burden-bearer 나는 다자이 오사무만큼이나 걱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소심하고 나약했다,내게 하나의 의문을 던져지고,나중에 가서보면 나는 본래의 의문의 무게에 몇 배는 되는 질문더미에 묻혀 머리를 싸안고 꼼짝도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생각하는 일을 그만둘 수 없었고,이것이 내가 해야할 일인 듯 여겨지기 시작했다.나는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DELAY 시킨 많은 일들을 대신해서 생각하고 결론으로 이끌어가는 새로운 생명체,burden-bearer이다. :상상력의 무게에 사로잡힌 '나'이면서,등에 무언가를 짊어진 짐승. 성경에도 등장하는 다른 사람의 짐을 짊어지는 사람이다. ● 2.africa 오랫동안 따듯한 남쪽나라를 꿈꾸었다.몇년전엔가 일을 하고 있던 가게에 한 친구가 찾아와 아프리카에 가려고 돈을 모으는 중이라고 했다.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했고,그 사람도 나를 알지 못했으나,나는 말없이 같은 꿈을 꾸었다. 나는 말재주가 없다고 몇 번이나 하는 이야기지만,그림으로는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지 그것조차 자신이 없다.어린왕자의 비행사는 어린왕자에게 만족스러운 양을 그려주기를 포기하고 작은 상상의 상자를 그려주었다.그 안에 너의 양이 있다고,나도 사람들에게 상상의 상자를 준다.네가 원하는 것들이 들어있다고,이를테면 아프리카. 사람은 나를 특이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하지만 나는 사람들 각각이 개별적으로 특별하고 반짝반짝 빛나는 별들처럼 모두가 아름답다고 여기고 있다.하지만 우리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다.나의 상상이 너와 그다지 다르지도 않다.네가 꿈꾸는 것을 나도 꿈꾸고 그것을 알아주길 바란다.마방진은 그러한 의도로 이 작업에 쓰여지게 되었다.어떠한 방향으로 수를 더해도 합은 같다. ■ 이윤희
이윤희가 만든 '설음'의 공간 ● 공간으로 처음 들어서면 사과나무가 있다. 난 왜 그게 사과나무로 보일까. 어쨋든. 그것은 나에게서 뭔가를 끄집어내줄 나무이며 당신의 구석구석을 후벼줄 나무이다. 또한 조그만 장난감 동물들을 광택나는 검정으로 칠하고 나무상자에 난 구멍으로 훔쳐보게 한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듯이 엉거주춤 그 동물들을 훔쳐봐라. 어떤 기억이 '파릇' 튀어나온다. 이윤희의 '낯설음'은 인간을 그렇게 유도한다. ● 판화와 디자인, 조소를 공부한 작가의 작업에는 여러 복합적인 재미가 있다. 잡다한 드로잉에서 판화작업과 설치작업, 그리고 혼합된 영상작업 등 여러 매체를 다루는 것은 작가가 가진 소통에 대한 고집스러움 때문일 게다. 작가는 소통, 다시 말해 당신과 나 즉 양방향의 대화에 집착하는 사람이다. 목마른 사람이다. ● "아쉽게도 미카엘 엔데의 '모모'에 나오는 거북이 '카시오페이아'처럼 내 마음이 등에 글자로 나타나 의사를 전달할 수는 없기 때문에 나는 이번 전시를 기획하게 되었다."
이윤희는 굴뚝청소부가 되어야 한다. 나에게는(나에게는) 그렇다. 메케한 통로를 뚫어주니까. 이렇게 말하면 싫어하겠지... 이윤희는 팅커벨이 되어야 한다. 당신을 싱(싱)선한 낯설음으로 안내하니까. 이렇게 말해도 싫어하겠지... 사실 작가는 카시오페이아가 되고 싶어한다. 미카엘 엔데의 소설 '모모'를 읽어보셨는가. 그 소설에는 카시오페이아라는 거북이가 산다. 그 거북이는 자신의 등껍질에 자신의 생각을 글자로 나타내는 방식으로 의사소통 한다. 하지만 우리는 '언어' 안에서 얼마나 괴로움을 느끼는가. 지금 이 시대에 이르러 언어에 대한 불신은 더 이상 새삼스러울 것이 아니다. 카시오페아는 딱딱한 등껍질 위에 글자를 띄웠지만, 여기 이윤희는 공간에 형상을 남겼다. 그 거북이도 더 재주가 있었다면 쓸모 있는 등껍질 위에 알파벳 따위를 올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 이윤희의 대화는 절대로 답답하지 않다. 작가의 작업에는 여지가 많아서 항상 내가 들어갈 구석이 넉넉한데 작가가 뭘 의도했든 난 다양하게 작품의 구조나 태생도 바꿔버린다. 내 맘대로 상상하기. 그렇더라도 이번 작업에서 시각적인 특징은 강하다. 나는 그 특징을 강한 선묘와 인체로 꼽는다. 판화나 드로잉 작업에서 작가가 가장 즐기는 소재는 인체이다. 무엇인지 소실되어 있고 대부분 온전한 형상을 갖추지 못한 인체들이지만, 그것이 단지 선으로만 묘사되었을지라도 적당한 무게를 가지고 널부러져 있다. 작가의 의도에서든 아니든 인체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역시 집착 때문이리라. 인체를 떠난 욕망이 존재할 수 있을까. ● 날개의 모티프도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이다. 온전한 형상이 없는 인체에 생경한 날개라니. 그리고 불시착할 바닥도 없이 허공에 매달린 모습인데 이것들이 어우러져 기묘하게도, 차라리, 홀가분하다. 내 사고는 홀가분하지만 정작 본인은 어떨까. 작가노트에서는 자신 스스로를 "상상력의 무게에 사로잡힌 '나'이면서 등에 무언가를 짊어진 짐승. 성경에도 등장하는 다른 사람의 짐을 짊어지는 사람이다"라고 말한다. '사람'이라는 말만 빼면 카시오페이아가 이렇게 말했을 법하다. '나는 십자가를 짊어진 거북이요' 라고 말이다. ■ 제정신
■ 찾아오는 길_홍대 앞 산울림 소극장 앞 건널목에서 길을 건너, 미니스탑 오른쪽 길, 서강대 방향으로 100m 직진. 현대자동차 왼편 작은 골목으로 20m가량 내려오면, 하얀 손 빨래방 옆, 아우라 연습실 1층.
Vol.20051128b | 이윤희 개인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