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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5_1123_수요일_05:00pm
코엑스 태평양홀 서울 강남구 삼성동 무역센터 Tel. 02_6000_1126 www.coex.co.kr
심현주의 근작 : 가상과 실재의 충돌, 그리고 순환적 세계 ● 서구 근대의 사유 속에 드러나는 주류적인 시간개념은 직선적이며 진보적 개념으로 추상화된다. 연속선상에 놓여지는 순간들의 집적으로 개념화될 수 있으며, 지나간 시간은 되돌릴 수 없는 과거의 것이 되고 만다. 데카르트와 더불어 시작되는 자기확실성의 원리는 수학과 물리학을 기반으로 한 보편과학을 통해 세계를 인식코자하는 태도였다. 근대의 사상가들에게는 다수의 진리, 다수의 구원가능성이 아니라 단 하나의 진리와 단 하나의 구원가능성만이 존재한다. 단일성과 보편성은 근대의 가장 내밀한 속성이며, 다원성과 부분성은 이질적이다. 물론 비코(Giambattista Vico)와 같이 근대에도 시간에 대한 순환적 사고를 가진 인물이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전체적으로는 분석과 합리적 사유를 바탕으로 한 연속성의 사유가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20세기 모던의 개화기에 아인쉬타인의 특수상대성원리, 하이젠베르크(Werner Karl Heisenberg)의 불확정성의 원리, 만델브로트(Mandelbrot)의 프랙탈(fractal) 이론 등은 수 백년 간 유지되어오던 보편과학을 향한 열망들을 여지없이 분쇄해 버렸다. 이들 이론에 의하면, 전체는 파악될 수 없으며 모든 인식은 유한하다. 전체성을 추구하는 사유는 다원성의 차원으로 파편화되었으며, 시공간의 개념 역시 다차원의 파편적 속성으로 분화되었다. 아방가르드를 근간으로하는 20세기 모던을 심화시킨 현재의 사유, 특별히 인터넷과 전자매체로 대표되는 오늘의 현실은 파편화된 실재의 단면들과 가상의 요소들이 한데 어우러져 새로운 실재를 만들어내며 이를 자기증식시키기도 한다.
심현주의 작업은 기본적으로 화이트 큐브로서의 전시장 내에서만 존재하는 것을 원치 않고 폭넓게 건축공간과의 만남을 지향해 왔다. 야외 환경 디자인 설계를 통해 건축물의 다양한 환경에 부합되는 작업을 추구해온 그녀의 관심사는 아무래도 다양한 매체와 표현방법의 실험에 있다. 멀티미디어 영상작업과 설치미술, 환경디자인 작업을 통해 그녀는 작품영역을 확대시키고 있다. 하지만 그녀의 작업은 젊은 작가들이 일반적으로 가지는 전위적이면서 끊임없이 해체적 실험을 꾀하는 태도와는 차별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그녀의 작업이 가지는 일관된 주제가 있다면, 시간의 순환과 관련된 문제일 것이다. 그녀는 생성과 소멸, 탄생과 죽음을 통해 순환되는 자연과 생명의 변화를 통해 시간의 순환성 문제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보여오고 있다. 그녀의 작업은 서구적 어법과 매체를 사용하면서도 비서구적 정신과 사고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 이번 작품 역시 시간의 순환을 큰 주제로 삼고 있다. 대형 프로젝션과 모니터를 통해 구현되는 영상이미지들을 통해 자연과 인생이 가지는 시간의 순환을 나타내고 있다. 전시장 바닥에 투사되는 이미지와 벽면 모니터를 통해 서로 다른 시간의 순환성을 드러낸다. 전시장 바닥에 투사되는 그의 비디오 영상작업은 이미지들이 순차적으로 전환된다. 장미꽃 문양무늬의 벽지로부터 이탈된 장미꽃들은 꽃이 만발한 화원으로, 화원은 바람에 흔들리는 초원으로 순차적으로 변화된다. 초원에 비가 내리고 빗물이 어느덧 호수가 되고, 연이어 호수는 물이 마른 바닥을 드러내고, 균열된 흙바닥은 생명이 뿌리내릴 수 없는 콘크리트 벽으로 변화한다. 콘크리트 벽은 다시 장미꽃 무늬의 벽지로 오버랩이 되며 벽지로부터 생명을 획득한 장미꽃 화원이 등장한다. 이러한 연속적 장면들은 처음과 끝이 어디인지 알 수 없는 진행으로 끝없이 반복된다. 마치 리좀(rhizome)처럼 뿌리와 줄기가 구분되지 않는 흐름을 가진다. ● 바닥의 프로젝션과 짝을 이루는 또 다른 작품은 여러 개의 모니터를 사용하고 있는데, 모니터들에는 기러기가 날아간다. 벽면에 배치된 각 모니터들의 영상의 조합은 하나의 군무를 이루며 한 곳을 향하는 기러기 떼들의 비상(飛翔)이다. 동시성을 띤 하나의 총체적 장면을 각각의 모니터가 분할하여 보여주는 것이다. 비상의 종착점은 커다란 하나의 화면이 되며 기러기들은 속도를 가지고 날아가 그 화면 속에 비상이 정지된 형태로 고정된다. 한 화면에 박힌 기러기들의 정지된 이미지는 포장지의 문양을 형성한다. 이 포장지는 박스를 포장하는데 사용된다. 포장지의 기러기들은 다시 창공을 비상한다. 바닥에 투사되는 작품과 내용은 다르지만, 시간의 변화에 따라 순차적으로 상태가 변화하며, 이러한 변화를 반복하는 구조라는 점에선 시간의 순환이라는 동일한 문맥을 형성한다.
그녀의 이번 작품에는 순환의 구조 이외에, 좀더 흥미로운 점들이 발견된다. 순환구조 내에는 특정한 가시적 내러티브가 존재하지 않으며, 이미지들의 연속적 배열을 통해 자유롭게 관객들이 내러티브를 유추해 낼 수 있을 뿐이다. 또한 동영상의 한 속성이 정지형상으로 전환되기도 하고 정지된 이미지가 실재 동영상의 이미지로 되살아나기도 한다. 기러기들의 날개짓과 같이 실제의 이미지와 디지털화한 가공적 이미지가 교묘하게 공존한다. (기러기의 비상은 프레임의 조작을 통해 날개짓의 기계적 동작을 디지털화하여 합성한 것이다.) 그녀의 작품에는 동영상 이미지와 포장지나 벽지와 같은 평면 속의 정태적 이미지가 순환적으로 공존하기도 한다. 이러한 이질적 요소들의 공존을 통해 그녀의 작품에는 실재와 실재보다 더 실재적인 허구가 연출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그녀의 작품에 선택된 소재들은 그녀의 무의식적 흐름의 반영이기도하다. 생명과 죽음의 순환구조 사이에 배치된 일상과 욕망은 생명력을 상실한 자연, 박제화된 자연 속에 상실된 인간성과 생명력의 회복을 희구하는 그녀의 소망을 표출한다. 생명력이 상실된 콘크리이트 벽에 장미꽃 문양의 벽지가 부착되는 순간 콘크리트 벽은 새로운 생명력을 되찾는다. 일루젼(illusion)으로서의 장미의 문양이 실재로서의 생명력을 획득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생명력은 여러단계의 변환을 거쳐 다시금 생명력을 상실한 콘크리이트로 되돌아간다. 콘크리이트 벽의 이미지는 전시장 바닥에 투사되어 이미지와 바닥을 구성하는 매체와의 통합성을 가지도록 구상되어있다. 콘크리이트로부터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며 순환하는 하나의 아름다운 환상을 불러내고 있기도 하다. 또한 모니터에 등장하는 기러기의 비상은 인간계와 천상계를 연결하는 메신저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고 망자들의 영혼을 천상계로 연결시키는 사자(使者)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러한 이미지를 담지한 기러기들은 비상하여 종국에는 하나의 평면 속에 자리하여 포장지의 문양으로 고착된다. 이 평면은 영혼이 안식하는 공간이기도 한데, 포장지는 박제된 무엇인가를 담고 있는 박스를 포장하는데 사용되며 포장지 위에 박제화된 기러기는 어느새 생명으로 부활하여 창공을 비상한다. 그녀의 무의식 속에는 예언적인 새를 상징으로 가지고 있다. 인생의 안내자, 비상,노래, 둥지 속의 화합, 새벽의 상징, 세기초의 상징으로서의 새를 키우고 있다. 이 역시 자연과 생명의 시간적 순환을 암시하고 있지만, 순환은 동일한 내용들의 단순 반복을 의미하지 않는다. 상징성을 지닌 일상적 이미지들은 형태적으로는 반복하지만 반복의 매 순간마다 새로운 의미들로 재출현하는 것이다. 이러한 순환 구조는 매우 복잡하고, 다원적 속성을 가지고 있다, 피상적으로 읽혀지는 체험적인 시간 밑에 일상적 시간과 우주적 시간이 공존한다. 그녀의 시간은 일상적 차원의 순환으로부터 출발하지만, 우주적 순환으로서의 속성을 가진다. 일상은 순환으로 이루어 져있고 좀더 큰 순환 속으로 들어간다. 시작은 언제나 다시 시작하는 것이고 또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이 헤라클레이토스(Herakleitos)적 생성은 신비이며 하나의 아름다운 환상이기도하다. 새로운 생성은 반복, 상기(想起), 소생 등은 마술, 상상의 카테고리이며, 외관 밑에 감추어진 실체의 카테고리이기도하다.
그녀가 또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이미지들은 자연세계와 인공세계의 충돌과 조화를 보여준다. 세계란 무엇인가? 그리고 인공세계란 무엇인가? 인공세계와 비인공적 세계의 상관관계는 무엇인가의 문제에 대해 그녀는 질문하고 있다. 우리는 인공세계를 자연적 세계와 반대되는 세계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자연적 세계는 무엇인가? 물리학의 세계인가? 체험된 자연의 세계인가, 일상적 세계인가? 종종 인공적이라고 불리는 것은 아주 간단히 말하자면 낡은 것과 대비되는 측면에서 새로운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 낡은 것과 대비되는 측면에서 새로운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 낡은 것은 그 과거의 것과 비교했을 때, 이미 인공적인 것이 된다. 인공성과 자연성은 대상들을 표시하는 게 아니라 견해와 전망, 관계를 표시한다, 그러므로 하나의 동일한 대상이 어떤 측면에서는 자연적인 것으로, 다른 측면에서는 인공적인 것으로 나타날 수 있다. 자연적인 세계 그리고 인공적인 세계 그 자체는 존재하지 않고, 단지 상대적으로 자연적인 세계와 인공적인 세계만이 존재할 뿐이다, 인공성과 자연성은 늘 한 쌍이다. 또한 그녀는 가상적 실재(virtual reality)와 실재적 실재(real reality)의 문제에 대해서도 질문을 가하고 있다. 그녀의 이미지들은 실재의 이미지와 디지털 조작을 가한 가상적 실재로 구성되어있다. 전자세계는 일상세계에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변화, 변형, 혁신을 위해 열려있다. 데이터의 결합은 한 순간에서 다음 순간으로 증식할 수 있고, 스스로를 생산할 수 있다, 데이터는 결합될 수 있으면 변종화 될 수 있다. 전자세계는 완전한 표면이지만 무한히 넓은 하나의 세계이다. 병렬적인 연계와 확장의 예견할 수 없는 다수들이 전자 세계 속에 속한다, 동일한 것의 증식에서부터 복잡한 연계에 이르기까지 디지털의 펼쳐진 공간은 지칠 줄 모른다. 그녀의 작업은 순환 대상들을 가진 비디오와 사이버스페이스에서 완전히 다른 비일상적인 차원들이 받아들여진다는 점에서 시작한다. 현실에 대한 상이한 해석들이 일상적 경험영역에 속하게 된다, 또한 그녀의 작업은 매체 실재와 일상실재의 상호침투를 통해 시간과 존재의 순환성을 드러내고 있다, 그녀의 이러한 어법에 의해 실재와 시뮬레이션 사이의 경계가 사라지고 있다. ● 그녀의 작품을 통해 인공성과 자연성, 가상과 실재의 충돌과 소통의 문제를 통해 일상 속에 내재된 우주적 시간의 문제에 접근코자하는 의도의 일단을 보게된다. 그녀는 시간의 순환구조를 통해 단선적 사고를 탈피하고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새로운 시간을 찾아 떠나는 여정에 우리를 동참시키고자 하고 있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순환구조 속에서 존재와 시간은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며, 다양한 차원의 요소들이 서로 충돌하고 조화함으로 우주적 차원의 세계를 열어 보이고자하는 소망을 가시화하고 있다. ■ 김찬동
Vol.20051126c | 심현주 개인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