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040728a | 이동환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05_1109_수요일_06:00pm
학고재_이전 Hakgojae Gallery_moved 서울 종로구 관훈동 100-5번지 Tel. +82.(0)2.7739.4937 www.hakgojae.com
이동환은 지금 표.정. 짓.고 움.직.이.는 세계를 그린다 ● 과연 우리는 우리 눈으로 세계를 보고 있는 것일까? 눈이 아니면, 그럼 무엇으로 본단 말이냐고 물을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내가 다시 묻고 싶다. 우유 방울이 왕관모양으로 튀는 현상은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서양난의 수술부분과 여성의 은밀한 성 부위를 어떻게 닮았다고 보게 되었는지, 계단을 내려오는 우리 몸을 어떻게 절지동물이 움직이는 것처럼 연속해서 보게 되었는지 말이다. 첫 번째 현상은 해롤드 애저튼의 사진을 통해 볼 수 있었던 것이며, 두 번째는 조지아 오키프의 그림들이 보여준 세계의 유사성이고, 마지막은 마르셀 뒤샹의「계단을 내려오는 나부」가 시각적으로 서술한 인간의 운동이다. 이러한 예들은 우리가 자신의 육안으로만 세계를 보는 것은 아님을 말해 준다. 사진이나 그림이 가시화한 이미지가 일정 부분 우리의 시각 세계를 풍성하게 하고, 앎의 지평을 마련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눈을 상대적으로 '헐벗은 눈(naked eyes)'이라 하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어떤 사진가와 화가들은 자신의 헐벗은 눈으로 우리의 눈을 세계의 비가시성으로까지 확장해 주는 가교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현대미술의 너른 바다에서 이들은 하늘의 별처럼 많이 떠 있지만, 그 어떤 화가 중 나는 이 글에서 이동환이라는 작가와 그의 그림들에 대해 논하고 싶다. 비록 그가 현대미술계의 스타는 아니지만, 공간 속 움직이는 형상을 그린 그의 회화는 동영상에 길들여진 우리 눈에 작은 빛을 비추기 때문이다.
사물의 얼굴, 그림의 표정 ● 세탁기 뒷면이 얼굴을 가졌다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밤은 어둠 속에서 어떤 표정으로 우리를 감싸고 있을까? 우리를 품고 있으며 우리가 움직일 수 있도록 해 주는 공간은 표정이 있을까? 있다면 콘크리트가 그렇듯이 항상 딱딱하게 굳어 우리와 관계없는 표정일까? 이동환의 작업은 이러한 의문들에서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만약 그가 그러한 의문들을 갖지 않았다면, 우리는 이모티콘 새우 눈(=∥=)으로 웃고 있는 네모 세탁기 얼굴(「뒤-그들」)을 보지 못했을 것이고, 내리는 빗물처럼 축축하게 젖은 밤의 얼굴과 그 속에 푹 잠겨 잠 못 드는 우리 의식이 육신을 얻어 움직이는 모습(「문득..깨어 있는 밤」)을 결국 못 봤을 것이다. 또한 우리 집의 내부 공간이 건축 설계도의 그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표정을 매순간 짓고 있다는 것도 몰랐을 것이다. 요컨대 이동환은 사물과 현상과 공간 속 우리 몸의 운동에 가시성의 빛을 던짐으로써 그것들을 조명하고 우리가 보지 않았거나 볼 수 없었던 세계를 보게 한다. 이는 화가의 입장에서는 특권이자 과제이며, 동시에 그림의 대상이 되는 사물, 현상, 공간, 운동의 입장에서는 어떤 형상을 빌어 자신을 가시화할 절호의 통로이다. 화가의 내밀한 관찰과 주관적 드러냄에 의해 이 대상들은 인간이 행사하는 논리적 규정과 해석의 폭력으로부터, 기능에 봉사하는 용도성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자신됨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예술작품의 근원 Der Ursprung des Kunstwerkes』에서 "현상하는 것들 뿐 아니라 사물 자체와 같이 현상하지 않는 것들 모두, 즉 모든 존재자가 철학 술어상 사물"이라 정의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물의 사물다움은 사물로부터 규정되어야만 하는데, 우리가 만약 사유가 정의한 사물 개념만을 따르거나 사물과 직접적-감각적으로 만나는데 만족한다면 우리는 사물의 사물성을 알 수 없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사물의 사물다움, 즉 진리를 알 수 있는 길은 바로 예술작품을 통해서이다. 예컨대 농부의 신발을 그린 반 고흐의 구두 그림은 구두의 사물성, 그 사물의 진리를 드러내고 있다. ● 여기서 하이데거의 논리를 빌려 말하자면, 일상생활에 필요한 물건들로만 여겨졌던 사물의 사물다움은 이동환의 그림 속에 정립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세탁기 뒷면과 그 주변을 그린 그림을 통해 그들만의 얼굴(사물성)을 보고 알게 된다. 우리는 또한 그의 그림을 통해 우리가 습관적으로 맞아들였던 밤과 지겹다고 생각했던 삶의 공간, 그리고 관성적으로 움직였던 우리 몸의 활동을 낯설게 보게 되고, 그 와중에 그것들의 다양한 본질에 접근하게 된다. 말의 수사적인 의미에서 그것들은 각자를 드러내는 '얼굴-존재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얼굴이 그림의 표정으로 전이(轉移)되어, 그림 속에서 현상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 때 전이는 화학 용어로 정의하듯이 "물질이 어떤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달라지는 것"을 의미하는 동시에 미술의 정의로는 대상이 갖고 있던 고유한 속성이 평면 매체인 회화의 내용으로 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전이를 가능케 하고 사물의 상태와 속성을 변화시키는 주체는 과학자가 아니라 작가 이동환이고, 그 방식은 화학실험처럼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소위 '예술적'이라고 말하는 식으로 이루어진다. 상투적으로 들리지만 여전히 여타 예술 활동에 혹은 예술 아닌 것에까지 남용되는 '예술적'이라는 이 표현을 분명히 하기 위해, 이제부터 이동환의 회화를 좀 더 자세히 보기로 하자. 흔히 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한다고 하는 영상이미지와 대비해 가면서.
운동, 정황이 재현되는 상이한 방식 ● 이동환의 회화는 꾸준히 사물과 공간, 그리고 사람의 존재 양태를 형상으로 구체화하고 있어서 연속성을 갖는다. 그러나 동시에 작가가 점차 공간과 그 안의 사람이 움직이는 정황을 '관찰→사실 재현'하는 수순이 아니라 '관찰→사고→관념을 재현'하는 수순으로 바꿔감에 따라 각 시기마다 미세한 분절을 이루는 것으로 보인다. 앞서 언급했던 「뒤-그들」(2001)은 우리가 생활에서 볼 수 있는 세탁기의 뒷면과 그 주변에 널려있는 사물들의 외양을 그대로 묘사하는 방식을 쓰면서 그 사물의 사물성을 포착해 보려 했다. 반면 지난 2004년에 그린「쓰러져라」, 「달아나라」같은 일련의 그림들은 제목이 지시하듯 '운동' 그 자체를 화면 위에서 재현시켜 보려 했던 듯 하다. 계단이나 질감이 다른 바닥을 그림으로써 여전히 공간의 속성을 형상을 빌려 묘사하는 경향은 남아있지만, 이 시기 그림들은 사람의 연속동작을 마치 절지동물처럼 표현해서 화제(畵題)가 명시한 움직임을 평면 위에 구현하려 한 것이다. 그래서「쓰러져라」를 보면, 한 여자가 입까지 딱 벌리고 바닥을 향해 뒤로 진정 쓰러지고 있다. 「달아나라」는 이미 여러분도 상상을 했겠지만, 벌거벗은 한 여인네가 화면의 왼쪽에서 오른쪽 계단으로 뛰어 진정 달아나고 있다. 물론 '운동'을 사람의 신체 외곽선을 중첩시켜 연속동작처럼 그리는 것은 어찌 보면 운동에 대한 조금 단순한 해석 같기도 하고, 「달아나라」의 나체 여인은 곧 바로 마르셀 뒤샹의 「계단을 내려오는 나부」를 떠올리게도 한다. 그러나 현대문명의 기계미를 예찬한 미래파의 지오코모 발라(Giocomo Balla)가 움직임을 표현하기 위해 정작 회화로「개 줄에 매달린 개의 역동성 Dynamism of a dog on a leash」을 그렸다는 점을 환기해 보면 이동환 그림의 운동 또한 그렇게 단순한 해석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또한 왜 발라(1912), 뒤샹(1913), 이동환(2004)이 모두 자신들의 그림에서 움직임을 이렇게 연속동작으로 가시화하려 했는지 분석해 보면, 이동환이 미술사 대가들의 작품을 단순 번안했다고는 평가할 수 없다는 점을 알게 된다. 오히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선상에서 그들의 연관성을 보아야 할 것이다. 즉 미술의 대선배들이 영화의 초창기, 회화 안에서 영화와 다른 움직임을 보여주려 했듯이, 이동환은 영상이미지가 시각문화의 전권을 행사하는 우리시대, 회화로 다른 운동을 보여줄 수 있다는 그들의 믿음을 재 실천 했다고 말이다. 말하자면 이들은 '운동'을 '기계적' 혹은 '영상의 방식'으로가 아니라, 소위 '예술적' 혹은 '회화의 방식'으로 보여주려 한다. 영상이 '시간-운동 이미지'라면, 회화는 '무시간-운동 이미지'이다. 영사시간의 흐름에 따라 앞의 동작을 지우면서 끝없이 현재 움직임만을 재생하는 영상과는 달리, 회화는 무시간 속 하나의 단일한 평면 위에서 움직임의 전후를 종합적으로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에드워드 머이브릿지가 19세기 말에 찍은 각종 측정사진 또한 움직임의 전후를 보여주지만, 그것은 한 장의 사진 속에서가 아니라 여러 사진의 연속을 통해서이다.) 그런 의미에서 화가의 화면은 시간을 재현할 수 없는 평면이라는 회화의 매체 속성에 충실하면서도, 영상의 분절된 시간 속 운동과 달리 운동을 동시화 하는 종합적 장(場)인 것이다. 이는 다분히 개념적인 설명이고, 그림에서 이러한 종합적 운동을 재현하려는 회화는 다분히 운동에 대한 관찰과 관념을 바탕으로 한다.
이동환의 근작은 그가 이러한 관찰과 관념을 회화에 조금씩 더 많이 투입해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흔들리는 대명사」는 한 화폭만도 3 미터가 넘는 화면이 세 개 이어진 대작인데, 이들은 각각인 동시에 연접된 것으로 보인다. 우선 이 세 그림은 공통적으로 별 특징이 묘사되지 않은 벽과 바닥으로 이루어진 공간, 그리고 그 안의 인간 움직임을 전체 내용으로 하고 있다. 각 화면의 공간은 무대 세트처럼 단순하게 구획되어 있고 첫 번째 그림에는 인간처럼 보이는 형상이 왼쪽 문에서 들어와 오른쪽 앞으로 사라진다. 두 번째 그림에는 어린아이 같이 생긴 형상이 오른쪽 벽과 벽 사이에서 기어 나와 왼쪽 공간으로 기어 들어가는 식으로 그려져 있다. 마지막 그림은 앞의 두 그림과는 약간 다른데, 여기서는 두 마주 선 인물이 그려져 있고 그 인물들 중 한쪽은 점차 위축되어 가는 것처럼, 다른 한쪽은 점점 앞으로 나서며 득세하는 것처럼 그려져 있어 어떤 관계를 암시하는 듯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떻게 나는 그림 속 인간 형상이 움직이는 방향과 위축-득세의 정도를 이렇듯 분명하게 규정할 수 있었을까? 이는 이동환의 그림이 이미 그 움직임의 방향과 존재의 강도(intensity)를 현시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운동과 상태가 생성되고 있는 공간을 시점에 따라 분명하게 정의해 놓았기 때문이다. 움직임의 양태는 이전처럼 절지동물의 그것으로 표현하면서 감상자의 시점(視點)에 가까워진 운동 시점(時點)은 보다 강한 선을 쓰거나 얼굴을 묘사함으로써 감상자가 운동 방향과 강도를 감지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다른 한편 이 그림에서는 공간이 이전과는 달리 어떤 장식적이거나 설명적인 묘사 없이 오직 날카로운 각만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래서 공간의 부동성이 강조되는 동시에 움직이는 형상의 운동성과 대비된다. 서로 대립된 속성이 공존함으로써 효과의 상승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이동환이 그린 움직임의 연속, 그리고 시점(視點)과 강도마다 다른 공간과 인물(처럼 보이는 존재)의 양태를 한 화면 앞에서 집중적으로 볼 수 있다. 그렇게 해서 우리 몸의 운동에 대해, 우리와 공간의 관계에 대해, 나와 너의 관계에 대해 성찰할 계기를 얻는다. 삶의 순간을 기계적으로 훌륭하게 재현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보는 순간 다시 필름 속으로 사라지는 부박한 영상은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 자신과 공간과 운동을, 그 모든 것들의 관계를 보여주지 않는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들에 대해 성찰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 이러한 성찰을 유발하는 시각세계는 '회화가 주는 선물'이다. 우리는 이동환의 그림을 '헐벗은 눈'으로 보지만, 그림들은 그 헐벗은 눈에 사물의 얼굴과 우리 몸의 운동과 공간의 표정을 비춰준다. 이동환의 그림에 있어 '관념'이라는 조명이 너무 과도해지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당분간 이 세계를 한 장의 그림 안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 강수미
Vol.20051113d | 이동환展 / LEEDONGHWAN / 李東煥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