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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5_1111_금요일_06:00pm
갤러리 세줄 서울 종로구 평창동 464-13번지 Tel. 02_391_9171
벵센느 숲의 폐허로부터 획득된 나무들의 언어 ● 변연미의 작업은 1999년 프랑스를 강타했던 태풍의 흔적으로부터 시작된다. 빠리 전체가 역사상 보기 드문 피해를 입었고 가로수가 뿌리째 뽑혀나가는 거센 바람이 휩쓸고 지나갔다. 그녀는 태풍이 지나간 다음 자주 산보를 하던 뱅센느 숲을 찾았을 때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하였다. 파리의 가장 큰 숲이기도 한 그곳이 아예 숲의 형태가 사라져버리고 한순간에 벌판으로 변했던 것이다. ● 거대한 아름드리 나무들이 허리가 부러져 뒤엉켜 있었는가 하면, 작은 나무들은 상당수가 아예 뽑혀나가거나 누워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폭격을 맞은 듯한 폐허의 현장을 보는 작가의 가슴에 와 닿는 아우성은 자연에 대한 심미상태를 완전히 바꾸어놓게 된다. 그동안 인간에게 영원한 안식과 쉼터를 제공하면서 영원한 이상향의 대상이 되었던 숲들의 무한질서한 색채, 소리, 형태 등은 물론이고, 크고 작은 나무들이 처참하게 폐허화 된 장면을 보면서 문득 오늘날의 인간들이 갖는 왜곡과 오만, 생존의 비애들을 연상하게 된다.
이때부터 순식간에 황폐해버린 숲의 충격적인 이미지에서 감응된 변연미의 새로운 조형언어가 시작되었다. 그것은 문명의 비판과 현대인들에 대한 비유적 언어로서 삶의 현장을 연상케하였다. 결국 순연한 자연과 역시 동일한 자연이지만 폐허가 되 버린 숲의 변신을 보면서 상처나 전쟁, 생존경쟁과 파멸 등의 환부들로 연상되는 숲의 시리즈가 이어진다. ● 그간 한국이나 동양에서 사유나 수양 등의 대상으로 여겨져온 자연과는 전혀 다른 국면의 해석이 시작된 것이다. 곡선이 직선으로 대체되고, 자유분방하게 사용되던 색채가 절제되면서 블랙톤을 즐겨 사용하게 된다. 또한 기존에 사용하던 붓을 떠나서 가는 모래에 본드와 함께 먹물을 섞어 고무장갑을 끼고 선을 그어나가기 시작한다. 이러한 작업들은 극도로 단순화되고, 장엄한 스케일과 평소 나무가 갖는 강인한 이미지를 연상하도록 하면서 바로 그 뱅센느 숲에서 느꼈던 충격을 형상화한다.
황홀한 실루엣으로 사유와 안식의 공간이던 숲의 향연과 자연의 이미지들은 어느새 거칠고 잔혹한 신음소리만 남은 폐허로 변하게 되고 고뇌로 형상화된 화면의 공허가 있을 뿐이었다. 태풍 이후 변연미의 나무들은 이전의 색채들을 모두 제거하고 검정색 하나만으로 드로잉 된다. 그녀의 화면에서 가장 인상적인 이 검정색 나무들은 이미 나무이기 이전에 폐허를 상징하면서도 직선에서 나타나는 의지의 병립을 내포한다. ● 그녀의 이러한 변화는 1994년 파리에 처음 건너갔을 때 시도했던 꽃과 나무, 이름 모를 새들과 자연의 소리 등이 오버랩 된 자연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완전히 변화된 새로운 면모를 구축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분명 고독한 외국생활에서 체험하고 목도한 일상의 일들에 대한 삶이나 작가와 사회, 사회와 예술이 갖는 이중적 괴리 등에 대한 비망록으로서 나타나는 소재로서도 일단의 의미가 내포되었다는 것은 당연한 추론이다. ● "황폐한 숲은 나에게 모든 것을 보여 주었다. 삶의 처참한 현장을 가르쳐 주었으며, 함성을 지르며 경쟁하는 전쟁터와도 같은 현실의 슬픔을 맛보는 듯하여 참으로 오랫동안 뇌리에서 떠나지 않고 각인되었다." 당시 그녀는 이와 같은 작업노트를 남기고 있다.
변연미를 파리에서 만난 것은 한 6여 년 전의 일이었다. 마침 그 태풍이 막 지나간 다음 이어서 거대한 가로수들이 누워있는 길들을 지나 찾아간 그의 작업실은 도도히 흐르는 아름다운 파리근교 뻬로 쉬르 마른느의 마른느강변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미 그때부터 6년간을 여전히 직선으로 이어지는 나무만을 고집해온 변연미의 작업은 고집스러우리 만큼 단순해진 화면으로 나타나면서 외침과 침묵이 교차한다. ● 다시 2005년 여름, 새로이 옮겨간 수와지 르 루아의 작업실을 방문했을 때 1천호 정도의 대작들이 빽빽한 스튜디오에서 이번 전시에 출품된 블랙톤의 나무에 흠뻑 빠져있는 그녀의 화면을 보게 되었다. 자연을 말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크기의 스케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는 그녀의 집착은 상당한 무게를 싣고 있었다. ● 이번 첫 번째 국내 전에서 보여주는 그녀의 작업은 이 중 일부의 작업들로 구성되었고, 문명과 인간, 생멸해가는 인간성에 대한 항변과 비판으로 이어지는 숲의 의미가 있다. 그러나 그녀의 이번 작업에서 직선들의 교차가 반복되어지면서 다소의 관념성이 드러나게 된다는 점과 각 시리즈마다 긴 터널을 걸어가는 호흡방식 등은 풀어나가야 할 과제로 제기된다. ● 11년간의 파리생활이 갖는 독특한 삶의 체현과 지금 이 시대에는 귀한 그녀의 작업에 대한 일관된 의지에 기대가 적지 않다. ■ 최병식
Vol.20051113a | 변연미 회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