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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5_1109_수요일_05:00pm
갤러리 토포하우스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4번지 Tel. 02_734_7555 www.topohaus.com
연기(演技)하는 영상 - 이종교배와 유니크 테크놀러지 ● 그 주체가 예술가든 과학기술자이든, 예술적 목적을 위해 동원되는 기술들은 대체로 산업화될 만큼 실용적이지 않으며, 어떤 특별한 목적에 의해 특별하게 통합된 유니크 테크놀러지(Unique Technology)라는 특징이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세상에서 아주 드물거나 하나밖에 없는 경우가 많다. 또 이 기술은 어떤 창의적인 인간에 의해 특이한 모습으로 만들어져 세상에 나와서 '예술작품'으로 남지만, 그 기술로서의 가치는 바로 사장(死藏)되거나 일종의 돌연변이 혹은 변종(變種)으로서 뮤지엄에만 남아있는 것이 보통이고, 아주 드물게는 세상을 지배하는 신종(新種)이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19세기말의 뤼미에르 형제는 자신들이 만든 시네마토그래프(cinematographe)가 당시에 유행하던 수많은 영상장치 중의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했었지만, 그것은 결국 20세기 영상기술의 표준이 되었고, 그 유전자는 현대의 기계에도 역역히 남아있다. ● 유니크 테크놀러지는 때때로 무척 원시적이고, 거의 무모할 정도로 기존의 미디어에 기생하며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폐품을 재이용하기도 하고, 그 기술이 가진 패러다임을 뛰어넘어 엉뚱한 연결을 시도한다. 김형기는 이와 같은 폐품을 '오브제'라고 부르고 있는데, 버려진 기계를 새롭게 발견하게 된 동기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기계물에 대한 수동적 인위적 애정은 부패한다. .... 비인간적이라는 편견 그러나 편의주의, 피해의식 그러나 피차 소비주의가 갖고 있는 모순의 불륜. 복제 사생아들은 도시의 뒷골목에 쉽게 버려진다. 그때부터 기계구성물은 오브제(objet trouve)가 되어 버린다. 이 소외(疏外)가 그 메카니즘들을 오브제화 한 동기이다. (작가의 작업노트에서)
즉 일단 버려지고 잊혀진 후에 그 의미는 재발견되는 것이다. 작가 김형기가 쓰는 '이종교배(interbreeding)'라는 용어가 낯설지 않은 것도 이런 까닭에서이다. 발견된 오브제가 마치 초현실주의 회화에서처럼 전혀 엉뚱한 조우(遭遇)와 전개를 보이는 일도 습기찬(moist) 밀림에서는 일상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주로 로우 테크(low tech)지향성을 기반으로 하이테크를 역습하는, 거의 해킹(hacking)에 가까운 영역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예술가는 딱딱하고 건조한 기계들의 도시를, 거름냄새 가득하고 기묘한 변종들이 우글거리는 밀림으로 변화시키는 존재가 아닐까? ● 시네마토그래프, 아니 더 거슬러 올라가면 원근법, 혹은 캔바스가 사용된 이래로, 프레임을 경계로 한 가상과 현실의 대립은 이원론적인 세계관의 전형으로서, 가상공간을 하나의 '대상(對象)'으로 보게 하는 시각의 틀이기도 했다. 그런데 예를 들어 비디오설치작업에서는 '대상으로서의 가상공간'이 현실공간과 융합되고 그 사이에 새로운 공간을 창조함으로써 영상미디어예술은 훨씬 다양한 리얼리티를 탄생시킬 수 있게 되었다. 영상과 설치구조물 사이에는 가상과 현실이라는 두 세계 사이의 상호교류가 행하여진다. 즉 설치된 구조물은 영상의 연장선상에서 읽혀지고, 영상 속의 가상공간 역시 현실공간과의 관계를 통하여 읽혀짐으로써, 가상과 현실이 혼합된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 중간영역, 즉 인터스페이스(inter-space)에서는 리얼리티의 재편성이 행하여지고 이에 따른 새로운 의식이 재현된다. 즉, 이 경계상의 새로운 공간에서는 가상도 현실도 아닌, 혹은 그 두 가지를 모두 포함하는 리얼리티의 체험이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양상은 20세기 후반에 설치형식으로 발표된 비디오아트, 혹은 미디어아트에서 자주 보여지는 공간적 특질이기도 하다.
김형기의 작업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측면이 바로 이미지와 현실공간의 인터액션이다. 이전의 그의 작품 「N.E.O.S. 북동서남」, 「black hole」, 「Orbite de la Revolution」, 「Kinetic Video눈보라」, 「inter-dire」(서로 말하다), 「불기 souffle」, 「空 電 机 圖 Rev vol lu tion」, 「We are the Robots」등 일련의 작품을 보면 이러한 경향은 잘 나타나 있다. 그리고 최근에 공연예술에서 영상에 의한 공간연출이 중요성을 더해가고 있는 데, 영상의 가상성(virtuality)와 현장성(actuality)의 만남과 몰입, 상호작용은 멀티미디어 설치작업의 연장선상에서 보면 그 흐름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것 또한 김형기의 입장에서 보면 '가상'과 '현실'과 같은 전혀 이질적인 것들의 만남과 포옹, 상호작용과 변형 그리고 새로운 창발(創發)이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즉 일종의 '이종교배'일지도 모른다. 어떤 영상미디어가 세상에 등장하고, 예술가들이 그것을 이용하면서 자신의 창작을 위한 수단으로 '변경'시켜나가는 프로세스라는 측면에서 이 경우도 유니크 테크놀러지라고 아니할 수 없다. ● 이처럼 김형기의 '발견을 위한 여행', '해킹', 그리고 '이종교배'는 그의 정열적인 천성이 그러하듯이 그야말로 종횡무진이다. 이번에 선보이는 그의 'cylinder reflected video'는 19인치 모니터 위에 실린더 거울이 부착된 것으로 이것은 박물관에 있는 19세기의 애너모픽(anamorphic) 광학기구가 부활한 모습이다. 또 자기 자신이 다른 시간대의 흡사한 영상과 겹칠 때 일어나는 우연과 필연의 경계 - 데자뷰, '임산부 마네킹'에 작가의 몸 이미지가 마치 새로운 피부처럼 투사(projection)되어 마네킹의 빙의(憑依)인지, 아니면 이미지(즉 작가 자신)의 부유인지 모를 상황이 벌어진다. 원래는 과학도였던 이 작가가 배합해내는 이 모든 이종교배가 늘 새로운 생명체를 낳는 것은 아니다. 그 만남을 완결 짓는 것은 대부분 관객의 몫이고, 그의 작품은 인식의 노동에 게으르지 않은 관객의 머릿속에서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이원곤
Métissage_ 이종교배를 통해 열리는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 ● 다름. Difference. ● 다름은 새로움을 낳을 수 있는 힘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아직도 다름에 그리 친절한 것 같지 않다. 여전히 우리는 삶속에서 만나는 익숙하지 않은 '다른 것들'에게 호의적이지 않다. 우선 뒤로 한걸음 먼저 물러서거나, 끌어안기 보다는 밀어내고 보자는 식이다. 다른 것에 거리두기_일상의 우리 모습이다. 이 점에서 김형기는 좀 '다르다.' 그의 시선은 늘 '다른 것'에 닿아 있는 듯하다. 개인전을 앞두고 보내온 그의 작품들에는 유학시절 겪었던 커뮤니케이션의 단절이나, 낯선 환경에서 고립된 개인으로의 경험들이 이제 거의 보이지 않았다. 아니 그러한 경험들이 좀 더 새로운 관점에서 표현되었다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언뜻 보기에 서로 다른 것들을 병치시킴으로써 여전히 커뮤니케이션의 맥락을 짚고 있는 듯도 하지만, 다름에 대한 그의 기본 태도의 변화는 작품 전체의 방향을 새롭게 전보다 훨씬 '긍정적'으로 끌고 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종교배라는 뜻의 "Métissage"라는 타이틀에 묶인 그의 작품들은 좀 더 커다란 문맥에서 이해해야 할 듯 하다. 먼저 그가 바라보는 다름에는 늘 닮음이 들어있다. 예를 들어 3대의 LCS 모니터를 안에 있는 각기 다른 인물들이 마주보게 되는 순간 모핑이 되는 「레플리콘(Replicon: 유전인자)」이라던가, 자기 자신이 다른 시간대에 있었던 비슷한 영상과 겹쳐지게 되면 천천히 플레이가 되는「데자뷔」는 다른 인물 혹은 다른 시간 대 안에서 찾아지는 유사성에 집중해있다. 다시말해 우리가 다르다고 이야기하는 것 들 사이에서 간과되어온 닮음을 주목하고 있다. 이는「이중주(Duo)」에서 더 적극적으로 표출된다. 언뜻 보기 닮았으나 음색이 다른 가야금과 거문고가 실린더 형 거울을 이용한 설치작품들과 만난다. 그리고 그 안에서 마주보고 연주되는 가야금과 거문고라는 서로 다른 두개의 악기의 소리는 새로운 가능성으로 하나의 하모니를 이룬다.
이번에 소개되는 작품들이 한 부류가 다름 안에 있는 비슷함을 찾아내고, 그를 바탕으로 새로운 하나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면, 또 다른 부류는 조작하여 원래의 상태를 바꾸어 만들어낸 '다름'을 통한 커뮤니케이션, 다시 말해 연결 가능성에 대한 것들이다. 이러한 특징이 잘 드러나는 작품이 「돔」과 「레이어 윈도우」이다. 먼저「레이어 윈도우」의 경우 작가 인위적으로 백라이트를 제거한 LCD 모니터와 터치스크린으로 만들어진 이 작품은 관객이 스크린을 만지면서 검정 바탕을 천천히 지워나가면서 바깥쪽 풍경을 보게 하는 작품이며, 「돔」은 LCD 모니터 위에 광섬유 다발을 붙여 LCD 모니터에 나타나는 영상이 광섬유다발을 거쳐 가면서 새로운 영상으로 보이게 만든 작품이다. 억지스럽다 싶을 정도로 장비를 부수고 '망가뜨려서' 그는 서로 다른 세계를 만든다. 전시제목처럼 그야말로 "이종교배"인 것이다. 익숙하지 않은 세계와 소통하지 않을 것 같은 세계를 작가는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두 개의 세계가 즐겁게 화해하고 소통하게 만든다. 그것은 새로운 세계의 열림이다. 그가 열어주는 세계의 열림은 또 하나의 이종교배에서도 적나라하게 들어난다. 미디어아트 작가로서 다른 장르들과의 협업은 꿈이기도 하지만, 사실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미디어아트의 언어와 무용의 언어, 공연의 언어는 예술 언어라는 측면에서는 비슷하지만, 그러나 각기 고유한 언어가 있기 때문에 상호간의 커뮤니케이션은 생각보다 훨씬 어렵다. 많은 미디어아티스트들이 이러한 협업을 꿈꾸지만, 아직 많은 성과물이 안나오고 있는 것이 아마도 이런 점을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겠다. 그 점에서 김형기는 '다르다.' 전시장에서 그를 볼 수 없었던 얼마동안 학교에서, 공연장에서는 어렵지 않게 그를 볼 수 있었다. 서대문 형무소 공연에서, 서울 프린지 기획 프로젝트에서 서울과 프랑스를 실시간으로 연결했던「Performance ZeroII」, 그리고「Rain Songs」, 「박노해 노동의 새벽」에서 그는 미디어아티스트가 아닌 아트 디렉터라는 이름으로 나타났다. 무용과 공연, 전시 등 이리저리 넘나들면서 보여주는 다양한 활동은 아마도 서로 다른 세계 사이의 소통에 대한 그의 바램이 투영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예술이 일상에서 볼 수 없는 세계를 열어보여주는 기능을 하기 때문에, 지금도 예술이 우리에게 유효한 것이라면, 그의 작품 역시 유효하다고 볼 수 있다. 낯선 것들 사이에서 익숙함을 찾아내고, 익숙한 것들을 낯설게 만들고 그 낯섦이 서로 화해하게 하는 것. 예술이라는 멋들어진 핑계가 없이 우리가 만나기 힘든 세계임은 분명한 것 같다. ■ 신보슬
Vol.20051110c | Metissage_디지털 퓨전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