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환

이은정 회화展   2005_1108 ▶ 2005_1114

이은정_밤12시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2×130cm_2005

초대일시_2005_1108_화요일_06:00pm

한우리 갤러리 서울 강남구 도곡동 948-1번지 Tel. 02_3462_9191

유아기적 상상 ● "작가는 어렸을 적 병치레가 잦았다. 유쾌해야 했던 유년기 기억의 한 귀퉁이는 나쁜 물이 옮아 회색으로 물들어 버렸고, 건강해진 지금도 가끔씩 그때의 증후에 대해 기억해내곤 한다" ● 이은정의 작업은 다분히 성장기에 지배적이었던 우울한 감성의 에세이이다. 수풀사이로 돌연 등장한 덩치 큰 삐에로는 나선형 나무들을 양쪽에 두고 점점 부풀어 올라 당장이라도 그 사이에 꽉 끼어버릴 기세다. 출렁거리는 건물들이 흐물흐물하게 서 있는 마을 초입에도 금새 쪼그라들 것 같은 음침한 아이가 길을 가로막고 서있다. 이러한 도상들의 구성은 얼핏 보아도 신경쇠약의 단서로 쉽게 읽혀질 수 있다. 이내 파란하늘에 태양을 닮은 계란 후라이가 떠 있고 구름은 솜사탕 마냥 포크에 끼워져 있다. 산은 생일 케잌이 되어버리고 허공엔 진통제가 박혀있다. 약기운의 몽롱한 상태, 그리고 어린아이의 가벼운 환상의 일시적 쾌적함은 여과된 것 없이 읽혀진다.

이은정_Princess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41×32cm_2005
이은정_지상 최대의 집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45.5×112.2cm_2005

작가는 유아기적 상상의 상징적 대체물들을 명료한 색면으로 배치해나가면서 과거 심리의 긴축과 이완 과정을 알기 쉽게 풀어내 버린다. 내러티브와 심리적 기호들은 있으나 절제된 색채구성으로 인해 표현주의적 몰입이 없기에 썩 명료한 Pop적 접근이 가능하리라 기대하게 될지 모른다. 그러나 이내 아무것도 명료하게 읽지 못하고 입을 다문 불쾌한 회색 얼굴과 대면하고 만다. 작가의 언발란스한 모티브와 표현 방식이 관객에게는 의아하기만 하다. 그녀의 그림은 조형적으로 극히 명료하지만 막상 읽으려고 하면 읽혀지지 않는 모호하고 아이러니한 회반죽 같다. 유아기적 상상의 유희인 듯, 던져진 그녀의 이야기는 어린이의 무늬만을 표방한 이미 다 커버린 어른의 악몽같은 것이다. 작가의 내적으로 누적된 상흔은 기호로 환원되기에는 너무 무거운 지층을 타고난 것이라 형식에 쉽게 용해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고통스러운 암호를 혼자 읊조리기보다 내적으로 누적된 갈등과 상처의 상흔을 성인의 눈으로 박제시켜, 대중기호로 내뱉어 버리는 방법을 선택했다. 이는 극히 사적인 생채기를 쉽게 봉합해 버리려는 현대인의 애처로운 몸짓이며, 그것을 대면하는 이에게 소통의 단서는 주지만, 그림을 읽는 이를 결코 도달하지 못할 미궁으로 빠뜨려 버린다. 관객에게 헐값으로 되팔아 버린 불온한 감성은 작가 자신에게 일시적 치유의 대용품이 되어준다. 그것은 사이비 무당의 현란한 푸닥거리를 관람하여 안정을 얻는, 혹은 얇은 종이에 붉게 박힌 부적의 도상을 은밀한 곳에 품으며 안심하는 일시적 자기치유와 닮아 있다. 자신의 과거 시점으로의 여정은 건조한 색채로 덤덤하고 태연하게 상연된다. 작가는 때로는 삐에로가 되고, 때로는 퀭한 몰골의 공주가 되어, 쉽게 환원되는 기호로써, 자기 자신을 위해 굿을 하는 무당이 되기를 자청한다.

이은정_환각 상태에 빠진 삐에로Ⅰ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162cm_2005
이은정_환각 상태에 빠진 삐에로Ⅱ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53×73cm_2005
이은정_몽상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38×46cm_2005

개인사적 감성을 거리낌 없이 'Kitch'적 대용품으로 사용하는 작가의 무심함과 대범함은 어디서부터 출발하는 것인가. 아마도 그녀의 작업은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명확히 잡히지 않는 사적 trauma까지도 '단순한 향수'로 환원할 수 있다는 키치적 신앙에 근접해 있을지 모른다. 포스트모던 이후 '표상가능성'에 대한 포기와, 표상 자체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명확한 재현에 관한 낙담과 냉소를 우리는 익히 들어 알고 있다. 그것과 맞닿아 있는 키치적 소모의 정신적 가치는 결국 소통을 포기하고 상징과 코드에 전착하여 부유하는 새로운 감성을 낳았음이 분명하다. 이은정의 작업은 이러한 신인류적 감성이 증식하고 있는 시대에서 대면하게 되는 기존 키치 예술의 또 다른 변종이라고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충분히 흥미롭다. 앞으로의 작업이 앞서 말한 화두에서 어떤 선로를 밟아나갈지 주목하고 싶다. ■ 박정원

Vol.20051108c | 이은정 회화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