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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5_1103_목요일_05:30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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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양, 삶을 세척하는 주검들 - 'REQUIEM' ● 예술가들의 감각촉수는 대체로 동시대를 관통하는 시대정신을 겨냥하고 있다. 이때의 시대정신을 형상화한 것이 리얼리즘 미학이다. 그러므로 리얼리즘은 항상 당대적으로 재정의될 수밖에 없는 현재진행형의 개념이고 열려진 개념이다. 현대미술의 밑바탕에는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자기반성의 계기가 깔려 있으며, 이로부터 리얼리즘 미학의 실천논리를 이끌어낸 것이 상황주의와 신사실주의 그리고 팝아트다. 이 가운데 상황주의자의 논리는 미디어가 초래한 변화된 삶의 질을 코멘트 하는 식으로 나타난다. 상황주의자는 전에 없던 온갖 미디어의 등장으로 인해 삶의 풍경이 스펙터클 소사이어티 즉 구경거리의 사회로 변질되었음을 직시한다. 그러니까 일상과 영화 속 장면을 동일시하는 한편, 고도로 인공화된 세트 속에서 사람들은 일상적인 삶을 마치 연기하듯 살아가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신사실주의자들은 용도 폐기된 채 버려진 공산품 쓰레기더미들로부터 동시대의 리얼리티를 본다. 그렇게 폐타이어와 폐플라스틱 등의 온갖 산업 쓰레기들은 정크아트 즉 쓰레기미술이라는 이름으로 미술의 문맥 속에 등재된다. 그런가하면 팝 아티스트들은 물질적인 풍요를 대변하는 한편, 소비 지향적인 사회를 관통하는 아이콘들에게서 당대적인 리얼리티를 본다. 일회용 문화, 인스턴트 문화, 자판기 문화로 형용되는 이 아이콘들은 그대로 천민자본주의의 속물근성을, 그리고 무엇보다도 물신주의(페티시즘)를 드러낸다. 이성이 소유하고 있는 물건을 이성 자체와 동일시하는 한편, 정신적인 가치를 사물화하는 페티시즘은 그 이면에 자본주의의 욕망을 숨기고 있다.
황순일의 전작(1999~2001)은 이런 상황주의와 신사실주의, 그리고 팝 아티스트들의 세계 인식에 접맥돼 있다. 전작에서의 온갖 잡지와 미디어로부터 발췌해온 사진 전사 이미지들이 자본주의 사회를 관통하는 욕망의 메커니즘을 보여준다. 그 속에서 여성의 몸은 성적 욕망을 자극하는 상품의 형태로 제시되며, 캔과 같은 일회용 물건들이 소비를 자극한다. 이는 물질적인 풍요와 더불어 그 이면에 가려진 인간 소외를 엿보게 한다. 작가는 이 아이콘들을 용도 폐기된 것들과 동일시하는 한편, 이로부터 변질되고 사라져 없어질 욕망의 덧없음을 보는 것이다. 이 코멘트는 실제로 그림 속에 삽입된 '변질'이라는 문자 텍스트로 나타나 있으며, 또한 스피커의 이미지를 통해서도 재차 변주되고 있다. 그러니까 그림에 등장하는 스피커가 감각적이고 쾌락적인 자본주의의 욕망을 상징하는 동시에, 그 욕망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라는 이중적인 의미를 함축한다. 즉 욕망의 부질없음과 덧없음을 경고하는 일종의 메신저로서의 상징적 의미를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근작에 와서 이런 욕망과 그 욕망의 덧없음에 대한 경고는 새로운 형식을 띠게 된다. 전작에서의 욕망이 주로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자기 반성적 계기와 같은 사회학적 맥락과 관련되었고, 이를 형상화하는 방법 또한 자본주의 사회의 각종 미디어로부터 발췌해온 사진 전사 이미지를 통해서였다. 그러나 근작에서는 욕망의 외적으로 드러나 보이는 아이콘 대신에, 욕망의 보다 내재화된 형태(내면화된 형태)에 주목한다. 욕망을 자본주의 시대의 삶의 질을 결정하는 요소로서만 한정하기보다는, 인간의 보편적이고 심리적인 성향의 한 형태로까지, 존재론적인 자기 인식의 한 형태로까지 확장시킨다. 말하자면 작가의 근작에서의 욕망은 그대로 실존적 인간의 한 조건으로서 나타난다. 그리고 그 이념을 전달하는 데 있어서 방법론 역시 종래의 사진 이미지를 차용하던 것에서 극사실의 회화적 표현으로 바뀌었다. 흔히 사진 이미지가 실물을 닮아 있는 탓에 메시지를 더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 각종 미디어를 통해 생산된 이미지는 피사체 본래의 사물성을 희석시키고 추상화시키기 때문이다. 오히려 작가의 근작에서처럼 사물을 극사실의 회화적 표현으로써 재현할 때 그 대상이 처음의 사물성을 상당정도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그 표현 방법을 바꾼 이면에는 이미지의 이러한 한계를 간파한 작가의 인식이 놓여 있다.
극사실의 회화적 표현으로 나타난 근작(2002~)은 일종의 정물화의 형태로서 현상한다. 그 소재는 낡은 구두처럼 버려진 물건들이거나, 일간지 뭉치처럼 일회용 물건들로부터 시작된다. 이 소재들은 말할 것도 없이 일상에 대한 작가의 코멘트를 함축하고 있으며, 따라서 작가의 의식이 일상사회학에도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허나 작가의 정물화는 일상에 대해 코멘트를 할 때보다는, 전통적인 정물화 중 특히 바로크 시대의 바니타스 정물화를 재해석할 때 더 설득력을 얻는다. 예컨대 먹다 만 감, 토마토, 호도, 마늘, 양파, 레몬 등의 각종 채소,과일류를 소재로 한 그림들은 정물화의 어원을 거의 직접적으로 떠올리게 한다. 즉 정물의 어원은 움직이지 않는 사물, 죽은 사물을 뜻한다. 그 말속에는 원래는 살아 있던 어떤 존재의 주검이라는 의미가 내재돼 있다. 그러니까 엄밀하게 정물이란 살아 있는 존재, 생명력 있는 존재, 유기체에 해당하는 개념인 것이다. 이런 사실들은 작가의 근작이 존재론적인 인식에 연계돼 있음을 알게 해준다. 그 속에는 삶과 죽음, 삶의 충동과 죽음의 충동, 에로스와 타나토스가 서로 맞물려 있는 인간의 오랜 관념(알레고리)의 씨앗이 들어 있다. 작가의 그림에서 이는 욕망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그 욕망을 억압하는 계기로 나타나기도 한다. 금기와 터부로 나타나기도 하고, 그 경계를 넘어서는 위반과 일탈의 경향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황순일의 정물화는 외적으로는 마치 부동의 형태를 보는 듯 정적으로 보이지만, 실상 그 이면에서는 욕망의 이런 이중적이고 양면적인 의미들이 서로 싸우는 동적인 과정을 내포하고 있다.
황순일의 그림들 가운데 그 중심이 되는 것은 아무래도 각종 육류를 소재로 한 그림들일 것이다. 칠흑 같은 어두운 화면을 배경으로 그려진 살코기가 인간 내면의 심리적인 풍경으로 전이되는 듯하다.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어둠이 무의식의 심연을 연상시키는가 하면, 그로부터 드러난 살코기는 고대로부터 전승돼온 희생제의를 떠올리게 한다. 고깃덩어리는 말하자면 개별 주체에게 내려진 사회적 선고이거나, 공공연한 린치와 폭력, 제단에 올려진 희생양을 상기시킨다. 모든 건전하고 정상적인 사회가 공공연하게 희생양을 요구한다는 이율배반적인 사실과 함께, 우리 모두는 그 공모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여기서의 제단(그림에서의 바닥)은 성소 즉 신에게 바쳐진 성스러운 장소와 동격이다. 이 성소를 위한 심리적 장치를 극대화하기 위해 한줄기 빛이 동원되고 있다. 어둠 속에서의 그 가녀린 빛으로써 작가는 고깃덩어리로 나타난 희생양을 영적이고 성스러운 존재와 연결시킨다. 이로써 세속적인 욕망으로 더럽혀진 존재가 죽음을 통해 세척되고 정화된다. 그러므로 제단에 올려진 희생양은 죽음을 제식화한 종교의 상징적 장치들, 통과의례와 정화의식을 떠올리게 한다. 한편으로 도살된 동물들의 주검은 바니타스(인생무상)와 함께 특히 메멘토모리('죽음을 기억하라')의 경구를 전달하기 위한 일종의 죽음의 메타포로서 도입된 것이다. 이 도살된 주검의 이미지들에서는 죽음에 바탕을 둔 암울한 비전과 함께, 그로테스크와 컬트에 바탕을 둔 인지 부조화 현상(상식을 넘어서는 파격과 충격 요법)을 느끼게 한다. 세속적인 삶에 대한 도덕적인 경고를 넘어, 거의 원죄의식에 맞닿아 있는 존재론적 단죄(죽음을 통해서만이 정화될 수 있는)를 느끼게 한다. 작가는 여기서 더 나아가 살코기와 함께 게의 주검을 소재로서 도입한다. 그 몸으로부터 즙이 나오고, 이때의 즙은 썩고 부패하는 유기체의 생리를 암시한다.
이렇듯 황순일의 그림에 나타난 죽음은 오히려 살아 있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죽은 것들이 암시하는 경고 혹은 메시지가 죽음이 아닌 삶을 향해 있기 때문이다. 죽음에 견줄만한 강도의 절실함으로써 삶이 세척되고, 정화되고, 거듭나야 함을 역설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경험이 도덕적인 차원을 넘어서는 존재론적인 차원, 전인적인 차원에서 행해져야 함을 말해준다. 더불어 작가의 그림에 나타난 스피커는 그 경고를 반복 재생산하는 죽음의 서곡인 레퀴엠을 상징한다. 그리고 덧없는 존재들을 위로하는 들리지 않는 소리, 내면의 소리, 침묵의 소리를 상징한다. 황순일의 그림은 '자신의 생명을 다른 생명에게서 얻어 왔다는 생명의 끔찍한 진실'에 진저리치는 프란시스 베이컨(그의 이름 베이컨은 돼지고기를 뜻한다)의 지독한 자의식을 연상케 한다. 삶의 욕망이 권장되는 이 세속적인 시대에다가 오히려 죽음의 욕망, 성(聖)적인 욕망, 영적인 욕망을 들이미는 작가의 그림은 그만큼 새롭고 신선한 감동으로서 다가온다. ■ 고충환
Vol.20051103a | 황순일 회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