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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효갑 회화展   2005_1019 ▶ 2005_1025

나효갑_The face_종이에 파스텔_73×54cm_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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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5_1019_수요일_06:00pm

인사아트센터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8번지 Tel. 02_736_1020 www.ganaart.com

뇌문(雷紋)의 도(道) ● 길은 굽이굽이 펼쳐진다. 산 사이에는 골이 있다. 우리의 이성은 직선으로 달리는 고속도로처럼 세상을 재단하지만 세상은 '뇌문(雷紋)의 도'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불가의 만(卍)자는 그런 세상의 이치를 상징적으로 잘 드러내는 이미지이다. 올라갔으면 내려가야 하고 왼쪽으로 틀었으면 곧 오른쪽으로 되돌려야 한다. 나효갑의 붓끝은 그 길항(拮抗)의 원리를 따라 움직인다. ● 나효갑은 공대 출신이다. 처음부터 화가가 될 마음을 먹었던 것은 아니다. 무언가를 골똘히 바라보고 감상하는 것을 좋아해 학창시절 도서관의 미술도서를 모두 섭렵하면서 점점 화가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게 되었다. 졸업 뒤 한동안 자동차 회사에서 일하고 캐나다 이민을 꿈꾸다가 무역회사에 다니며 세계 각지를 돌아다녔다. 종내는 뉴질랜드로 유학을 떠났다. 그곳에서 그는 미술을 본격적으로 공부했다. ● 애당초 유목민의 피를 타고났다고나 할까. 그는 현실에 안주하기보다는 끊임없이 자신의 가능성과 한계를 시험하는 스타일이다. 그렇게 강줄기처럼 굽이굽이 펼쳐져 온 그의 인생길은 어쩌면 일찌감치 그의 예술의 방향을 잡아주었다고 하겠다. 그의 그림에 뇌문이 많이 등장하고 술병과 술잔의 이미지, 0과 ∞, α와 Ω 등의 기호나 글자가 종종 등장하는 것은 이와 관련이 있다. 빛이나 전파는 파동으로 움직인다. 사인 코사인 곡선도 이와 닮았다. 그림을 그리려 붓을 놀리는 행위 또한 지그재그에서 시작한다. 그의 그림은 산만 바라보지도 않고 골만 바라보지도 않는다. 산과 골을 다 아우른다. 그것은 무한대(∞) 곧 영원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부재(0) 곧 유한함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처음(α)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끝(Ω)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물론 남자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여자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나효갑_Landing_캔버스에 아크릴 채색_60×73cm_2003
나효갑_Yesterday_캔버스에 아크릴 채색_112×146cm_2003

술병과 술잔이 어우러진 그림들에서 우리는 남자와 여자의 이야기로 우주의 이야기를 듣는다. 병은 술을 비워내야 하는 운명이다. 잔은 술을 받아야 하는 운명이다. 하지만 둘 다 그 술의 진정한 주인은 아니다. 술은 술병과 술잔을 쥔 이의 입으로 들어간다. 그는 신이다. 산의 주인은 산이 아니며 골의 주인은 골이 아니다. 남자의 주인도 남자가 아니며 여자의 주인도 여자가 아니다. 세상에 음과 양이 있고 남자와 여자가 있고 '+'와 '-'가 있고 산과 골이 있는 것은 모두 신이 정한 것이다. 신은 이 모든 길항 에너지의 운동 속에서 스스로를 구현하고 성취한다. 단지 신이 보이지 않기에 우리는 우리가 세상을 움직인다고 생각한다. 내가 세상을 움직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이미, 우리는 우리의 주관에 따라 능동적으로 사는 게 아니라 의식을 지배하는 힘에 의해 수동적으로 사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무의식은 의식을 움직인다. DNA는 개체의 행동 양식을 이미 정해 놓았다. 스위치를 잡았다고 "불은 내가 켜는 것"이라고 말하면 곤란하다. 불은 배터리, 전기가 켠다. ● 물론 그럼에도 인간에게는 꺾을 수 없는 자유의지가 있다. 그 스스로가 세상의 기원은 아니지만 세상의 기원과 맞닥뜨릴 수 있는 의지를 지니고 있다. 나효갑이 중학생 시절 영화 '빠삐용'을 보고 강한 충격을 받은 것은 그 자유의지의 위대한 힘을 생생히 목도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에게 인간의 자유의지와 신의 절대의지가 만나 빚어지는 생의 모든 신비는 영원한 예술적 호기심의 대상이자 열정의 수원지일 수밖에 없다. 그는 그 신비를 파헤치고 표현하는 데서 희열을 느낀다. 그 신비는 진정 가깝고 일상적이면서 또 아득하고 초월적이다. 그는 그의 그림에 그 일상적인 표정과 초월적인 표정을 모두 담아 놓았다. ● 스타일 면에서 보면 나효갑의 그림은 매우 표현주의적이다. 표현주의의 영어 이름 expressionism에서 우리는 밖(ex-)으로 밀어붙이는(press) 힘의 존재를 느낀다. 뭐든지 몸으로 부대끼기를 좋아하는 나효갑이 이런 표현주의적 에너지를 선호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렇게 그려진 그의 그림은 그 기를 우리에게 끝없이, 강렬하게 발산한다. 거친 붓길의 뇌문들이 울림을 더해주어서일까, 그의 그림이 전해주는 에너지의 파장은 만만치가 않다. 흔히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건이 발생했을 때 왜 "큰 파동이 일어났다"고 표현하는지 새삼 되새기게 하는 그림이다. 그의 예술은 그렇게 오늘도 힘차게 굴절하고 반사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빛의 파동을 따라, 강의 파동을 따라, 그리고 세상의 파동을 따라. 그 파동에 우리 마음을 싣고 같이 흘러보는 것은 매우 유쾌한 경험이 아닐 수 없다. ■ 이주헌

나효갑_Energizer_캔버스에 아크릴 채색_116×73_2004
나효갑_Wave_캔버스에 아크릴 채색, 유채_55×33cm×9_2004

Escape to Ecstasy in VVVVVVV ● 나의 삶과 그림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두 단어가 있다. "Escape"와 "Ecstasy"다.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림을 그리는 과정은 무엇을 그려야겠다는 것을 머리 속에서 상상의 그림으로 그린 다음에 그것을 그린다. 다음에 일부 그려놓은 것을 보고 눈으로 비교하고 다시 거기에 덧붙여서 그림을 그린다. 이러한 과정의 연속이다. 때로는 그냥 손가는 대로 그린 다음에 그 그림을 보고 거기에 어울리게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그것도 참 재미있다. 여하튼 그림은 손으로 그린다기보다는 눈으로 그린다고 할 수 있다. ● 세상을 살면서 많은 것을 보고 경험하고 느끼고 상상한다. 그 느끼는 과정의 상당부분을 머리 속의 영상으로 본다. 사물이나 사건을 어떻게 느끼느냐가 내 머리 속의 영상을 어떻게 만드느냐를 결정한다. 어린 시절 생각이 난다. 교회에서 목사님이 말씀하시길 설교하는 연단은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기 때문에 올라가면 큰일 난다고 하셨다. 나는 혼자 많은 상상을 했고 머리 속에 많은 영상을 만들어 보았다. 연단에 손을 대면 손이 잘릴까? 연단에 올라가면 벼락이 내리칠까? 목사님도 절대 앉지않는 하나님의 자리인 중앙 의자에 앉으면 내 몸이 폭파 될까 하는 등 여러 가지 상상을 며칠동안 하게 되었다. 결국 몇 달 후에 아무도 없는 교회에서 모험을 감행하였다. 연단에 손을 대보고, 올라가보고, 중앙 의자에 앉아 보았다. 그리곤 급히 내려왔다. 세계는 하나가 아닌 것이다. 아니 개개인 각자가 최소한 하나의 세계를 갖고 있는 것이다. 같은 주제를 갖고 서로간의 대화를 하는 동안조차도 정신은 각자의 가치관이나 이해 관계에 따라 서로 다른 세계를 헤맨다. 사람들은 세상을 보고 느끼는 시각을 각자 다르게 갖는 것이다. ● 나에게 세상을 보는 방법을 가르쳐 준 중요한 몇 가지 일들이 있다. 고등학교 시절에 읽은 "콜린 윌슨" 의 『아웃 사이더』이다. 그 책에서 "세상을 벽 구멍으로 본다"는 글을 읽고 큰 충격을 받았다. 무척 외로운 이야기이다. 세상 속에 있지 못하고 세상 밖에서 세상을 보는 것은 큰 외로움이면서, 큰 도전이기 때문에 또한 마음이 설레기도 했다. 그 책을 읽은 후 사람들이 거실에서 모여서 먹고 마시고 노래 부르고 많은 대화를 할 때 혼자 조용히 불 꺼진 빈방에 들어가서 열쇠 구멍으로 거실을 본다는 것 그리고 지구의 밖에서, 아니 신이 만든 세상 밖에서 세상의 막을 조금 찢어내어 그 틈으로 보려 하는 것, 그것은 외롭지만 해야 할 일인 것처럼 점점 느꼈다.

나효갑_Journey with wave_캔버스에 아크릴 채색_146×112cm_2004
나효갑_Wave_캔버스에 아크릴 채색_146×112cm_2005

세상의 밖으로 나가는 행위는 "Escape"이다. 지금의 모든 것에서 탈출하는 것이다. 빠삐용은 수용소 섬을 탈출했다. Escape은 단지 도망이 아니며, 영역의 이전이다. 또한 에너지의 이동이다. 현재의 여기보다 더 좋은 다른 곳이 없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다른 곳으로 가는 것, 갈 수 있는 것, 즉, 「빠삐용」의 스티브 맥퀸이 바다에 누워서 말한 "I am free"라고 말 할 수 있는 순간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 6.25 전시에 북한을 탈출한 아버님은 기반이 없는 남한에서 잘 살기 위해서 장남인 나에게 서울대에 입학해서 법관이 되야 한다고 어린시절에 많이 말씀하셨다. 장남이며 장손 격인 나는 부모에겐 항상 모범적인 자식이며, 동생들에겐 본 받을 만한 형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부담으로 잠재의식 속에 자리 잡았던 것 같다. 기술이 있어야 돈을 벌고, 그러자니 공과 대학을 가게 되었다. 잘 맞지 않는 공부를 했지만, 또 다른 세계에 대해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전기 공학과에서 배운 전계와 자계는 또 다른 새로운 시각을 갖게 만들었다. 맛도 없고 보이지도 않고 무게도 거의 없는 이 신비한 전기, 자기는 신이 운영하는 빛과 같이 힘의 또 다른 상징이다. 학과 공부를 하면서 그 에너지를 상상하고 영상으로 느끼며 나의 세계를 유영하곤 했다. 회사를 다니면서도 나의 정신은 자주 그런 상상의 세계로 탈출을 하곤 했다. ● 그러다가 결혼을 했다. 여자, 여자는 남자와 다른 신비의 세계를 갖고 있다. 여자는 나를 유혹하고 또 다른 세계로 인도한다. 일상에 있지 못하게 하고, 자기가 만들어 놓은 신비의 세계로 끌고 가려고 한다. 결국 나의 숨겨진 정서를 끌어내고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말을 실토하게 했다. 그 여자가 나를 자극하고 움직이게 했다. 그 대가로 유학을 하면서 몇 년을 헤어져 살아야 했다. 아버님이 바라던 세계를 탈출하게 된 것이다. 습관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상에 혼자 섰다. 오랜 습관과 헤어져 지내는 것은 너무나도 외로운 일이다. 전에 다니지 않았던 곳에서 전혀 다른 일로 다른 사람을 만나고 다른 말로 대화하고 다른 도구를 쓰며 다른 습관을 만들었다. 습관은 달라졌지만 머리로 그리던 세계를 일상으로 조금은 옮겨왔다. 일상의 세계와 정신의 세계가 조금은 중복 되는 것이다. 하던 일이 달라졌다. ● 에너지의 이동은 일을 만든다. 빛을 발하며 짜릿함을 안겨준다. "Ecstasy" 란 단어를 생각하게 한다. 우리는 가끔 행복하다. 가끔 짜릿하다. 행복은 지속성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전반적으로 긍정심을 갖을 수는 있지만 행복한 순간이란 말이 있듯이 느끼는 건 순간이다. 굶는 시간이 있고 맛있는 것을 먹는 순간이 있다. 대화중에 공감하는 짜릿한 순간이 있다. 생명이 있는 한 맥박은 뛰며, 시간은 똑딱거리고, 해변의 파도는 철썩거린다. ● 귀국 하기 전에 강렬하고 아름답고 아무도 없는 바다에 갔다. 커다란 갯바위가 원시 상태로 널려있고 웅장한 구름이 바다를 누르고 그 힘에 힘찬 파도가 밀려와 하얀 거품을 뿜으며 무지개를 만드는 그 바다에 서 있었다. 그 바다에서 태평양을 바라보면서 바닷물을 느꼈다. 구두를 적시던 물이 무릎에 차고 배에 올라오고 가슴을 적실 때 나는 Ecstasy를 보았다. 목까지 물이 올라올 때 파도에 반사되는 여러 가지 빛을 통하여 파도, 구름, 물 속에서 유영하며 정적의 Ecstasy를 느끼는 나의 영혼을 보았다. 젖은 몸으로 차에 올라 그 바닷가를 떠나면서 여러 영혼, 우주, 신의 크나큰 사랑을 느꼈다. 이러한 순간을 나의 에너지로 안고 있다. 이 에너지를 순환시키는 것이 나의 할 일이다. ● 이 글은 오늘 쓴 글이다, 내일 글을 쓴다면 또 다른 글이 될지도 모른다. 모든 역사가 시간에 따라 주기적으로 움직이지만 그 주기 속에서 어제의 음악이 오늘은 다르게 느껴지는 것처럼 내일은 조금은 다른 심리를 갖게 될 것이다. 아무튼 음악이 듣고싶다. 그 음악의 멜로디를 헤엄치며 또 다른 꿈을 꾸고 싶다. 또 다른 심리의 세계로 가 보고싶다. 또 다른 그림을 그리고 싶다. ■ 나효갑

Vol.20051019a | 나효갑 회화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