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생명을 알까?

노진아 개인展   2005_1007 ▶ 2005_1110 / 월요일 휴관

노진아_R1007세포덩어리_혼합매체, 인터렉티브 가변설치_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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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5_1007_금요일_05:00pm

갤러리 정미소 서울 종로구 동숭동199-17 객석B/D 2층 Tel. 02_743_5378 www.gaeksuk.com

노진아는 인간처럼 말을 하고 감정을 표현하는 기계들과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기계화되어 가는 인간들이 서로를 '질투'하며 또 지향하는 아득한 여정을 그려왔다. 세 번째 개인전인『그들이 생명을 알까?』展에서는 그간의 문제의식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기계들이 얻게 된 유기체적 '생명'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기계의 인간화 가능성과 그들의 자기증식과 생존의 방식을 생물학적 실험의 기록과도 같은 작품들을 통해 그려 보임으로써, 인간과 기계의 관계 그리고 인간 주체에 관한 우리들의 고정관념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된 이번 전시는 기계인형 오브제와 다큐멘터리, 사진, 비디오 등으로 이루어져있다. ● 전시장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우리를 맞는 것은「구모델」이라는 인터랙티브 설치작품이다. 쓰레기 더미 속 사이보그는 머리와 팔다리가 흩어진 채 놓여있다. 이 작품 앞의 조이스틱을 관람객이 조작하면 주어, 동사, 목적어가 랜덤하게 조합된 말을 하며, 눈과 입을 움직인다. 그러나 관람객이 자리를 떠나면 작동이 멈출 것 같았던 사이보그의 머리는 자신이 다시 구모델이자 용도 폐기된 다른 쓰레기들과 같이 버려졌음을 쓸쓸하게 말한다. 좌측 벽면에는 과학적인 실험의 기록자료처럼 보이는 사진들이 걸려있다. 「기형생산: 머리분열」,「머리와 목의 절단: 배양전」,「머리와 목의 절단: 배양후」,「외형 틀 뜨기-겉가다 실리콘 작업」등의 사진들은 작품인 다큐멘터리「HD 3090/ R 1007의 번식에 관하여」의 제작과정 중 주요장면을 담고 있다.

노진아_구모델_혼합매체_인터렉티브 가변설치_2005

사진 작품을 지나면, 기계인형이자 Cybernetic Organism의 한 종(種)인 HD 3090과 R 1007의 증식 과정을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작업「HD 3090/ R 1007의 번식에 관하여」를 만나게 된다. 마치 생명의 신비를 다룬 자연과학 다큐멘터리와도 같은 이 작품은 다큐멘터리가 갖는 진실성이라는 전제를 역이용한 모큐멘터리(mockumentary)이다. ● "HD 3090은 Cybernetic Organism 의 한 종으로써, 크기는 약 20 cm정도이고, 전기가 제공되는 어느 곳에서나, 서식하고 개체증식을 할 수 있는 제법 생존력이 강한 사이보그이다. HD 3090은 기어 다니거나 서서 머리와 몸을 흔드는 등의 동작을 하며, 갖가지 시끄러운 소리를 내거나 주변의 소리나 동작을 인식하는 기능이 있다. 하지만 HD 3090은 너무나 시끄럽기 때문에 소리와 주변 인식 기능을 제거한, 새로운 모델인 R1007을 제작하였다. 그 외의 기능은 모두 같으므로, R 1007은 HD 3090의 증식을 위한 실험에는, 최적의 조건을 갖춘 종자라고 할 수 있겠다." -작가노트 중에서 ● HD 3090은 원래 레디메이드인 기계인형 모델명이다. 이 실험적 다큐멘터리를 위해 개조된 것이 바로 R 1007인데 일반적인 인형제작 방식과 편형동물처럼 이분법을 하는 두 가지 방식으로 증식된다. R 1007은 신체 부위가 절단되어도 아픔을 느끼지 않으며 쉽게 복구되고, 인간도 언젠가는 이런 능력을 갖추게 되리라는 R 1007에 관한 인터뷰 내용은 장기이식이나 보철술에 의한 기술적 변형이 일상화된 현대 인간의 사이보그화를 떠올리게 한다. 또한 모큐멘터리답게, 작가가 제시하는 가상적 설정을 진실로 가장하는 동시에 미디어에 대한 관람객의 맹신을 드러낸다.

노진아_기형생산: 머리분열_디지털 프린트_2005
노진아_분열을 위한 실험: 자르기_디지털 프린트_2005

전시장 안쪽에는 다큐멘터리 후반에 소개된 R 1007의 특성을 시각화한 인터랙티브 설치작품인「R 1007 세포덩어리」이 줄기세포의 분화와 증식 과정을 보여주는 영상과 함께 설치되어있다. 바닥에서 꿈틀거리며 움직이는 R 1007들은 개별적으로 하나의 개체이기도 하지만, 일정 숫자의 R 1007이 모여 하나의 완성된 세포 덩어리가 되면 다른 생명체의 생명 정보를 받아 그 생명체를 재생할 수 있는 줄기세포가 된다. 아직은 끊임없이 재생중인 이 세포 덩어리들이 어떤 생명체로 모습을 드러낼지는 밝혀지지 않는다. 그러나 기계인형이 유기체만의 특권인 자기증식이라는 특질과 더 나아가 제3의 새로운 생명체로서 진화의 가능성까지 갖추게 된다는 작가의 가상적 설정은 전시 제목이기도 한 "그들이 생명을 알까?"라는 존재의 본질을 묻는 질문으로 관람객에게 되돌아온다. 여기에서 "그들"은 일견 '기계'를 지칭한다고 관람객에게 이해될 수도 있지만, 실은 진화한 기계인형 R 1007이 '인간'을 지칭한다는 '인간이 생명을 알까?'라는 양가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노진아_틀에서 빼내기_디지털 프린트_2005
노진아_실험을 위한 해부_디지털 프린트_2005

노진아는 인간과 기계의 관계를 소통이라는 측면에서 다루었던 전작들에서 더 나아가 인간 자신이 기계화되어감에도 불구하고 인간화되어가는 기계를 두렵고 낯설게 바라보던 우리의 시선을 다시 우리 자신에게 돌리고 있다. 전시의 제목이기도 한 "그들이 생명을 알까?"는 유기체에 더 가까워진 기계인형의 입을 빌어 우리에게 작가가 던지는 문제제기이기도 하다. 이러한 질문은 두렵고도 무거워 우리를 그 질문으로부터 도망치게 할 수도 있다. 더구나 노진아의 작업은 사람에 가까운 사이보그의 디테일과 흔히 볼 수 있는 아동용 아기인형을 이용해, 관람객에게 시각적으로 두렵거나 낯선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시각적 충격을 주고 있다. 이렇게 관람객이 느낄 수 있는 거리감을 노진아는 허구적으로 설정된 모큐멘터리와 인터랙티브 설치작업을 통해 극복해낸다.

노진아_R1007세포덩어리 설치장면_혼합매체_인터렉티브 가변설치_2005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는 괴물과도 같은 기계인형이라는 타자가 우리(동일자)의 속성을 공유하게 되는, 따라서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자신을 정의할 수 없을 때 우리가 느끼는 감정이 기묘한 낯설음(uncanny)이며, 이러한 경험은 타자(기계)와 자아(인간) 사이의 갈등에 자리한 우리의 의식적 방어물과도 같다고 해석한 바 있다. 또한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이 불안한 '기묘하게 낯선' 경험을 다루는 최선의 방법 중의 하나로 판타지, 소설 등의 허구에 의지해, 실재와 상상 속의 대리자를 구분할 수 없도록 함으로써 우리가 느끼는 불안을 제거한다면, 타자는 공포스럽지만 정체가 분명한 양가적 존재로 이해가능해지며 승화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같은 맥락에서 본다면, 노진아의 모큐멘터리 형식의 작품「HD 3090/ R 1007의 번식에 관하여」은 진실을 가장했지만 그 내용이 (아직은) 허구임을 분명히 하는 방식으로, 관람객이 느끼는 시각적 충격과 거리감을 최소화하고, 같은 주제의식의 변주이자 확장인 다른 작품들의 의미까지도 함께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미덕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번 전시를 통해 보여준 기계의 인간화, 인간의 기계화라는 포스트휴먼적 풍경을 더욱 적극적으로 확장시켜나갈 다음 전시를 기대해 본다. 노진아의 인간과 기계의 관계에 관한 깊은 고민의 결과물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인간 주체에 대한 고정관념을 넘어선 확장된 이해와 새로운 인식의 계기를 제공하게 될 것이다. ■ 채지원

Vol.20051007d | 노진아 개인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