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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5_1005_수요일_06:00pm
후원_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평아트센터 서울 종로구 공평동 5-1번지 Tel. 02_733_9512
우리들의 한 시대도 또 그렇게 흘러간다 ● 성태훈의 근작들은 동시대 삶의 정황을 성찰하는 폐허 그림 연작들을 물 이미지와 결합함으로써 2002년의 개인전 "역사현장-공존" 이래 지속된 폐허와 일상의 중층구조를 씻김의 미학으로 풀어내고 있다. 그것은 장구한 세월 동안 서서히 허물어진 역사유적에서처럼 시간과 공간이 응축된 폐허의 미학을 찾는 일이 아니라, 자본과 권력의 폭력적인 작동으로 단숨에 부서지고 망가진 파괴의 현장에서 동시대의 상처와 고통을 돌아보는 그림들이다. 따라서 성태훈의 폐허는 동시대의 현실을 표상하는 하나의 사물이자 사건이다. 그는 전쟁과 테러에 의해 파괴된 삶의 터전을 일상의 공간 위에 중첩하여 보여줌으로써 우리 삶에 내재화 한 폭력의 실체를 드러내고자 했으며, 이번 전시에 출품하는 최근작들을 통해서는 이 모든 상처들을 물로서 정화해내는 씻김의 마음을 담아내고 있다.
전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금융자본의 그림자는 성태훈의 폐허그림을 관통하고 있는 주요한 계기이다. 제국과 식민의 질서는 여전히 세계체제를 유지하는 강력한 틀이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안정적인 석유자원의 확보를 위한 기름전쟁이라는 점, 또는 달러에 맞서는 유로화를 석유수출을 비롯한 대외 거래의 화폐로 전환한 이라크의 결정이 주요 원인이었다는 점이 속속 드러나고 있지만, 지속적인 선악구도의 이데올로기 공세 속에서 미완의 전쟁이 이어지고 있다. 이미 지구는 금융전쟁의 전장이다. 금융자본은 정치와 경제와 군사와 문화를 넘어서는 갈등과 전쟁의 핵심적인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 성태훈의 전략은 이러한 사회 문명의 폭압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내밀하고 사적인 공간의 벽면에 전쟁과 테러의 흔적들을 새겨 넣음으로써 일상 속에 깊숙이 침범한 폭력의 단면들을 드러내는 은밀하면서도 도발적인 전략인 것이다.
점과 벽 ● 성태훈의 작업은 화면 안에 벽을 설정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는 벽과 벽이 아닌 부분을 나눈 후에, 벽으로 설정한 부분을 미점(米點)으로 메우는 것을 첫 번째 붓질로 삼는다. 이 점찍기 작업은 폐허 이미지를 예비하는 몰아지경의 행위이다. 그 점들은 연묵으로 무수히 반복되는 붓질들로 이루어져있다. 모종의 내러티브를 구사하려는 작업 전반의 전략적 준비단계에서 점을 찍어 나가는 성태훈은 점 찍는 행위 그 자체에 몰입한다. 그림을 그린다는 행위 안에 내포된 본능적인 욕망을 즐기는 것이다. 성태훈의 작업이 그림 그리는 이의 감성과 내밀한 시각언어로서의 원초적인 요소들에 충실하다는 점을 반증하고 있다. 이러한 그리기의 욕망은 점을 찍는다거나, 샤워기 호스의 동선을 구획한다거나 물줄기의 방향을 정하는 데 있어서 회화적 구성을 염두에 둔다거나, 또는 폐허 더미들을 그리며 그 속에서 붓질의 묘미를 찾아내는 등의 화가적 본능을 따라서 격정적인 유희의 세계를 유영하기도 한다. 묽은 먹으로 수 천 번 점을 찍어 내는 미점 화면은 벽 부분의 채도를 떨어트리는 역할을 한다. 물과 바닥과 사물을 제외한 미점 공간은 폐허를 그릴 벽으로 설정되어 무수한 점들이 한 번 눌러 준 흐릿한 공간으로 남는다. 성태훈은 무수히 반복되는 점찍기는 마치 폐허의 영혼들을 불러 모으는 예술적 제의와도 같다. 그 무수한 점들 하나하나에 성태훈은 전쟁과 테러에 의해 사라져간 영혼들을 불러 모은다. 그 점들 위에 그려질 형상에 의해 지워질 점들이지만, 사라져간 넋들을 기억하는 예술가적 행위로서의 점찍기는 그의 그림을 손재주만 좋은 일필휘지의 먹그림들과는 달리 동시대 삶의 정황을 예술로 끌어들이는 성태훈의 리얼리스트로서의 진정성을 파악하는 주요한 계기이다.
벽과 폐허 ● 미점으로 가득 찬 연묵의 벽 위에는 전쟁과 테러의 상처들이 새겨진다. 2001년 9.11의 쌍둥이 빌딩 붕괴 현장은 몇 년 지나서 이라크의 폭격과 테러 현장으로 전이되었다. 폐허의 건물 잔해들은 연묵의 점들 위에 그려졌으므로 명암의 극명한 대비를 강조하지 않은 채 흐릿하게 형상을 드러낸다. 때로는 농묵에 날카로운 필선으로 부서진 건물 잔해를 드러내기도 하고 연묵의 번짐으로 포연이 자욱한 폭력의 흔적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러나 성태훈의 화면에서 꿈틀거리는 필치와 기가 막힌 먹의 번짐을 들여다보는 일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극명한 대비로 명쾌하게 절벽을 그려내는 부벽준의 기억도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폐허를 그린 그의 필은 붓질의 법을 따라 붓이 가는 길을 정형화하는 따위의 갑갑한 틀거리와는 무관하게 '콘크리트준'이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벽은 벽이 아닌 부분으로 설정한 바닥의 그리드 담채에 의해 비로소 벽으로 자리를 잡는다. 물론 배경 화면은 바닥과 벽면으로 나뉘는 것이 일반적인 구도이되 전면을 폐허의 벽으로 처리하는 경우도 있다. 벽 아래 바닥의 타일은 연묵의 그리드로 남는다. 널찍하게 구획된 연묵의 직사각형들은 바닥이어도 좋고 바닥이 아니어도 좋다. 그것은 이전의 그림들에서처럼 바닥의 타일을 지칭하는 것에서 화면을 분할하는 구도에 환원하는 하나의 비지칭의 색면으로 드러난다.
폐허와 물 ● 성태훈은 물을 그리지 않음으로써 물을 드러낸다. 벽으로부터 나온 샤워기 꼭지에서 쏟아지는 물줄기는 물이 아닌 부분으로 인해서 비로소 그 형상을 갖춘다. 세면기와 샤워기가 동시에 등장하기도 하고, 샤워기 호스가 꼬여서 연출되는 유연한 곡선의 흐름이 도드라져 보이는 사워기 자체만 등장하기도 한다. 수직으로 낙하하는 물줄기가 있는가 하면, 사선으로 분출하는 물줄기, 마치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는 물줄기들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물의 형상 또는 물을 유인하는 형상들은 그려지지 않았거나 덜 그려졌다. 따라서 성태훈의 그림 속에서도 그려지지 않은 여백이다. 그러나 그것은 비어있음으로 귀환하는 여백이 아니다. 그 여백은 동시대의 가치를 담보함으로써 정치적인 의미망 속으로 그 해석의 지평을 넓혀내는 속이 꽉 찬 비어있음이다. 성태훈의 벽그림 연작의 대미는 폭포그림이다. 애초에 화장실 내부의 사물을 그리던 것에서 샤워기에서 분출하는 물의 이미지로 넘어갔듯이 폭포그림은 물 연작들을 잇는 변주의 한 형태이다. 미점 위에 폐허를 그리고 여백을 남기는 방식은 동일하다. 전통적인 산수화에서의 폭포그림처럼 그리지 않음으로써 물줄기를 형상화 되는 방식을 쓰기도 매한가지다. 폭포의 물줄기를 물줄기로 보이게 하는 것은 물줄기 자체가 아니라 그 주변의 절벽의 형상에 의해서 가능해진다. 미점과 폐허이미지를 중첩한 절벽은 그것이 절벽인지 폐허인지를 분간하는 것을 포기하게 만들 정도로 상호 침투 작용이 심화되어 있다. 아마도 다음 전시에서 주요한 모티프로 자리 잡을 것으로 보이는 폭포그림 두 점은 변주와 변주 너머의 경계선상에 서있는 작가의 변모 과정을 보여준다.
물과 서사 ● 물은 성태훈의 폐허그림을 더욱 단단한 서사체계로 구조화 하고 있다. 최근작의 물은 폐허와의 만남을 통해서 새로운 대화를 시도한다. 폐허 위에 등장하는 물 이미지의 기본 구도는 폐허의 어두운 상처를 물로써 씻어낸다는 설정에 따른 것이다. 성태훈은 폐허와 물이라는 이원적인 대립항을 통해서 어두움과 밝음, 상처와 치유의 메시지를 구조화 하고 있다. 폐허는 동시대의 상처를 드러내는 기표들이다. 물은 생명과 희망을 담은 또 다른 대안이다. 물을 통한 씻김은 동시대의 상처를 딛고 넘어서고자하는 치유의 표상으로서 상처의 치유를 갈망하는 동시대의 정신적 가치를 담고 있다. 따라서 그것은 사회적인 의미망 속에 포섭되는 정치적인 물이다. 물을 끌어들인 성태훈의 폐허 그림은 현실을 투영하는 재현적 형상회화로부터 상처치유의 메시지를 담은 제의적 형상회화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한다. 먹그림을 서정성을 표출하는 미디어로만 써왔을 뿐 구체적인 이야기를 담을 수 있는 예술적 미디어로서의 보편성을 가지는 것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은 성태훈의 그림을 보다 적극적으로 서사적인 체계가 구조화하도록 했다. 성태훈이 벽과 폐허 이미지 위에 일상의 오브제나 장면을 담는 구도는 어느덧 하나의 스타일로 자리잡아왔다. 그것은 주로 아이와 폐허, 일상 공간과 폐허의 중첩이었다. 그는 금새 굳어질지도 모르는 스타일로부터 탈출하는 방법으로 물을 끌어들였다. 성태훈은 먹이라는 매체가 자연친화적인 특성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먹은 물과 만나 종이위에서 다채로운 모습을 보이는 회화재료이다. 그는 그 먹이 가지고 있는 특성들을 서정성으로 인식하고 있다. 성태훈의 이와 같은 인식은 서정성을 가진 먹이라고 하는 매체를 서사성과 결합하겠다는 의도로 이어진다. 이것은 마치 아우슈비츠 이후에 서정시가 가능하겠느냐고 물었던 아도르노를 연상하게 한다. 전쟁과 폭력이 난무한 동시대의 삶의 지평 위에서 그 어떤 서사성도 거부하는 진공상태의 서정적인 풍경화가 무슨 의미를 만들어 낼 수 있겠느냐는 반문인 것이다.
우리 시대에 성태훈이라는 화가를 각별하게 언급해야 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가 수묵화를 서정성의 국면에서 서사성의 국면으로 전환하는 데 있다. 나아가 그의 서사성은 현실 삶의 구체적인 사실을 예술작품 안으로 끌어들임으로써 먹으로 그린 형상회화라는 예술적 '기표'와 폭력에 의한 파괴라는 '실재'를 연결함으로써 기표와 실재의 간극을 넘어서려는 포스트모던한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연일 전해지는 텔레비전 화면의 바그다드의 폭격 장면과 자폭의 흔적들을 지켜보는 것은 어느덧 일상이 되었다. 이렇듯 전쟁과 폭력에 대해 무감해져가는 우리들에게 미국의 기독교 근본주의를 비롯한 우파 담론의 비판자인 노엄 촘스키나 서구중심의 역사를 넘어서 하얀 가면의 제국을 비판하는 박노자의 신랄한 비판적 메시지들과 마찬가지로 성태훈의 폐허그림은 금융자본 세계체제의 어두운 그림자를 들춰 보여준다. 문정희는 말한다. "흐르는 것이 어디 강물뿐이랴. 피도 흘러서 하늘로 가고 가랑잎도 흘러서 하늘로 간다." 그러나 어디 그 뿐이랴. 전쟁과 폭력의 검은 손이 드리운 이 시대, 성태훈의 폐허 그림 속의 물줄기와 함께 "우리들의 한 시대도 또 그렇게 흘러간다." ■ 김준기
Vol.20051006d | 성태훈 수묵담채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