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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5_0924_토요일_04:00pm
송은갤러리 서울 강남구 대치동 947-7번지 삼탄빌딩 1층 Tel. 02_527_6282 www.songeun.or.kr
꿈을 '꿈'으로 되돌리는 기계들-1 꿈 ● 심준섭의 '기계'들은 이제 편안한 바닥에 누워있다. 중력을 버티기 위해 그동안 척추를 너무 무리하게 곧게 세워두었지만, 이제 바닥에 눕는 것을 택한다. 물론 그게 휴식이나 쉼이 아니라는 건 너무나 확실하다. 중력은 바닥과 벽을 가르지 않고 작동하므로 바닥을 택한다고 해서, 일상적 현실을 떠난 휴양지에서의 안락한 휴가는 아니기 때문이다. 차라리, 바닥은 벽보다 훨씬 많은 중력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에서 심준섭의 기계들은 현실로부터 더 많은 중압감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일상이 부과하는 과도한 압력은 쉽사리 개체를 찌그러트리고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게 하므로, 어쩌면 그는 더 어려운 길을 택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심준섭의 작업은 바닥으로 밀어닥치는 현실적 중력을 두려워하거나 회피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달게 받아들임으로써 현실이 삭제시키려고 애쓰는 어떤 모종의 실체를 제시하려고 애쓴다. 달리 말해 상투적 지식 혹은 상식이 받아들일 수 없는 세계를 제시하려고 함으로써 현실을 장악하려는 중력들에게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고 억압의 정체를 노출시킨다는 불안을 유발하게 한다. 망각되거나 삭제된 것들을 복귀시키려는 그의 시도가 벽 대신에 바닥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했던 것도 우연한 선택은 아닌 것이다. 더 많은 억압적 조건들을 받아들임으로써 억압해야만 했던 바로 그 세계로 나아가는 역설. 하지만 그것이 과연 가능하기나 할까? 현실의 과도한 억압과 구속은 항상 통증을 유발하고 꿈을 망각시키게 만들지 않던가. 가령, 잠 속에서야 겨우 찾아오는 꿈에서조차 중력을 작동시키는 것을 멈추지 않는 일상의 치밀한 억압을 고려하면 이는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마치 프로이트 박사가 주장했던 것처럼, 꿈이 빈번히 가족 로망스에 사로잡혀 꿈을 오이디푸스에게 고스란히 헌납해야 하는 궁지에 내몰리고 만다. 현실에서 불가능한 꿈을, 꿈을 통해 도달하려고 시도하는 것이 어리석거나 무위에 그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일상을 구성하는 억압기제를 모두 수용하겠다는 듯, 바닥을 차지하고 누워 있는 심준섭의 기계들이 꾸는 꿈이 도달할 행로는 너무 뻔하지 않을까? 이제 이렇게 말해야 한다. 꿈이라는 모호한 세계가 실은 한정되거나 한계지워진 몇 갈래 길로 확정되어 있다고 말이다. 즉, 꿈에 도달하기 위해서 제시되어 있는 '길'은 현실처럼 구태의연하고 상투적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시중에 값싸게 팔리는 꿈 해몽 책에는 어떤 꿈의 형태라도 분류와 유형을 통해 꿈을 규정할 뿐만 아니라 예측까지 해주니 꿈이 설 자리는 어디에도 없게 되고 만 것이 현실이다. 그럼에도 그의 꿈이 헛되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꿈은 일상적인 너무나 일상적인 드라마 내부에 포획되어 버렸으니, 꿈은 봄날 낮잠에도 찾아올 수 없게끔 구조화되어 있을 따름이다. 하지만 꿈이 완전히 이 세계의 질서에, 일상적 삶의 영역으로 휘발되어 버렸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희망은 남아 있다. 아직 부화하지 않았거나 알의 상태로 여전히 남아 있는 꿈들이, 꿈이 되기 이전의 상태로 잔존하기 때문이다. 어떤 꿈이 구체적인 형상으로 자리 잡기 이전의 상태로, 개체화 이전의 에너지로 고스란히 보존되고 있다면 사정은 달라진다는 것이다. 심준섭에게 꿈은 여전히 '알'로 남아 있으며 그 에너지 자체는 일상에 저항하는 새로운 역능으로 구성하기 위한 반복적 형상임을 알 수 있게 한다. 그의 초기작에서부터 최근작에 이르기까지 '알'은 변주를 거치기는 하지만 항상적인 형태로 보존되고 있음은 바로 이 때문이다.
2 알 ● 꿈 이전의 꿈이 형이상학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이미 현실이거나 신체적이다. 물론 꿈 이전의 꿈이 현실이나 신체와 동일한 것을 지시하지는 않는다. 다만, 현실적 꿈이 아니지만 혹은 유기체로 동일화되지 않지만 유기체가 지닌 한계를 넘어서는 역동적인 신체라고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가능성이라기보다 잠재성이라고 불러야 할, 반드시 현실화되어야 할 것으로서의 꿈, 그러나 매번 반복되지만 한 번도 현실화되지 않은 것으로서 꿈이라는 점으로 말이다. 심준섭의 작업에 꿈 이전의 꿈으로서 '알'이 반복된다는 것은 이런 문맥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의 초기 작업에서부터 꿈에 대한 문제의식은 늘 뒤따르고 있었으며 그 꿈이 일상에서 왜곡과 자본주의적 현실에 나포되는 것을 극복하게 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가 1990년에「잃어버린 길」이라는 퍼포먼스를 연출했던 것은 현실이 억압하는 꿈에 진입하기 위한 첫 번째 길이었다. 여전히 억압적 현실이 자행되던 시기였으며 루카치가 말했던 '길'이 보이지 않은 채 선언과 명령의 습속에 길들여지는 것이 더 익숙한 시절의 일종의 돌파구였던 셈이다. 길은 잃어버렸지만 사실 그때부터 길은, 일방통행로가 아니라 사이 길과 틈새 혹은 골목길이, 동시에 양방향으로 사방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자본주의적 현실이든 그것에 저항하는 것이든 간에 시스템은 목적에 알맞은 형식이나 형상들을 제외하고는 모조리 삭제하거나 배제했으므로 길은 자연스레 잃어버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잃어버린 길을 탐색한 것은 꿈으로 진입하기 위한 방법으로 긍정된다. 같은 해에 연출한「찾는 길」이라는 퍼포먼스도 마찬가지이다. 잃어버린 길이 걸음을 떼기 위한 시도였다면 찾는 길은 보다 능동적인 방식으로 길을 모색하는 것이다. 그러나 퍼포먼스에 동원한 오브제들은 길을 모색하기보다 길을 모색하려고 할 때마다 침투되는 방해물들을 연상시킨다. 그래서 긴 원통형으로 세워진 흰 기둥과 속이 보이게끔 원형으로 만든 철근 기둥이 양쪽에 서 있고 그 사이에 잡동사니들로 채워지면서 보이지 않는 원통과 원형 기둥 어느 쪽도 길이 될 수 없음을 역설한다. 따라서 이 작업 이후에 그가 「무속」(1991)을 연출하게 된 것은 우연한 일은 아니다. 길에 도달하기 위해 그는 비약을 감행해야만 했는데, 현실이 멸시하고 무시했지만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는 무속적인 형식만이 꿈에 밀착할 수 있는 방법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무속의 세계는 비약을 할 수 있게 해줄지언정 그것이 현실적 방법으로 동원되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신체에 갖가지 색을 입히고 당산나무를 세워두고 그 주위를 맴돌아보아도 그 세계는 여전히 어둠의 영역이었지 빛의 형식이 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무속의 형식을 통해 그는 애벌레의 껍질을 헤치고 나오지만 여전히 무속의 세계 속에서만 껍질을 헤쳤지 현실적 힘을 획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른 힘을 통해 현실을 극복하는 것이 다시 그 현실로 복귀해야만 한다는 것을 무속은 언제나, 놀랍게도 논증해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무속의 경험은 그 경험 자체의 에너지를 지니지 못하고 일상적 현실 내부에 녹아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꿈」(1991)은 그가 최초로 꾼 꿈에 해당한다. 그 꿈은 미약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지만 이후 그의 작업에 일관된 형식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바닥에 여러 장으로 이어붙인 캔버스는 아무 것도 없지만 이전의 퍼포먼스와는 달리 전적으로 신체의 힘에 의지하는 장으로 기능하고 있다. 비닐 속을 뚫고 나오는 상징적 행위와 함께 캔버스 위는 에너지가 집합하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는데, 세계 내에 있으면서 동시에 세계와는 다른 에너지가 활성화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망각되고 지워진 꿈이 생성되기 시작하는 징후가 이 작업에서 포착되고 있는 것이다. 「1+1=0」(1992)에서 두 에너지가 만나 전혀 새로운 차원인 '0'의 지대로 나아가려는 시도가 행해지는 것은 우연으로 취급될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자연수 두 개의 합이 전혀 새로운 에너지로 생성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이 작업에서는 물풍선이 사용되는데 이 물풍선이 바로 에너지의 발생장치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두 항의 합의 결과가 전항과 후항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합의 결과를 나누어도 앞의 두 항으로 귀속되지 않는 전적으로 다른 세계를 구상한 이 퍼포먼스에서 그는 '알'을 생성해낸다. 물론 이 '알'이 어떤 에너지와 접속해서 어떤 방식으로 기관화될지는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그는 부화되어 나온 결과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은 확실하다. 중요한 것은 '알'이 생성되었다는 데에 있다. 즉, 에너지의 집합이 구성되었다는 것이고 여기에 잠재적 에너지들이 가득해 있다는 것이다.
3 기관에 저항하는 신체들 ● 하지만 알을 생성했다고 해서 모든 것이 알로 되돌아가지는 못한다. 현실은 알의 상태로 복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이 '알'을 사회적 목적에 알맞게 부화시키기 위해 갖은 억압을 자행할 것임은 명백하다. 규정되지 않고 정의되지 않은 상태의 에너지는 현실을 두렵게 할 것이고 잠재적인 차원에서 언제든 현실화될 에너지는, 마치 노동자의 힘처럼 현실적 권력에게 두려움을 안기기에 충분한 것이지 않는가. 심준섭의 작업에서 알의 형상이 지속적으로 등장하지만 그 알이 매번 변주를 거듭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요컨대 그는 에너지를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의 문제로 작업을 진행할 때마다 고심해야만 했다는 것이다. '알'은 아직 기관으로 분화되기 이전의 상태이기 때문에 어떤 것이라도 될 수 있는 에너지의 상태이다. 1991년의 설치작업에서 좌대 위에 올려 져 있는 인물의 형상에서 진액이 흘러내리고 신체의 각 부위가 알아보기 힘들게 일그러져 있는 것은 기관화된 신체를 다른 방식의 에너지로 구성하기 위한 전략적 포석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성숙한 인간의 형태를 유지하면서도 성숙한 이미지를 탈각시키는 그 작업은 태반 속에 웅크리고 있던 어떤 신체가 갑작스레 그 태반이 찢기면서 떨어져 내린 듯한 인상을 준다. 그 인물상이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노출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심준섭은 그 이유를 해명하기 위해 신체를 낱낱의 신경조직으로 분해하는 작업에 착수한다. 신체의 형상을 그대로 보존하면서 신체를 감싸고 있는 세포와 신경조직, 혈관조직 모두를 분해하고 태반으로부터 떨어져 내려온 그 인물 형상을 해부하는 것이다. 도살장을 연상시키는 그의 1992년 설치작업은 서둘러 기관을 갖추어야만 했던 인물상의 실패를 다시 면밀히 분해함으로써 에너지를 다시 응집시키려고 시도하는 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다. 신체의 표피를 '포'를 떠서 펼쳐놓은 작업도 이와 다르지 않다. 물론 이 작업이 편안하게 진행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함께 보여주기도 한다. 사각의 틀 속에 감금된 신체가 분해될 수 없도록 기워져 있는 것은 생체정치학을 구사하는 사회적 시스템이 신체를 철저히 목적에 알맞게 봉쇄하도록 하는 조처를 의미한다. 틀 바깥으로 나오려는 신체의 부분들은 그래서 온전한 형상을 지니지 못하고 왜곡되거나 너덜너덜하게 잘려지고 만다. 틀 내부에 있는 신체 역시 사실은 마찬가지 운명에 처한다. 몸 구석구석을 강력하게 기워 놓은 것은 틀 내부에 있을 때조차 신체를 자유롭게 운위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체는 거의 박제되어 틀 속에 규정되고 고착화되어 미이라가 되고 만다. 따라서 신체는 신체로서 기능을 거세당한다. 1993년 설치작업에서 심준섭은 독특한 '알'의 형상을 제시한다. 좌대의 일부가 벗겨져 있고 거기에 복잡한 회로도가 새겨져 있는데, 그 좌대 위로 기계장치가 알을 떠받치고 있다. 기계장치와 접속한 알은 금이 가 있고 그 틈으로 또 다른 기계가 돌출된다. 그는 좌대에 노출되어 있는 회로도의 명령에 따라 알을 부화하는 '기계장치'를 형상화한 이 작업에서 '알'이 어떻게 기관화하는지를 명백하게 보여준다. 에너지를 욕망으로 생산하지 못하고 기계에 의해 '기관'을 구성해내는 장면을 포착한 것이다. 기관으로 구성된 에너지는 욕망을 생산하지 않고 욕망을 재현하게 될 노정에 처하게 되고 만다. 욕망을 회로판 위에 이미 있었던 것에 불과하다는 것. 심준섭의 설치작업에서 두상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데, '뇌'는 신체를 기관으로 분화한 후 다시 유기체로 통합하는 기능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1993년의 작업에서 머리가 잘려진 인물상이 앉은 상태에서 벽에 낱낱의 조직들이 분해된 형상이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뇌는 신체의 각 부위를 제어하고 통합하는 일종의 '체'로 기능하면서 신체가 사회적 질서가 허용하지 않는 욕망과 조우하는 길을 금지한다. 따라서 그에게 뇌는 표상과 다름없다. 이 때문에 두상을 따로 떼어냈음에도 불구하고 두상을 제거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형상들은 신체의 기관임을 강요당한다. 그래서 1994년의 설치작업에서 그는 뇌가 교체 가능한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지만 이는 욕망을 생산할 수 있는 의미로 나아가지 않고 욕망이 철저히 제한된다는 의미에 더 근접해 있는 듯하다. 돌무덤 위에 올려 져 있는 두상과 벽에 걸려 있는, 십자가에 교수형을 당하는 인물상이 각각 세 개가 설치되어 있는데, 중앙에 설치된 인물상을 제외한 양편의 인물상은 머리를 교체하면서 곧바로 화석화해버리고 가운데 인물은 순교한 듯 고개를 가로로 떨구고 있다. 이는 돌무덤 위에 놓여 있는 두상으로 교체되지 않은 인물임을 암시하는데, 뇌를 표상의 그물로 마름질하지 않은 것임을 지시한다. 양편의 인물상이 시들고 말라버리는 데에 비해 가운데 인물상이 그래도 밝은 채색이 되어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하지만 곧 그 인물상도 양편의 인물과 마찬가지로 에너지를 강탈당하고 신체는 '흡성대법'을 쓰는 사회적 시스템에 의해 소진될 운명에 처하고 말 것이다. 그럼에도 일련의 작업들은 여전히 신체가 사회적 시스템에 전적으로 포섭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지점을 확보하고 있다. 신체를 유기체로 환원하려는 시스템의 치밀한 기획에 전적으로 신체가 스스로 저항하며 기관화되지 않은 '알'을 보존하려 한다는 것이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욕망의 무궁동이라 할 수 있는 알의 상태를 신체 내부에 지속시킬 수 있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이 사회가 신체의 각 부위를 분화했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섬세하게 신체를 장악함에도 신체를 분화하는 혹은 기관화하는 바로 그 순간 신체의 부분들은 오히려 자율적인 기관이 됨으로써 표상의 강력한 지침으로부터 자율성을 획득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1995년의 설치에서 신체의 이미지는 박제된 신체의 이미지를 극복한다. 즉, 박제된 신체로부터 떨어져 나온 기관은 스스로 다른 신체로 변주되기 시작한다. 좌대 위에 놓여 진 두상이 해골로 표현되거나 돼지머리가 나타나 있는 것은 이런 점에서 비롯된다. 또 전봉건의 두상이 나타나기도 하는데, 이는 생체정치가 신체를 감금함에도 불구하고 억압을 뚫고 솟구쳐 오르는 잉여에 다름 아니다. 두상=뇌는 곧 해골로 전락한다. 곧, 신체가 표상을 위반하는 것이다.
4 기계장치들 ● 1996년의 작업에서부터 심준섭은 알을 적극적으로 다시 사유한다. 기관으로 전락하고 말았던 신체의 각 부위들은 알의 형태로 전복되어 나타난다. 시스템의 절차에 따라 운동하던 신체기관은 알 속으로 역행하는 사건이 생성되기 시작된다는 것이다. 대도시의 건물인 듯한 좌대 위에 놓여 있는 알의 분화과정을 네 개로 형상화한 작품은 사실 분화과정의 역순으로 보아야 한다. 물론 이는 퇴행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은 지적해 두어야 한다. 이전의 작업에서 박제된 신체의 이미지를 통해 신체의 각 기관이 기관으로부터 극복됨으로써 욕망을 다른 방식으로 구성할 여지를 획득했으므로 신체는 곧 알이 된다. 욕망을 재현하지 않고 생산할 수 있는 직접적 계기를 마련하게 된 것은 바로 이 지점으로부터이다. 신체 위에서 건물이 솟구치기도 하고 인물들의 복부 가운데 알의 형태로 둥근 형태가 박혀 있는 것은 신체가 자율성을 획득하고 있다는 징표이다. 물론 알 그 자체로서는 욕망을 생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작업에서 보았듯이 알의 상태는 또 다시 기관으로 전용될 위험이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사회적 코드는 알을 언제나 기관으로, 유기체적 신체로 변주할 가능성이 잠복하는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어쨌든 이 시기의 심준섭의 작업에서 나타나는 인물들의 형상이 명백한 이미지가 아니라 원형(圓形)을 띠는 것은 신체를 기관화하는 사회적 시스템을 벗어나기 위한 일종의 장치였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사각형의 그리드로 한정되어 있던 좌대에 그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나뭇가지로 표현된 선이 생성되기도 한다. 1997년의 설치에서 인물에 대한 표현에서 신체의 외피를 감싸는 옷에 대한 표현이 빈번해지는데 이는 옷이 신체를 현실 속에서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매개체로 작동해서이다. 즉, 옷은 신체를 감싸지만, 신체보다 더 과잉된 신체의 이미지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신체를 기관으로 한정하는 데에 보다 유용한 장치인 것이다. 강철갑옷으로 표현된 작품의 한 가운데에 석재 오브제의 알을 박아 넣은 것은 신체를 기관으로 규정하는 현실적 시스템을 붕괴시키는 행위이며 뿐만 아니라 옷조차 알로 변주하려는 획기적인 방법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럼에도 이는 아직 불분명하다. 알의 상태로 존속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면 신체든 옷이든 그것을 기관화 이전의 상태로 되돌리는 것만으로는 욕망이 생산되기는 어렵지 않을까? 심준섭이 오래전부터 매달렸던 꿈 이전의 꿈이 고작 유아적인 퇴행으로 복귀하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닐까라는 의심은 충분히 가능한 문맥을 확보한다. 다시 말해, 재현의 욕망이 아니라 생산의 욕망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욕망을 현실화하는 장치를 필요로 하게 된다는 것이다. 유아적 퇴행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층위에서 욕망을 생성하기 위한 어떤 장치의 필요성 말이다. 이 때문에 심준섭은 기관이 아니라 기계를 고안한다. 일상적 재현원칙에 흡수되지 않으면서 사물의 속성을 변주시키는 방식을 배울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기계는 단순히 어떤 힘을 전달하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보다 근본적인 층위를 의미한다. 예컨대, 입이 가슴과 만날 때 섹스-기계가 되고 악기와 만날 때 음악-기계가 되지만, 각각의 기관들과 만나기 이전의 '입'은 이전의 입과는 다른, 어떤 것으로도 규정될 수 없는 '입'이다. 어떤 에너지의 흐름을 어떻게 절단하느냐에 따라 입은 달라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에너지의 흐름을 어떻게 절단하고 채취하느냐가 보다 중요해진다.
욕망의 흐름을 절단하고 채취하는 방식들을 적절히 보여주는 기계장치를 고안한 것도 필연적인 수순인 셈이다. 하여, 심준섭은 신체를 기계들의 집합으로 전도하고 신체를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다. 다양한 에너지의 흐름 가운데 소리를 채택한 것은 그의 개인사적인 이유에서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소리는 침묵의 지대를 구성한다는 점에서, 혹은 신체가 가청할 수 있는 영역이 가시계보다 훨씬 좁다는 점에서 에너지의 보다 근본적인 층위로 이해되었을 것이다. 심준섭에게 소리는 모든 것이지만 현실적인 소리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재현의 욕망을 줄이고 기계와 에너지의 접속과정에서 드러나는 새로운 욕망을 구성하기 위한 조처이다. 2000년부터 시작된 기계장치의 고안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의 주된 관심사항이다. 일련의 설치작업들은 2002년까지 신체의 형상을 지니지만 이후에는 신체의 이미지를 폐기하고 기계를 보다 중요하게 취급하는 것으로 축을 이동한다. 가령, 2001년의 설치작업 가운데 머리 부분을 스피커로 바꾸고 신체의 각 부분을 절단하고 소리를 발생시키는 호스와 연결해서 스피커에서 소리가 흘러나오도록 설치한다. 즉, 인간의 뇌가 재현할 수 없는 소리를 표현함으로써 기계들의 집합으로서 신체를 형상화낸다. 물론 아직 신체는 인간적 한계 위에 놓여 있음으로 해서 인간의 형상을 닮은 기계장치들로 분배된다. (2002년 이전까지 그의 작업은 소리의 반응에 천착한다. 이후부터 그의 작업은 순환이라는 주제로 옮아간다.) 심준섭은 기계들을 분배하면서 동일한 에너지의 흐름만으로 소리를 생성하려고 하지 않는다. 소리를 발생시키면서 동시에 물방울을 열에너지의 흐름 속에 노출시키거나 이를 보존한다. 스피커 위에서 운동하던 소리와 물과 열은 들끓으면서 순수한 에너지의 흐름으로 이행한다. 사실 그에게 스피커는 소리를 발생시키는 장치이면서 동시에 '귀', 소리를 듣는 장치라는 점에서 욕망이 중층적으로 얽혀 있다는 것을 이미 암시해주고 있다. 요컨대, 소리는 나오는 것이면서 동시에 들리는 것이다. 따라서 스피커가 뇌로 바뀔 수 있는 것은 소리가 기계의 두 측면인 듣기와 말하기를 동시에 수행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적으로 다른 두 욕망을 뇌가 그러한 것처럼 철저히 그물로 거르거나 억압하지 않고 그저 에너지의 흐름에 내맡기는 스피커는 그의 작업의 가장 핵심적인 기계로 이해된다. 스피커에 접속하는 다양한 흐름들은 흐름으로 긍정하면서 각각의 부분에서 작동하는 자율적 시스템이 일으키는 소리를 파동과 열로 전환시키려는 그에게 기계장치는 망각되거나 사라진 꿈을, 꿈을 생산할 수 있는 계기임에 틀림없었을 터이다. 욕망들이 중첩되는 기계를 통해 생체정치가 통제하는 욕망의 재현으로부터 한 걸음 넘어서기 위한 포석으로. 하지만 여전히 인간적 신체의 형상이 남겨져 있다는 점에서 소리 발생장치는 사회의 시스템이 부과하는 질서의 논리를 함유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게 만든다. 수직적 설치를 주로 구성하던 심준섭에게 수평적 설치방식이 요구되었던 것은 이런 점에서 기인한다. 수직적 구성이 중력을 비켜나간다면 수평적 설치는 중력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기 때문에 굳이 인간적 형상을 보존할 필요도 없으며 에너지를 신체적 기관에 알맞게 구성할 여지도 없다는 것이다. 수평적 구성에서는 그저 에너지의 반복되는 순환이 있을 뿐이며 이 반복은 동일한 흐름으로 규정될 수 없게 작동된다. 스피커 위에서 물방울은 규정할 수 없는 방식으로 진동하고 있으며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와 함께 다른 에너지로 전이된다. 가청계와 가시계를 혼란에 빠뜨리며 에너지는 규정할 수 없게 된다. 그의 작업을 따라가면, 욕망이 현실적 논리로부터 비롯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확실하다. 재현의 욕망에 시달리며 사회적 시스템이 부과한 욕망의 코드들에 몸을 끼워 맞추지 않아도 욕망은 충분히 생성될 수 있다. 결핍과 부정으로부터 욕망을 구성하려는 꿈이 확산되어가는 현실에서 욕망을 생산하기 위해 기계장치를 고안해낸 심준섭의 작업들은 긍정적인 욕망의 회로를 모색하고 생성하려 하려는 것이 그의 작업의 핵심적 층위일 터이다. 꿈을 꿈으로 되돌리는 기계장치를 통해 가청계 너머로부터 흘러나오는 소리와 에너지에 공명할 때가 온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흔들릴 때이다.
5 보론; 이명(耳鳴) ● 심준섭은 독일 유학시절 이명증에 시달렸다고 했다. 하지만 그의 작업의 내적 논리대로라면 그의 증세는 어쩔 수 없었다기보다 필연적인 방식으로 그의 몸이 받아들인 독특한 능력들로 보인다. 다른 소리를 생성하면서 동시에 듣는 그의 귀는 누구도 듣지 않거나 못하는 소리들을 섬세하게 잡아냄으로써 이를 에너지로 전이하는 데에 성공한 작가인 셈이다. 그러나 그의 이력은 이력으로 남겨두어야만 한다. 그것은 사적인 경험으로 보존해둘 필요가 있는데, 왜냐하면 이명증이 사회적 함의를 획득하기에는 너무 헐겁기 때문이다. 그의 작업에 일관되게 흐르는 내적 논리가 꿈과 관련된 길고 긴 투쟁의 시간이라고 하더라도 실상 꿈을 방해하거나 저해하는 지배적 힘들은 너무 빈약하게 표현되어 있어서 그것이 정말 저항적 힘들을 생성할 수 있는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겨둘 수밖에 없다. 물론 그는 곧 소리에서 물로 작업세계를 옮길 것으로 예견되지만, 소리에서 물로 이동했다고 하더라도 그의 작업들이 욕망을 새롭게 생성하는 선분들로 구획되어 있을까라는 의문이 공소해질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즉 예술의 맥락뿐만 아니라 사회적 맥락을 동시에 함유하기 위해서, 그의 이명은 보다 사회적 차원으로 확대될 필요가 있고 사회적 배치를 상상할 수 있게끔 증폭될 여지를 마련해야만 한다. 그가 힘들게 도달한 기계들은 이제 사회적 배치와 맥락을 경유하면서 보다 풍부해져야만 소리가 풍성해지고 반드시 말해져야 할 소리들을 송출시키고 들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그의 작업은 배제되고 억압된 욕망들과 적극적으로 조우해야 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또 다른 이명이나, 동성애, 노동자 등등의 정치적 소수자들과 말이다. 무엇보다도 그의 작업이 보다 활성화될 수 있는 장과 접속하는 것이 필요할 테지만. 그래서 이제 들어보자. 당신들의 귀 속에서 침묵이 진동한다. ■ 김만석
Vol.20051001b | 심준섭 설치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