木山 - Distance

신치현 조각展   2005_0922 ▶ 2005_1001 / 일요일 휴관

신치현_소나무_아크릴_75×75×75cm_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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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5_0922_목요일_05:00pm

아트포럼 뉴게이트 서울 종로구 신문로2가 1-38번지 내자빌딩 1층 Tel. 02_737_9291 www.forumnewgate.co.kr

디지털 이미지와 회화적 조각 ● 모델링 기법으로 그려진 고전주의 회화에는 입자가 없다. 단지 매끄러운 표면이 있을 뿐이다. 이후 인상주의 화가들의 중첩된 터치는 이미지가 사실상 무수한 입자들의 집합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는 각각 인쇄매체 이미지의 망점들로서, 전자매체 이미지의 광점(빛에 의한 자기발광성의 색점)들로서, 디지털 매체 이미지의 격자(픽셀)들로서 진화한다. 이는 세계의 단위 원소, 모나드, 단자에 대한 인식에 연이어져 있으며, 또한 그 자체 화가들에게 일종의 유사 과학적인 구실을 제공하는 계기가 된다. ● 신치현의 작업은 이러한 디지털 매체 시대에 있어서의 이미지의 정체성을 대변해주는 격자에 대한 인식과 맞물려 있다. 즉 격자들의 집합으로 나타난 평면 이미지에다가 3차원의 입체적 형상을 부여한 것이다. 작가의 작업은 엄밀하게 디지털 이미지, 영상 이미지에 대한 문제의식에 맞닿아 있는 만큼, 회화와 조각의 경계를 따지는 식의 장르적 특수성 논의에서 벗어나 있다. 그 형상은 마치 커서로 단 한차례 클릭 하는 것만으로 형태가 무너져 내리거나 해체되거나 변형될 것처럼 그 실체가 희박한 모니터상의 이미지를 보는 듯하다. 여기서 어떤 이미지가 단위원소(격자)들의 집합으로 이뤄져 있다는 인식과 함께, 더 나아가 이미지와 관련한 시각방식 자체는 전통적으로 화가들의 문제의식에 속한다(이에 반해 조각가의 문제의식은 상대적으로 형태와 공간 개념에 기울어져 있다). 따라서 이를 조각으로 풀어낸 작가의 작업은 정통적인 조각의 개념으로는 범주화하기 어렵다. 오히려 그 이면에서 조각과 회화가 맞물려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평면과 입체, 이미지와 형태, 이미지와 물질, 시각적 경험과 촉각적 경험이 서로 스며있다. 지금까지 흔히 회화적인 조각으로 일컬어졌던 부조와는 또 다른 형태(말하자면 환조 같은)로 회화적인 조각을 실현하고 있는 것이다.

신치현_북한산_소나무_120×400×300cm_2005
신치현_팔_아크릴_75×15×10cm_2005

신치현의 근작들은 일종의 풍경을 연출하고 있는데, 북한산을 입체조형의 미니어처로 재현한 것이다. 이는 사실에 근거하여 이를 그대로 축소한 것인 만큼 실재의 북한산과 똑같을 수는 없으나 상당정도의 근사치에 가깝다. 그 속에 실측에 바탕을 둔 정교하고 치밀한 과정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이를 위해 작가는 나무 각목을 접합해 만든 덩어리를 그라인더로 파내는 방법으로써 그 형상을 빚어낸다. 이는 하나의 덩어리를 바깥에서부터 안쪽으로 파들어가는 프로세스를 통해서 마침내 원하는 형상을 얻는 정통적인 조각 기법을 떠올리게 하지만, 사실 알고 보면 그 과정은 조각보다는 건축적인 프로세스에 가깝다. 즉 각목들로 나타난 형태의 단위원소들을 일일이 접합하고 축조하고 구축해낸 과정과 방법에 의해 그 형상을 갖추게 된다. 다시 말해서, 작가가 산을 형상화하기 위해 도입한 나무는 그 자체 하나의 전체, 총체, 덩어리가 아니라, 각목을 이어 붙이는 방법으로 재구성해낸 유사 덩어리, 단위들의 집합에 지나지 않는다. ● 여기서 각목은 작가의 여타의 작업들에 나타난 단위원소들, 즉 축조된 우드락이나 아크릴 판에서의 격자의 단위원소들과도 통한다. 이처럼 작가가 산을 형상화하기 위해서 통나무 대신에 각목을 이어 붙여 축조해내는 방법의 이면에는 조각에 대한 반성이 놓여져 있다. 즉 형태, 양감, 덩어리로서의 정통적인 조각 대신에, 상대적으로 순수한 시각적 이미지에 기울어진 회화적 프로세스를 염두에 둔 의식적 행위이거나, 또는 최소한 이에 대한 무의식적 공감이 작용했을 듯싶다. 하나의 유기적인 덩어리로서의 정통적인 조각의 개념을 해체하면서, 이를 집합과 (재)구축의 논리로 대신한 것이다.

신치현_발_아크릴_10×30×10cm_2005
신치현_얼굴_아크릴_40×30×5cm_2005

회화적 프로세스에 대한 이러한 공감은 『木山 - distance』로 명명된 주제에 의해서도 뒷받침된다. 여기서의 거리는 시점이나 시야와 같은 시각 현상에 맞닿아 있으며, 이런 시각경험에 개입되는 착시현상에 맞닿아 있다. 즉 모든 이미지가 그렇지만 특히 디지털 이미지는 멀리서 보면 그 완전한 형상을 드러내지만, 이를 클로즈업해서 보면 단지 추상적이고 기하학적인 픽셀의 우연하고 무분별한 집합을 확인할 수 있을 따름이다. 마찬가지로 북한산으로 대변되는 세계, 사물, 대상, 객체는 적당한 거리에서 보면 그 완전한 형상을 드러내지만, 이를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그저 이질적인 단위원소들의 우연하고 무분별한 집합을 보여줄 뿐이다. ● 결코 세계의 완전한 실체를 붙잡을 수 없다는 이러한 인식은 실재 거리에 대한 인식을 일종의 심리적인 거리인 심미적인 현상으로까지 확장시킨다. 즉 거리에 대한 문제의식은 세계를 보는 주체의 관점에 대한 문제의식인 것이다. 세계는 보는 각도에 따라서, 또는 보는 관점에 따라서 시시각각 다른 모습들을 보여줄 뿐, 결코 그 완전한 실체를 드러내지는 않는다. 세계와 주체와의 동떨어진 거리만큼의 차이를 되돌려줄 뿐이다. 이는 자연을 보는 인간의 관점에 맞닿아 있고, 인간과 자연간의 관계에 대한 인식에 맞닿아 있다. 작가는 산 속에 들어가 보거나, 그 전체 또는 부분을 조망하도록 유도함으로써 이러한 인식을 전통 산수화에 나타난 자연관에 접맥시킨다. 관객은 전통산수화에서처럼 자신이 산으로 나타난 자연에 연속돼 있음을 느끼고, 전체와 부분과의 유기적인 관계 속에 놓여져 있음을 느낀다.

신치현_귀_아크릴_22×13×5cm_2005
신치현_비너스_디지털 프린트_29×20cm_2005

하지만 이는 그 이면에서 자연의 축소판인 정원, 세계의 축소판인 미니어처가 가지고 있는 한계를 그대로 떠안고 있다. 말하자면 디즈니랜드 내의 자연의 축소판처럼 자연을 자신의 것으로 하고 싶은 욕망이 놓여 있다. 그리고 문학과 영화 등에서처럼 예술의 도처에서 그려내 보이려는 세계의 축소판처럼 정의되지 않는 세계를 정의하려는 욕망이 놓여 있다. 이로부터 느껴지는 인공적인 느낌은 작가의 다른 작업들에서처럼 산의 표면을 원색으로 채색한 것에서 더 강화된다. 그 표면 채색으로 인해 나무 자체가 주는 자연스런 느낌은 오히려 그 이면으로 가려지는데, 작가는 이때의 인공적인 느낌을 굳이 숨기려 들지 않는다. 그 이유는 아마도 고도로 인공화 된 자연을 통해서 오히려 인간과 자연, 자연과 문명간의 진정한 관계에 대한 메시지를 함축해내려는 일종의 반어법에서 찾아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형태 자체보다는 그 형태의 표면 이미지, 순수한 이미지로 나타난 시각적 현상에 대한 문제의식에도 그 맥이 닿아 있을 것이다. ● 신치현은 이렇게 드러난 자연을 3차원의 입체 스캐너로 복원해낸 신체의 부분 이미지들과 대비시킨다. 즉 조각도나 그라인드 대신에 레이저로써 컴퓨터에 입력된 이미지를 되살려낸 신체의 편린들과 대비시킨다. 이는 북한산의 이미지와 마찬가지로 그 속에 실재감과 인공적인 느낌을 동시에 함축하고 있다. 그러니까 굴곡 진 신체의 세부를 자연스럽게 되살려낸 것이 실재감을 느끼게 하면서도, 아크릴 판을 축조한 후 그 표면을 원색으로 채색한 것에서는 인공적인 느낌을 준다. 대상 본래의 형태를 자잘한 슬라이스로 해체한 후, 이를 접합하고 재구성한 과정이 기계적이고 전자적인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이로부터는 평면과 입체, 회화와 조각의 모호한 경계가 느껴지고, 실재감과 이질감이 공존하는 것과 같은 이율배반적인 조형성이 느껴진다. ● 신치현의 작업은 비록 산과 나무 등의 자연, 그리고 신체를 소재를 도입하고 있지만, 결코 그 실재를 겨냥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보다는 여러 형태의 동시대적인 미디어를 통해서 보여지는 자연, 하나의 순수한 이미지로 변질된 자연,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이미지가 주는 인공적인 느낌을 문제시하고 있다. 이는 현대인이 자연과 만나는 감각 경험에 대한 한 코멘트로 읽을 수 있다. 즉 현대인은 자연을 그 자체로서 인식하고 지각하고 받아들이지는 않는다(현대인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연을 상실했다). 오히려 그는 일상의 풍경을 온통 바꾸어 놓고 있는 온갖 미디어들의 기계적인 눈, 전자적인 눈, 인공적인 눈을 통해서 한차례 걸러진 자연(자연의 이미지)을 더 친숙하게 느낀다. 그런 견지에서 작가의 조각은 형태보다는 그 표면적인 이미지에 가깝고, 전자 이미지, 디지털 이미지, 스스로 빛을 내는 자기 발광성의 이미지 등의 동시대에 이미지가 존재하는 방식에 대한 반성이 읽혀진다. 그리고 시점으로서의 시각현상과, 주체와 세계가 만나는 관계의 인식을 드러내 보여준다. 그 인식 속에서 회화와 조각의 경계는 허물어지고, 상호 침투하고, 상호 내포적인 또 다른 지평을 향해 열려진다. ■ 고충환

Vol.20050929b | 신치현 조각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