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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5_0913_화요일_06:00pm
갤러리 아트사이드 서울 종로구 관훈동 170번지 Tel. 02_725_1020 www.artside.net
유정현의 네 번째 개인전, '간극(a liminal space)' ●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저서 '논리 철학 논고(Tractatus Logico-Philosophicus)'에서 "이제껏 철학적 문제에 대해 기술해왔던 대부분의 전제들과 물음들은 틀리지 않다. 다만 무의미한(senseless) 것이 문제다. 우리는 이러한 물음에 대해 전혀 대답할 길이 없다. 다만 무의미함에 대해서만큼은 이야기할 수 있다"고 말한다. 철학이 파악하려고 하는 수많은 물음 중에, 특히 우리의 의식 나아가 시대의 의식에 대해 물음을 던질 때, 그 무의미함은 더욱 절실해진다. ● 우리의 의식은 상당히 명증한 것이어서 외부세계에 대한 객관적 판단이 가능하다. 이 객관적 판단에 힘입어 우리는 화성을 탐사하는가 하면, 나노 세계로 여행을 떠나기도 하고, 수 만가지 동식물의 식생을 구분해 낸다. 그러나 거울이 외부의 모든 것을 비추어주지만 자기의 모습은 비추지 못하는 운명인 것처럼, 우리 역시 외부의 모든 것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지만 정작 자기 자신은 무엇인지, 나아가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가 없는 운명을 타고났다. 따라서 니체는 우리의 "의식(conscious)"은 명료한 것이지만 우리와 우리 시대에 관해서 만큼은 "동물적 의식(animal conscious)"에 불과하다고 말하며, 헤겔은 "우리는 시대의 어린이이다"라고 하고, 소설가 막스 프리시(Max Fricsh)는 소설 '슈틸러(Stiller)'에서 "한 인간이 살아야만 하는 그 시대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나는 이 물음에 대해 도통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말하자면 내게 격앙과도 같았다"고 회고한다.
유정현은 자기와 시대에 있어서 만큼은 이토록 "어린이"와 같고 심지어 "동물적"인 우리의 의식과 시대에 대해 결코 "무의미하지" 않은 진지한 물음을 던지며 성찰의 빛을 화폭에 불어넣는다. 우리는 정말로 우리가 무엇이며, 나아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무엇인지 명확한 답을 얻을 수 없다. 다만 그것에 대한 아련한 느낌들을 품고 살아갈 뿐이다. 이 아련한 느낌을 어떤 이는 "아우라"라고 하며, "삶의 형식"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 유정현의 회화에는 이러한 느낌들이 고스란히 용해되어있다. 빠르게 진행되는 사회, 그 속에서 펼쳐지는 그 많은 편린들, 명확한 경계와 구분도 없는 것 같은 정체성의 문제, 그러나 이와 반대로 사람들 사이에서 더욱 깊어만 가는 골, 바로 우리의 의식의 간극에 대한 염려들이 용해되어있다. 반복되면서도 얼룩지듯 흘러내려 서로가 서로를 불명료하게 만드는 모습은 바로 우리 모습에 대한 표상이다. 알록달록한 의복을 입은 아이는 세계의 그 모든 구성원이 불가사의하다는 듯 지그시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떨구고 있다. 이는 앞서 언급된 "시대의 어린이"와 그 맥을 함께한다. 우리의 의식은 자연계에서 아름다움을 향유한다 해도 유정현의 작품 '정체(station)'에서와 볼 수 있듯이 정체되어있으며, 또한 '얼굴(face)'에서와 같이 인간계에서 서로 자유롭게 소통한다 해도 편안히 체류하지 못한 채 유영해버리고 만다.
삶에는 그러나 두 가지가 있다. 바로 내부자로서의 삶과 외부자로서의 삶이 그것이다. 내부자로서의 삶이란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다. 이 삶은 생생한 경험을 누릴 수 있되, 그 본질을 파악할 수 없는 막연한 삶이다. 외부자로서의 삶이란 이미 흘러서 지나가버린 시간의 삶에 대해 관찰하는 삶이다. 따라서 내부자로서 우리는 우리의 삶의 의미를 모르지만 생생한 삶을 살아간다. 이 삶이 시간이 흘러 이미 과거가 되었을 때, 이 삶은 미래의 사람들에 의해 의미를 수여 받게 된다. 유정현은 우리의 삶을 포괄적으로 파악할 미래의 사람들에게, 우리가 현재의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겪었던 수많은 "불안"과 "무력"과 불쾌"와 "조소"를, 미리 보여주는 것 같다.
1층에 진열되어있는 '숨결(breath)' 연작과 2층에 띠를 이루 듯 배치되어있는 '얼굴(face)' 연작은 바로 "우리는 무엇인가"라는 물음과 "이 시대는 무엇인가"라는 물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은 무엇인가"라는 물음 등에 그 어떠한 기저도 확보할 수 없는 우리의 운명을 잘 표현하고 있다. 우리는 때때로 가녀리며 때때로 거친 숨결로 매 순간을 살아간다. 서로 얼굴을 맞대며 살아가되, 삶의 의미에 대해서 파편적인 이해만 있을 뿐이다. 즉 이 작품들 속에 나오는 아이들, 즉 우리의 진정한 모습은 건실한 손과 발로 확고부동하게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눈을 감고 고개를 떨구며 한없이 부유하고 있다. 3층에 등장하는 설치작품 '간극(a liminal space)'은 이번 전시회를 포괄적으로 설명해주는 거대한 은유이다. 유정현이 상정하는, 의복이란 삶과 문화, 사회와 그 지위를 총괄하는 은유이다. 영어로 벽돌이라는 뜻 외에 무언가를 가로막는다는 뜻을 지닌 '블록(block)'은 의복을 가리기도 하며 드러내기도 한다. 이 은폐와 노정의 순환이 바로 유정현이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우리 삶의 모습이다. ● 앞서 비트겐슈타인이 제기한 철학의 문제는 논리의 그릇됨이 아니라, 무의미함 내지 감각의 결여(senseless)였다. 그리고 누군가 "이제는 철학이 사유하는 예술이건 예술이 감각으로 표현해내는 철학이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을 때, 유정현의 예술세계는 바로 "감각으로 표현해내는 철학"이자, 철학의 "무의미함'을 "의미 있는" 감각의 매체로 승격시키는 성찰의 깊이이다. ■ 이진명
Vol.20050928b | 유정현 회화, 설치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