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읽·기

갤러리 우덕 기획展   2005_0923 ▶ 2005_1015

일기읽기展_2005_표지

초대일시_2005_0923_금요일_05:00pm

참여작가 / 김덕기_김을_김정욱_이광호_이영빈_이진경_임만혁

갤러리 우덕은 한국 야쿠르트가 문화창달에 기여하는 장소입니다.

갤러리 우덕 서울 서초구 잠원동 28-10 한국야쿠르트빌딩 2층 Tel. 02_3449_6071

일기(日記)는 지극히 개인적인 나날의 기록이다. 주인 외에 그 누구에게도 읽을 권리를 허락하지 않는 기록. 내밀한 고백. 그래서 타인의 일기를 훔쳐보는 일은 은밀한 죄의식과 짜릿한 즐거움을 동반한다. 동시에 타인의 '공식적' 모습 너머 깊숙이 숨어있는 '비공식적인' 실체를 대하면서 문득 그에 대한 친밀한 이해와 공감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일기"가 전적으로 개인적이기만 한 것일까? 정말 우리는 제3의 존재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일기를 쓰는가? 굳이 공개적으로 출판이 되는 드문 경우가 아니더라도, 일기를 쓰면서 우리는 막연하게나마 언젠가 누군가 이것을 읽을 것이라고 은밀히 기대하는 것은 아닐까? 일기는 그 막연한 누군가와의 은밀한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수단은 아닐까? ● 김덕기, 김을, 김정욱, 이광호, 이영빈, 이진경, 임만혁 등 7명의 작가는 극히 개인적인 경험을 그린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화면에는 하루하루 작가가 직접 만나고 경험한 사건들, 생각들, 사람들이 각자의 세계관 속에 융합되어 등장한다. 일상에 대한 주관적 기록이라는 면에서 그 그림들은 일종의 그림일기인 셈이다. 김덕기, 이영빈, 임만혁이 삶 속에서 마주치는 잔잔한 상념들을 조곤조곤 풀어나가는 유형이라면, 김을과 이진경은 문득 머리를 스치는 발상들을 즉흥적으로 포착하는 - 서로 무관해 보이는 단어들이 낙서처럼 나열된 일기장 유형이다. 이광호의 그림이 자신의 가정사를 암호화하여 구성해놓은 개인적인 수수께끼라면, 김정욱의 인물들은 타인의 얼굴과 표정에 투사된 작가 자신의 정서적 기록이다. ● 7명의 작가들의 일기를 훔쳐 읽는 것. 그것이 그저 타인의 은밀한 기록을 엿보는 호기심 차원에서 그칠지, 혹은 일기의 주인에 대한 인류애적인 이해와 공감으로 연결될는지, 혹은 그 일기를 읽어나가면서 우리 자신의 깊은 내면의 소리까지 발견하게 될 것인지. 이제 두근거리는 마음을 누르고 일기장을 펼쳐보자. ■ 갤러리 우덕

김덕기_웃음소리-봄,여름,가을,겨울_한지에 혼합재료_172x198cm_2004~2005
김을_드로잉_종이에 혼합재료_26x16cmx3_2005

일기 - 은밀한 대화 ● 나중에 나를 비롯해서 그 누구도 13살짜리 여학생이 털어놓는 이야기에 흥미를 느낄 것 같지도 않아.... '일기'라는 거창한 제목의 두꺼운 종이커버가 달린 이 노트를 내가 평생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지도 않을 거니까 그 누가 뭐라고 할 것도 아니고 말야. 혹시 내가 정말 진정한 친구라고 할 만한 사람을 갖게 된다면 보여줄지도 모르지. (1942.6.20) / 내가 지금까지 지내왔던 대로 나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나의 진지하고 아름다운 면을 발견할까 봐 두려워. 사람들이 그런 나를 보고 조롱하고, 내가 우습고 감상적이라고 하면서 나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을까봐 두려워. (1944.8.1)_「안네의 일기」중에서 ●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일기의 저자 안네 프랑크(Anne Frank, 1929-1945)의 마지막 일기 중에서... 그 3일후 안네 일가는 나치 비밀경찰에 발각되어 아우슈비츠로 보내지고... 아버지 오토 프랑크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한 폭력에 의해 죽음을 당하면서 안네는 자신의 남겨진 일기를 (Kitty라고 불렀던) 어떻게 생각했을까? 사실 은밀한 내면을 타인에게 들키는 것에 대한 부담감과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안네는 언젠가 자신의 일기를 출판할 것을 진지하게 계획하는 모순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한편 '평생' 숨기고 싶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발견'되고 싶은 이중적인 욕망. '진정한 친구'에게만 보여주고 싶은 것. 혹은 그 고백에 진정 공감해 주는 '진정한 친구'를 찾고 싶은 것. 어쩌면 이런 모순, 이중성 그 자체가 발가벗은 인간을 빼어 닮았다... 그러기에 이 모순이야말로 일기 형식이 은밀히 내뿜는 향기의 진원지가 아닐까. ● 『일·기·읽·기』는 김덕기, 김을, 김정욱, 이광호, 이영빈, 이진경, 임만혁 등 일곱 작가의 일기 모음집인 셈이다. 김덕기, 이영빈의 작업은 일상적인 순간들, 기억들을 조곤조곤 풀어나가는 느낌의 일기다. 관객들은 어렵지 않게 각각의 이미지들이 엮어내는 스토리를 재구성해낼 수 있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난해하지 않기에, 우리 역시 매일처럼 겪고 있는 일상이기에, 우리는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쉽게 따뜻한 유대감을 느끼게 된다. 예를 들어, 김덕기의 「웃음소리-봄,여름,가을,겨울」은 전형적으로 행복한 한 가족의 1년살이를 회상한다. 따뜻한 파스텔조의 색채, 어눌하면서도 참으로 서정적인 형태, 어린아이와 같은 천진한 상상은 관객의 공감어린 미소를 자아낸다. 그러나 과연 그 뿐일까? 화면 속에 옅어져 가는 형태들이 시간 속에서 아득해지는 추억들을 상기시키듯, 그의 일기는 '웃음소리'가 바람에 흩어지듯 언젠가 사라져갈 것들에 대한 안타까운 기록들은 아닐까? 의심의 여지없이 행복하기만 한 그의 화면 어느 구석에 서늘한 바람이 도사리고 있는 듯한 느낌은? 작가의 시구에 등장하는 '모래성을 허물던 그 바람'이 이것일까?

김정욱_무제_한지에 먹, 채색_93x63cm_2004
이광호_윤서의 머리깍기_캔버스에 유채_130x193cm_2003

이영빈의 「그림일기」 연작은 아예 아동용 일기장에다 하루의 기억을 재구성해 낸다. 마치 기억을 더듬어가듯 꼼꼼히 기록해가는 손길을 따라 열심히 읽어가다 보면, 우리도 쉽게 그 기억 속에 동화되어 간다. 그녀가 하루를 엮어가는 무대인 편의점, 서점, 버스정류장, 목욕탕, 시장 등은 곧 우리 자신의 무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같은 무대에서 같은 시간에 다른 영혼이 겪은 다른 체험과 생각을 훔쳐보기. 일기읽기의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다. ● 이광호, 임만혁의 일기는 조금 더 난해하다. 구상적인 형상들이 적절히 배치되어 구성되었지만, 왠지 그 각각의 관계를 파악하기는 어려운... 일상적인 단어로 평이하게 서술해 놓은 듯하면서도 왠지 손쉽게 이해되지는 않는 일기들인 셈이다. 임만혁의 인물들은 주로 바닷가, 방파제, 실내 등 한정된 장소를 배경으로 등장한다. "삶이라고 하는 불안한 무대장치"라고 언급할 정도로, 작가에게 이 장소들은 '삶' 그 자체와 연결될 정도로 체질화되어 있다. 그러나 등장인물들의 시선은 결코 서로를 향하는 법이 없으며 자신의 내면으로만 깊이 침잠해 있다. 어쩌면 연극의 막간에 분장을 잠시 벗고 휴식하고 있는 배우들. 촉수만을 간신히 드러낸 채 철저하게 고립되어 웅크리고 있는 개인들의 초상이자, 작가의 일기에 꼼꼼히 기록된 우리들 자신의 발가벗겨진 모습일지도... ● 이광호의 일기는 한층 더 복잡한 읽기를 요구한다. 치밀하게 구성되어 꼼꼼하게 재현된 화면은 일견 그럴 듯하게 논리적으로 써 내려간 문장처럼 보인다. 그러나 막상 내용을 이해하고자 들면, 이게 결코 쉬운 과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단어들이 일반명사가 아닌 고유명사 - 작가의 개인사와 밀착하여 파생된 어휘들로만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 '머리깎기'는 '이발'과 동의어가 아니다. 제비도 강남에서 돌아온 그 제비가 아니며, 미용사 역시 익명의 누군가가 아닌 개인사를 한 몸에 함축하고 있는 '아는' 여자이다. 그래서 그의 그림, 그의 일기를 읽으면서 우리는 스토리가 아닌 목소리를, 그 체험과 고백의 농도를 느끼고 반응하게 된다.

이영빈_9.1-9.23_혼합재료_2005_부분
이진경_이 봄에 피눈물_광목에 아크릴릭_72.5x60cm_2005

김을과 이진경의 작업은 굳이 말하자면, 수수께끼 같은 단어들만 잔뜩 나열된 난수표같은 일기라고 할 수 있다. 일기를 적어나가는 본인들은 그 순간순간의 정서와 사건을 가장 절묘하게 표현하는 단어들을 찾아내었겠지만, 그것을 우연히 훔쳐보는 사람들로서는 전체 스토리의 전모를 잡아내기가 거의 불가능한.... ● 이진경에게 있어 생활과 일기는 거의 동의어처럼 보인다. 살고서 일기를 쓰는 것인지, 일기를 쓰려고 사는 것인지... 그녀의 일기장에는 영수증, 주차딱지, 주워온 스티커, 메모지, 광고전단, 편지봉투 등등 지면이 수용하는 한 거의 모든 일상의 편린들이 박제되어 있다. 전시장에서 만나는 이진경의 작업은 그 단속적인 기록 중에서 다시 한번 발췌된 부분들이다. 작가와 관객을 직접 대면시키는 그 각각의 이미지들은 유통과정이 생략되어서인지 참으로 싱싱하게 퍼덕거린다. 그러나... 그 감수성에 젖지 않고서야 이해가 어찌 난(難)하지 않으랴. 그 감수성을 잠시 훔칠 수만 있다면, 우리네 삶도 어찌 풍부하지 않으랴. 삶과 기록의 순간들이 철저히 밀착되어 분리가 불가능한 특성은 김을의 드로잉에서 역시 발견할 수 있다. 그가 마치 호흡하듯 '쏟아내는' 드로잉들의 양과 질은 너무나 엄청나서 필자는 일종의 경외감마저 품게 된다. 작업으로의 번역과정은 그만 두고서라도, 대체 한 인간의 뇌 속에 이렇게 무수한 상념과 몽상이 비집고 들어갈 수는 과연 있는 것이지 그 자체가 의심스럽다. 지극히 현실적인 상념에서 역사 인식으로, 우주론적 세계관으로, 기하학으로, 종교로, 그리고 다시 작업실로, 나로... 김을의 드로잉들은 작가의 사고가 어떤 궤적으로 흘러 다녔는지에 대한 실시간적 기록이다. 일기만큼이나 투명한 그의 드로잉들을 타고 그 공간을 함께 비행하는 기회를 얻은 것은 우리의 행운이다. ● 김정욱이 그려내는 인물들은 그 개성 넘치는 표정에도 불구하고 특정한 모델을 재현한 것이 아니다. 그 얼굴은 작가가 삶 속에서 마주치는 인물들을 - 실제 인물이든 잡지나 TV에 등장한 인물이든 - 무작위로 조합한 결과물이다. 마치 일기장 위에 기억나는 사건이나 생각들을 끼적거리듯, 김정욱은 얼굴들, 표정들이 마음에 새록새록 떠오르면 그것들을 화면에 그저 끼적거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조합된 얼굴은 흔한 몽타주 사진들처럼 어색하지가 않다. 오히려 반드시 이 인물이 세상 어딘가에는 존재할 것 같다는 확신을 관객에게 심어 줄 만큼 자연스럽고 생하다. 게다가 그 인물은 꼭 집어 말할 수는 없어도 어딘지 내가 아는 누군가와 닮아있다. 그도 그럴 것이 작가와 오며가며 마주친 수많은 인물들이 이 한 얼굴에 집약되어 있으니... 실제 내 얼굴도 이 속에 섞여있을까? ... 다시 보면, 한결같이 작가와도 닮았다.

임만혁_바닷가의 정물04-4_한지에 목탄채색_85x69cm_2004
일기읽기展_讀日記_2005_뒷표지

의심의 여지없이, 일기日記는 주인 외에 그 누구에게도 읽기를 허락하지 않는 개인의 기록이자 내밀한 고백이다. 그러나, 동시에 일기는 언젠가 그 누군가... '진정한 친구'가 발견해주기를 바라는 나의 속 깊은 대화이며, 지극히 은밀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개인과 불특정 다수와의 커뮤니케이션일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 가정이 『일·기·읽·기』가 시작된 기반이다. 따라서, 타인의 일기를 훔쳐보는 엉큼하고 짜릿한 즐거움은, 곧 그 일기의 저자에게 자신이 '진정한 친구'에 합당한지 증명해야 하는 의례로 연결된다. ● 우리는 이 전시를 통해 일곱 가지 서로 다른 색깔의 일기장을 훔쳐보게 될 것이다. 그것이 그저 타인의 은밀한 공간을 엿보는 호기심 차원에서 그칠지, 혹은 일기 주인의 내면에 숨은 "진지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발견하고 그에 공감하는 '진정한 친구'가 될 것이지, 혹은 그 일기를 통해서 우리 자신의 깊은 내면의 모습까지 발견하여 나만의 또 다른 일기로 번져나갈지. 이제 두근거리는 마음을 누르고 일기장을 펼쳐보자. ■ 임대근

Vol.20050927d | 일·기·읽·기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