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Vol.20050309b | 노충현 회화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5_0921_수요일_06:00pm
관훈갤러리 서울시 종로구 관훈동 195 Tel. 02_733_6469
시간과 공간이 인간 경험의 불가결한 조건이면서 감각과 지각을 지배하는 틀이라면 현재의 도시적 삶은 예측할 수 없는 속도와 이미지의 과잉으로 혼란스러운 경험을 선사한다. 또한 시각적인 깊이와 넓이의 영역이 확보되지 못하고 차단된다. 지난 1회 개인전부터 '살풍경'이란 타이틀로 -사전적 의미로 몹시 쓸쓸하고 고요한 정경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작업하고 있는 일련의 작업들은 합정역 부근 한강시민공원을 무대로 하고 있다. 한강시민공원은 도시적 환경과는 다른 공간을 양상을 띤다. 도시의 삶이 구조적이고 조밀도가 높은 곳이라면 한강시민공원은 비어있고 한적하며 시각의 영역이 넓게 확보되는 곳이다. 또한 도시적 질서와 권위의 상징인 건물의 배타적 엄격함과는 달리 모두에게 드러나 있고 접근가능한 공간이다. 의도적으로 이 공간을 설정하고 작업을 한 것은 아니었다. 한강의 길을 거닐다보면 삶의 힘겨움은 어느 새 풀어지곤 했다. 그 길에서 마주친 공간과 대상들을 모으고 추려가면서 자연스럽게 작업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심리적 표상으로서의 풍경 ● 한강 시민 공원에 있는 수영장, 터널, 콘테이너 박스, 테니스장 등은 도시의 삶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장소들이다. 사람들이 사라진 공간에는 시간도 부재한다. 거닐면서 바라본 한강시민공원, 그 풍경을 사진으로 찍은 것, 그 사진을 그림으로 옮긴 것은 같지 않다. 감정의 차이들이 생긴다. 무심하게 바라보았다고 생각했던 공간들이 회화작업으로 이어지면서 눈치 채지 못했던 심리적 정황을 드러내었다. 익숙한 것들이 회화작업을 통해서 낯선 어떠한 것으로 변형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사라진 창문」(2004)의 경우 사진과는 달리 창문을 지워버림으로써 답답한 현실의 삶을 좀 더 극적으로 드러내려고 했다. 양끝을 잘라 콘테이너 박스의 형태를 모호하게 처리하여 불안한 심리를 가중시켰다.
사람이 사라진 그 공간은 더욱 활기가 없는 공간으로 변모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공간 그 자체의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관찰된 현실과 상상적 현실이 만나 겹쳐지고 지워지면서 또 다른 종류의 현실을 만든 것이다. 이렇게 진행된 작업들은 일종의 무기력함과 활기 없음 그리고 부재, 또는 죽음등과 관련된 어떤 심리적 상황들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이 공간을 다루는 방식은 순수하게 기록적이기보다는 미학적이다. 기록된 사진을 바탕으로 내면의 심리적 정황과 질서에 따라서 풍경의 요소들을 지운다. 不在의 감정은 사람들이 만든 구조물에서 더욱 조장된다. 뿌연 스모그와 먼지사이로 색채는 흐려지고 명도차이는 줄어든다. 그림자가 모호해지는 오전을 만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공간이든 사물이든 햇빛에 따른 명암의 대비를 극적으로 강조하기 보다는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풀어가고 있다. 그림자가 없거나 시간을 애매모호하게 처리함으로써 빛의 존재감을 약화시키는 것이다. 비로소 사물과 공간은 무게를 덜 지니게 된다. 공간은 평면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것은 화면의 공간이 환영의 공간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비어있는 장으로서 기능하기 위해서다. 공간과 대상은 주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고 화면의 공간이 대상에 의해 가려지거나 차단되는 방법을 쓰고 있다. 또한 바닥을 바라보는 그림이거나 올려다보는 그림의 경우에는 공간의 깊이는 차단 당한다.
풍경, 다시 풍경● 지금까지 진행된 작업에는 한강시민공원의 풍경에 대한 단면 혹은 파편만이 담겨있다. 왜냐하면 공간, 구조물, 장소들이 전체의 맥락에서 분리되어 그 자체의 성격을 애매모호하게 처리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필요이상으로 대상에 가까이가지 않으면서 심리적 거리를 유지하려고 했다. 이러한 접근방법을 통해서 한강시민공원의 공간은 심리적 표상으로서의 공간으로 재해석되었다. 한강시민공원을 무대로 하는 '살풍경' 연작은 '나'의 삶에 관한 풍경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노충현
Vol.20050927a | 노충현展 / ROHCHOONGHYUN / 盧忠鉉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