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 그안의 신화

홍진숙 판화展   2005_0928 ▶ 2005_1116

홍진숙_신화-가믄장아기의 인연_목판화_80×60cm_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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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5_0928_수요일_06:00pm

가나아트 스페이스 / 2005_0928 ▶ 2005_1004 서울 종로구 관훈동 119번지 2층 Tel. 02_734_1333

제주문예회관 제2전시실 / 2005_1031 ▶ 2005_1106 제주 일도2동 852 Tel. 064_754-0525

숨은 거미, 신화의 이랑을 엮다 - 제주 신화의 서사를 풀어내는 홍진숙의 판화 ● 모든 신화는 이야기다. 그러나 모든 이야기가 다 신화는 아니다. 신화는 사람들이 과거의 어느 때 일어난 일에 관해 과거에 씌어진 것이라고 믿고 있는 이야기이다. 또는 아주 드물게 그것이 미래에 관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이 기억되기 때문에 현재 속에서 계속 의미를 갖는 사건이라는 점이다_웬디 도니거(Wendy Doniger)의 『숨은 거미 : 신화 속의 정치와 신학』중에서 ○ 지난해 겨울, 판화가 홍진숙의 작업실에서 그동안의 작품들을 관찰한 후 '제주신화의 저변에 흐르고 있는 프리미티비즘(Primitivism)적 원초성에 대한 탐구와 그것을 향한 예술적 지향이 화두'라 그의 작품론을 평한 바 있다. 이유는, 그가 학업을 끝내고 다시 제주에 정착하면서 작품의 주제를 '제주' 그 자체로 선택했으며, 이후 제주 곳곳을 바람처럼 떠돌았던 자신의 발자국의 기억을 고스란히 화면으로 끌어와 이미지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분석했다. ● "『바람의 노래』展을 준비하면서 그는 제주의 풍경을 보러 나갔다. 제주에서 나고 자랐지만 그토록 아름다운 풍경은 처음이었다. 360여 개의 오름과 그 오름에 얽힌 신화, 한라 영신과 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구전설화, 제주무신궁과 본풀이(巫歌)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이때의 작품들을 보면, 섬의 전설이라는 「legend of island」를 중심으로 「동자석」, 「다랑쉬오름」, 「따라비오름」, 「용눈이오름」, 「오름바람」 등과 같이 오름이 들어 간 제목이 주를 이룬다. 오랜 세월 제주의 문화적 원형으로 존립해온 신궁과 오름, 하르방, 그리고 무형의 형상인 돌, 곤충, 숲, 늪 등에서 홍진숙은 그동안 잊고 있었던 자신의 실체를 찾는다. 그것은 삶의 바깥 풍경인 일상에서 풍경의 바깥인 '나'와 '나'의 내부로 향하는 길의 실체이기도 했다. 마치 고구려 고분벽화(혹은 몽골의 고대 암벽화)를 상기시키는 질박한 황토 빛에 새긴 암벽화 문양의 사냥 장면은 고대 제주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지금 현재 여기로부터 제주라는 '몸'이 기억하고 있는 원시풍경을 좇아간 그의 시선은 이미 '몸'의 배꼽과 연결된 자신의 자궁으로 향하고 있다. 이즈음 아기를 갖고 있었다고 하니, 「오름바람」으로 표현된 '자궁' 속의 두 인물이 그와 그의 아이가 아닐까."

홍진숙_신화-건너감_목판화_60×35cm_2005

그런데 그 사이 그의 작품의 테마가 풍경에서 풍경에 깃든 '신화'로 넓어졌다. 이는 어쩌면 매우 긍정적 변화일 수도 있을 터이지만, 자칫 서사적 구성에 매료되어 치졸한 삽화로 전락할 수 있는 위험을 극복해야 하는 과제가 남는다. 홍진숙은 이미 그러한 과제의 극복을 예견이라도 한 듯 오랫동안 실험해 온 소멸법의 색채와 화면구성, 그리고 신화의 배경으로서의 풍경을 매우 훌륭하게 안착시켰다. 그 과정에서 내고 박생광을 비롯한 몇 몇 선배 화가들의 작업은 좋은 사례가 된 듯 하다. 그러나 우리가 내고의 작품들이 무신과 무녀, 전통 색채인 오방색으로 대표되는 일종의 '전통성'에서 기인하고 있음을 주지한다면, 홍진숙의 작품들이 순수하게 신화의 스토리와 그 스토리의 극적 장면을 구성하면서 보다 새로운 영역으로 확장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굳이 오방색을 주장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제주가 가진 제주의 로컬 칼라(local color)를 찾기 위해 색을 쌓아 올리는 소멸법을 고집하거나, 그래서 원색이 아닌 중첩된 색이 갖는 기묘한 색상의 스펙트럼을 보여주며, 또한 신화속의 신들을 사람의 형상을 빌어 재현한 후 다시 극적 전개를 함축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변형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한 화면에 이미지를 꼴라쥬하듯 보여주었던 내고의 형식과 달리 홍진숙은 인물과 풍경 곳곳에 신화의 내러티브를 장치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때로 화면 전체가 삼각의 산 모양새를 취하며 '제주'로 은유되기도 한다. 홍진숙은 근대이후 우리에게서 사라졌던 신화적 메타포를 화면으로 끌어 들이고 있다. 기실 그동안의 신화 그리기란 것이 무수한 역사화로 그려진 현세적 영웅들에 대한 이야기이며, 이념적 이데올로기의 홍보용 전단처럼 1970-80년대 호국 사당의 삽화로 박제화되어 있지 않은가. 이 그림들은 예술적 성취와는 별개의 문제이며, 그렇기에 어떠한 영감도 전해 주지 못한다. 또한 그것은 결코 신화가 아니다. 오랜 역사 속의 민중들과 그들의 입을 통해 전승되었던 신화의 생기(生氣), 예술의 원초적 흡입력으로 작동하며 그 씨앗이 되었던 '신화'가 진짜다. 홍진숙은 나지막이 그 이름의 이랑에 씨를 뿌리기 시작한 것이다.

홍진숙_신화-사랑과 증오_목판화_80×60cm_2005

미술 메타포의 푸른 씨앗 '신화' ● 초기 미술의 역사는 신화의 서사적 내러티브를 실체화하고 이미지화하는데 바쳐졌다. 거대한 신전과 신전의 터줏대감인 신상을 비롯해 수많은 신화의 신들이 돌과 청동의 육신으로 현신되었던 것이다. 신화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들은 화가와 조각가들의 단골 메뉴였고, 그래서 미술사 곳곳의 장면에서 변용과 변형을 거듭하며 전승되고 있는 신화의 '얼굴'을 쉽사리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또 다른 미술의 신화다. 즉, 미술이 신화의 세계를 멀티플한 양상으로 발전시키면서 형상의 유사성이라는 '미의 신화'를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신화의 미술은 비단 서구뿐만 아니라 전 인류의 문화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으며, 표현된 이미지의 다양성은 이루 헤아릴 수조차 없을 정도이다. 그러나 그 다양성이라는 것이 근대이후 '동일성의 폭력'을 행사하며 '위에서 아래로'의 접근방식을 취하는 순간 신화의 서사적 생동을 지탱해 왔던 '지역'이 급속하게 붕괴되었다. 미의 신화는 더 이상 생성을 하지 못하고 멈췄다. 동일성의 폭력은 식민화 과정을 겪어야 했던 제3세계 국가들에서, 국민국가 건설에 앞장섰던 독재자들의 획책과 계략에서, 그리고 세계화 국제화 글로벌화의 전략이 최선임을 부르짖는 21세기 사회의 당대성 요구에 의해서 지속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우리 민족이 '단군'의 자손이며, 그로부터 한 형제이며, 그리하여 '단일 민족'임을 강조해 온 역사를 기억해 보라! 즉 한 집단에 속하는 모든 구성원이 서로 같다는 가정은, '타자'의 집단을 그저 동일한 개체물의 집합일 뿐이라고 무시하고, 나아가 그들을 통제하려는 태도와 이어진다. 이 편견의 핵심은 미지의 개인은 그/그녀가 속한 집단의 특성을 그대로 갖고 있다는 가정이며, 이를 통해 구체적 개인의 차이점은 사라지고 인식과 제어가 가능한 동질적인 집단만이 남게 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신화연구에서 있어 유사성 · 동일성에의 주목은 각 신화의 독특성과 가치를 무시한 채 특정 지역 중심의 신화 이론에서 타자의 신화를 재단하고 해석하는, 일종의 '동일성의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심각한 문제가 제기된다. ●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웬디 도니거는 '아래서 위로'의 접근방식을 주장한다. 그는 신화의 서사적 구성 요소인, 인간의 육체, 성적 욕망, 고통, 죽음 등과 관계된 특수한 개별적 내러티브, 즉 반드시 특정한 문화의 옷을 입고 나타날 수밖에 없는 구체적인 내러티브에서부터 출발해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연속성의 끈을 찾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원형'(archetype)의 중요성이다. 신화에는 반드시 그 구체적 의미의 이면에 원형적이고 보편적인 의미의 층위가 존재하며, 그로인해 한 문화권의 신화를 연구함에 있어 그 문화의 사회적 역사적 맥락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결코 원형만을 따로 떼어서 볼 수 없다고 말한다. 원형은 언제나 구체적인 문화적 표현들(cultural manifestations)이라는 옷을 입었을 때에만 감지될 수 있는 것이며, 신화를 살아 있도록 만드는 것은 원형의 힘이 아니라 바로 이렇게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표현들의 힘이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신화는 미술뿐만 아니라 예술장르의 전반에서 창의적으로 작동될 수 있는 양질의 텃밭이다. 도니거는 신화의 뒤에 숨어 있는 인류의 공통된 경험을 '숨은 거미'(implied spider)에 비유했다. '숨은 거미'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뽑아낸 실로 세계를 방출해내는, 우파니샤드 속 신의 이미지와 연결된다. 그는 모든 신화의 뒤에 숨어 있는 보이지 않는 거미가 바로 인간 누구나 공유하는 본성과 경험으로서, 이야기꾼들은 이로부터 끊임없이 거미집을 짤 원료, 즉 계속해서 신화와 이야기를 만들어낼 원천을 공급받는다고 이야기한다.홍진숙의 작업은 이와 매우 유사하다. 『제주도 본풀이』라는 거대한 거미가 뿜어내는 실을 부여잡고 자신의 이야기집을 짓고 있는 드문 작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신화에의 집중이 그들이 살고 있는 삶터와 무관한, 마술적 환상의 '짬뽕'신화에 길들여지고 있는 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홍진숙_신화-섬, 그안의 신화_목판화_30×40cm_2005

신을 향한 신의 노래, 제주 본풀이 ● 제주도는 1만 8천여 신들의 신화가 용트림하며 여전히 그 현존의 생동을 느낄 수 있는 지역이다. 현재에도 300여개가 넘는 신당이 있을 뿐만 아니라 대표적인 열두 본풀이를 중심으로 각 마을별 본풀이가 숱하게 전해져 온다. 참으로 흥미로운 것은 '창세신화(혹은 개벽신화)'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무가 중 '초감제'에 의하면, "태초의 세상에 혼돈이 있었다. 하늘과 땅이 구별 없이 서로 맞붙고 암흑에 싸여 한 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이 혼돈천지에 개벽의 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갑자(甲子)년 갑자월 갑자시에 하늘의 머리가 자방(子方)으로 열리고, 을축(乙丑)년 을축월 을축시에 땅의 머리가 축방(丑方)으로 열려 하늘과 땅 사이에 금이 갔다. 금은 점점 벌어져 땅에는 산이 솟아오르고 물이 흘러내리며 하늘과의 경계가 분명해져 갔다."이란 내용이 나오고, 진성기가 채록해 풀어 놓은 『신화와 전설』에는 도수문장(都首文章)이라는 이가 나오는데, 그가 하늘과 땅이 서로 맞붙어 있음을 알고 세계를 열어 놓는 장면이 나온다. "도수문장은 하늘과 땅을 두 개로 쪼개어 놓고, 한쪽 손으로는 하늘을 떠받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땅을 눌러서 힘차게 일어섰다. 그러자 맞붙었던 하늘과 땅덩어리는 금새 두 쪽으로 벌어지면서 그 하늘의 머리는 자방(子方)으로, 다시 땅의 머리는 축방(丑方)으로 제각기 트이면서 열려졌다." ● 창세신화의 두 이야기는 매우 흡사하지만 아주 다르다. 두 번째 신화에선 도수문장이란 인물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화의 다름은 신화의 내용이 기록을 통해 단일한 체계를 전승하는 것이 아니라 구술로 이어지는 역사를 가지며, 그 과정에서 서사구조의 큰 뼈대만 남긴 채 상상의 옷을 끊임없이 갈아입는 다는 데 있다. 바로 이 것이 원형이라는 통로를 거치며 살아 있는 문화로 숨쉬게 하는 지점이다. 진성기에 의하면, 수많은 신령의 본풀이를 종류별로 가리는 데는 신상의 대상인 신의 성격에 따라 일반신본풀이, 당신본풀이, 조상신본풀이, 특수본풀이 등으로 나눌 수 있는데, 그 수가 무려 500여 편에 이른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이처럼 많은 신의 본풀이가 남아 전해지고 있는 것은 신의 개성이 제각기 강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신앙민들의 생활상의 복잡 다양한 여러 문제를 문제마다 달리 풀어 왔던 데에 원인했다고 말한다. 더불어서 그는 본풀이는 고대에서부터 면면히 불리어 온 제주무속사회의 노래이기 때문에 이 이야기 속에는 제주에서의 자연환경과 싸우거나 적응하며 살아 온 우리 조상 남녀의 사랑 · 미움 · 실패 · 성공 등 모든 사건에 얽힌 역사의 단면들이 현대인에게도 풍부한 감동을 줄 수 있는 서정성과 서사성을 갖춘 서민문학으로서의 뿌리 깊은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고 설파한다.

홍진숙_신화-자청비_목판화_80×60cm_2005

홍진숙은 이러한 제주 본풀이의 서사성에서 작품의 테마를 설정하고 있다. 일례로 그의 작품 중에는 "이 아들 시성제 일흠은 / 초?드렌 본맹이여 / 열?드렌 신맹이여, / 쑤무?드렌 살아살축 산맹이여, / 이 시성제가 저싱 삼시왕이 / 되었구나"란 작품이 있다. 이 가사는 『제주도 본풀이 사전』중 「초공본풀이」에 나온다. 줄여 「신화-무조삼형제」라 명명했지만, 가사 내용 중 한 대목을 골라 작품의 테제로 이용하면서 테제에 맞는 작품을 구상한 것이다. 또 하나는 "조왕할망은 토조나라 토조부인 / (…) / 노일국 ?님애기 노일저댄 / 칙시부인 대부인."인데, 이 가사는 「문전본풀이」에 나오는 대목이다. 작가는 각 본풀이의 서사적 구성을 화면에 재배치하면서 한 대목의 삽화가 아닌 전체적 맥락을 응집시킨다. 다시 살펴보자. 앞의 「초공본풀이」는 매우 긴 노래이지만 대강의 줄거리는 이렇다. ● "귀하게 태어난 자지명왕아기씨는 부모가 옥황상제의 명령으로 떠나게 되자 살창에 갇혀 지내는 신세가 된다. 어느 날, 산 너머에 있는 황금 산의 절에서 공부하던 스님이 아가씨를 찾아와서 동침도 안했는데, 아기씨는 태기를 느끼게 된다. 딸의 임신을 안 부모는 크게 노하여 집에서 내쫓고, 아기씨는 세 아들을 낳게 된다. 세 아들은 영특하게 자라서 과거를 보려고 하였으나, 중의 아들이라 허락되지 않았다. 아버지를 찾아간 아들들에게 아버지는 무당이 되라고 권하고, 저승에 갇힌 어머니를 모셔오기 위한 굿을 치른다." ● 홍진숙은 작품에서 이 이야기를 화면의 구성, 색, 그리고 이미지의 상징으로 전면화 된다. '옥황상제' '살창' '산 너머' '황금 산' '스님' '아가씨' '세 아들' '굿'등이 혼융되어 인물간의 긴장을 만들어 내거나 황금의 산이 두드러진 색채로 쏟아 오르고, 이야기의 긴 흐름 혹은 '내쫓김'의 표현을 '길'의 형상으로 내면화되어 등장한다. 그 관계항들의 밀집이 회화의 독특한 양상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판각의 한 단계 단계에서 비롯된 치밀한 계산이 형상의 아웃라인을 묘한 '환타지'로 이끈다. 이러한 태도는 「문전본풀이」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열 두 본풀이 중 마지막 본풀이인 「세경본풀이」는 '자청비'라는 한 여인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의 구조는 복잡하다. 지혜롭고 천하일색인 자청비가 결국 농경신이 된다는 이야기 이지만, 그 안에는 - 문도령과 만남→남장을 하고 길 떠남→3년을 속임→사랑의 확인하고 인연을 맺음→문도령 하늘나라로 떠남→기다림→겁탈하려는 정수남을 죽임→다시 길 떠남→환생 꽃을 얻어 정수남을 살림→내쫓김→베 짜는 할머니의 수양딸이 됨→문도령과의 상봉→다시 헤어짐→하늘에서의 재회→문도령의 바람기→지혜로운 해결→오곡의 씨를 얻어 지상으로 내려와 농경신이 됨 - 의 흐름이 있다. 조금은 황당하고 의아한 내용이다. 그렇지만, 이 이야기는 사랑과 이별, 살인, 성적 욕망 등 삶의 생생한 리얼리티를 보여주며, 베 짜는 할머니와 같은 '생명의 신'은 은유화되어 숨어 있다. 그리고 이야기의 주체적 힘이 여성에 의해 전개되고, 결국 여성이 대지의 생명을 관장하는 신이 된다는 점도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 작가는 '자청비'도 다른 작품들처럼 화면 속에 이야기 전체를 전면화시키고 있다. 자청비의 모습을 남녀 반신으로 혼합해 표현했고, 죽임을 당한 정수남의 머리는 마두(馬頭)로 둔갑되었으며, 문도령은 푸른 인물로 그려졌다. 그리고 화면의 배경은 농경신임을 보여주기 위해 황금 빛 전답을 추상적으로 그려냈다. 화면의 요소요소에서 색이 대비적 효과를 거두며 구성의 복잡함을 무마시키고 있다. 소멸법의 색이 결과적으로 중성적 색채가 되는 단점이 있는데, 그의 색은 깊고 중후한 맛이 있으면서도 색상의 명도와 채도가 결코 낮지 않다. 오히려 두툼한 층위를 형성한 색의 농밀함이 '신화'의 테제를 더욱 선명하게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신화가 구술의 층위에서 빛을 발하는 것처럼.

홍진숙_신화-일만팔천신_목판화_60×40cm_2005

이랑에서 싹 틔우기 ● 홍진숙의 '신화' 연작은 본풀이 신화에 그치지 않는다. 제주의 마을 곳곳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민담과 설화, 전설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만큼 그의 시선은 '제주'라는 어머니에 다가서 있다. 최초의 심방(무당)에 대한 이야기며, 서귀포 본향당, 그리고 뱀신 신앙도 등장한다. 그가 풀어내는 신화의 구성은 장중하거나 무겁지 않다. 의도적으로 과장시켜 지나친 형상을 만들어 내지도 않는다. 옛 이야기를 들려주는 할망들처럼 그의 그림들은 숨은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아이들의 상상처럼 앙증맞고 그만큼만 과장되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의 회화적 언어에 '더 많은' 요구의 심사를 불편하게 드러내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그동안 신화를 미적 표현으로 승화하는데 좀체 신경쓰지 않았기 때문이며, 그러한 미술사를 갖지 않았다는 부끄러움 때문이다. 그 어떤 신화의 미술을 온전히 가져본 적 없기에 홍진숙에게 바라는 기대치가 더 커지는 것이다. 저 아름다운 고구려의 신화들이 있지만, 모두 무덤의 벽화로 그려졌을 뿐이다. 지금에 와서 그것을 회화의 언어로 재현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무덤으로부터 부활해 다시 신화의 환한 부흥이 시작되어야 한다. 그리고 과거가 아닌 지금 우리 안에서 생동하고 있는 신화를 세계를 그려야 한다. 제주 신화의 미술은 그렇기에 너무나 소중하고 반가운 출현이다. ● 나이지리아의 소설가 치누아 아체베(Chinua Achebe)는 말했다. "아프리카는 이런 운명을 타고난 적이 있다. '아프리카적'이라는 형용사만 들어도 괜한 거부반응을 불러일으키는 운명을. 따라서 차라리 고향 및 모든 책임감과 인연을 끊고 싶은, 그리하여 단 한걸음에 보편인이 되고 싶은 운명을. 나 역시 이러한 분노를 이해한다. 그러나 자신으로부터의 탈주가 내게는 이 분노를 벗어나는 온당한 방법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만약 작가라는 사람마저 이런 도피주의에 매몰되어버린다면 과연 누가 이 도전에 응전할 수 있겠는가?" 아체베의 '아프리카적'이라는 말을 '한국적'이란 말로 치환해 보자. 그렇게 놓고 보면, 우리도 동일한 고민을 해왔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또한 그들과 다를 게 없는 근현대사를 겪어 왔기 때문이다. 식민과 근대화, 그리고 독재. 그러나 그 모든 게 사라진 오늘 날의 상황은 어떤가. 제3세게 민중에게 가하는 우리의 폭력을 보라! 제국주의 열강이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 또한 '유색인'차별을 서슴치 않으며, 제국의 미학을 숭배하고, 제국의 신화에 열광하며, 마치 경제적 자본의 우위를 선점하는 순간 우리 스스로가 마치 '백색인'과 동등한 종족인양 우쭐해 하지 않는가. 문화적 통섭이란 우리와 제국의 통섭이 아니라 우리와 열려진 세계와의 통섭이다. 그것은 어느 국가, 종족, 문화의 계급적 관계를 떠난 평등한 통섭이다. 그래야 새로운 문화의 창출이 일어난다. ● 홍진숙이 자신의 작품세계를 자신이 태어나 자라고 살아가는 제주로 선택했듯이 작품에서 보여지는 미학의 출발도 반드시 그 내부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세계인도, 한국인도 아닌 오직 '제주인'임을 인식하는 순간 모든 세계와 교우하게 될 것이다. 제주 신화는 그 누구의 신화도 아닌 오직 제주의 신화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우리)는 그(우리)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그(우리) 안의 신화는 결국 그(우리) 자신에게 깃들어 있는 신화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명심할 것은 '그들만의 신화'에 매몰되어선 안 된다. 마치 현재의 신화가 제주라는 어머니의 신화적 원형에서 비롯되었고, 그곳으로 귀결된다는 편협성을 가져선 안된다는 함정을 말이다. 1만 8천여 신화를 동일성으로 재단할 수 없는 것은 그만큼 제주의 신화가 '활화산'처럼 지속적으로 생성되고 있기 때문이지 않은가. 어쩌면 각각의 이야기는 전혀 낯선 것들의 원형을 가지고 있을 지도 모른다. 미술이 되는 신화는 재현이 아니라 창출이며, 그 안에 숨겨진 '생명성'의 씨줄과 낱줄을 섬세하게 엮어내는 작업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긴 시간이 필요하다. 신화는 긴 시간이 축적해 놓은 결과물이다. 지금 여기, 이제 막 씨를 뿌린 이랑들 사이를 보라! ■ 김종길

홍진숙_신화-할망, 하르방_목판화_80×40cm_2005

『섬-그 안의 신화』展에 부쳐 ● 1. 제주도, 그 이름만으로 무엇이 떠오르는가. 아마도 이 시대 대부분의 한국사람들은 관광지 혹은 신혼여행지라는 생각부터 할 것이다. 하기야 제주사람들조차 지금은 '천혜의 관광지-제주도'라고 말하기를 예사로 한다. 그렇다. 어머니의 넉넉한 가슴 같은 한라산, 그 자락에 수백의 나즈막한 오름들, 깊은 원시림 곁으로 뜻밖에 펼쳐지는 초원, 황홀한 바다빛과 그 빛으로 이어진 망망대해, 섬 어디에 서도 음악같고 그림같은 자연풍광을 만나지 않을 수 없으니, 이만한 땅이 어디에 있으랴. 그러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라. 시간이 말 걸어오는 것에 귀 기울여 보라. 거기에는 땀과 눈물로 범벅진, 고난과 옹골찬 의지로 엉켜진 제주인의 고단한 삶, 그 역사가 있다. 암반과 돌투성이 땅에서 피처럼 진득한 땀으로 일궈야만 하는 밭, 오로지 부지런해야만 구할 수 있는 물, 이것은 화산섬인 제주도에서 사는 사람들이 짊어져야 했던 멍에였다. 시도 때도 없이 불어대는 바람, 갈피 잡을 길 없는 날씨는 태평양을 마주한 섬에 사는 사람들이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어디 그 뿐이랴. 외세의 억압과 착취의 역사는 어떠하고, 그에 저항한 역사는 어떠한가. 그래서 돌 많고 바람많은 섬에서 제주인들은 변화무쌍한 기후만큼 굴곡진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고단한 삶을 견디고 이겨오는 힘은 어디서 오는가? 척박한 땅에서 삶을 버티어오는 옹골진 근성이고, 그 삶의 뿌리를 튼튼하게 지탱해주는 신에 대한 믿음 아니겠는가. ● 2. 누구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다. 그저 제주인들은 예나 지금이나 일만팔천신이 지키는 땅이라고 말한다. 이 어마어마한 수만큼 신의 이름이 있을 리는 없다. 다만 제주인들은 신의 영험함이 이 땅을 감싸고 있다고 믿어왔던 것이고, 또 그런 만큼 신에 관한 얘기, 즉 신화도 많다. 차마 가늠하기 어려운 삶의 현실에서 제주인들은 그들 가슴의 언어로, 그들 가슴에 생생히 살아 있는 신의 힘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질서지우며, 그 안에서 생명력을 지속시켜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주신화는 제주인들의 정신세계를 투영하고 있는 거울이다. 하지만 사람 사는 땅 어디라도 신화 없는 곳이 있을까? 오묘하고 복잡한 세상과 그 세상에서의 삶을 설명해 줄 얼개를 마련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인류의 보편적인 심층의식 아니던가. 하늘과 땅이 열린 이야기로부터 생성과 소멸의 순환, 사람살이의 시련과 갈등, 그 와중에서의 사랑이야기, 그리고 집단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까지, 제각기 다른 신의 이름으로 수수께끼 같은 세상을 설명하는 신화가 지역마다 있었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러나 그 많은 신화는 합리성의 외피를 걸친 또 다른 이념적 장치에 의해 그 생명력이 쇠잔해졌다. 특히 한국 땅에서는 정치적 필요성에 의해 유지되어 온 건국신화나 문화적 헤게모니의 징표로서의 그리스·로마 신화가 박제된 형태로 신화의 명맥을 이어올 뿐이다. ● 그런데 바로 이 한국 땅에서, 아직도 신화가 생생하게 전승되고 있는 땅이 바로 제주도이다. 상채기야 왜 없었으랴. 조선조 유교이데올로기의 맹공과 엄청난 폭발력을 지닌 근대화이념은 제주인이 가슴으로 품고 살아 온 신화를 뒤흔들기는 했다. 그러나 척박한 자연과 핍박의 역사를 견뎌 온 제주인의 생명력만큼, 제주신화는 시대가 가하는 상채기를 보듬고 또 보듬으면서 지금도 눅눅하게 제주인의 가슴에 스며 있다. 돌이켜보면 다른 땅보다 더 척박했기에, 지리적으로 더 고립되었기에, 또 다른 땅보다 더 고난의 역사가 있었기에 오히려 고단한 삶을 신의 이름으로, 그 신의 영험 속에서 견디어 올 수 있었던 것이다.

홍진숙_신화-장수의 신_목판화_60×40cm_2005

3. 오늘도 제주신화는 살아 있다. 설문대할망이 흙을 날라서 만든 한라산과 그 숱한 오름이 제주인의 정서 한 가운데 자리잡은 것처럼, 그렇게 제주신화는 살아 있다. 집집마다 명절과 제사 또 집안의 큰 일이 있을 때 문전신을 위한 제를 올리는 것, 또 일만팔천신에 대한 경외에서 지켜지는 그 많은 일상의 금기는 제주신화의 흔적이다. 사자(死子)의 저승길을 온전하게 하기 위한 '귀양풀이'를 남은 자들의 도리로 알고 있는 제주인에게서 제주신화의 힘이 느껴진다. 한라산 자락을 에둘러 옹기종기 모여 앉은 마을마다 자리한 신당(神堂), 그 삼백오십 여 개나 되는 신당에서 제주신화가 숨쉬는 소리 들린다. 정초(正初)에 신당을 찾아드는 그 숱한 사람들 사이에서 제주신화의 맥은 이어진다. 심방[巫]이 신의 본(本)을 풀어내는 소리가 여기저기 들리고, 그 '본풀이'[신화]와 더불어 신화의 나라, 그 원초적 심성의 나라에 동참하는 제주인의 얼굴은 진지하고도 편안하다. 제주인의 이 정서를 미신 혹은 속신으로 왜곡하거나 폄하하지 말라. 이야말로 신의 자손들이 지켜온 문화적 정체감이고, 제주인의 삶의 원동력이며, 삶의 역사이고, 삶의 현실이다. ● 4. 제주섬에는 여러 성격의 신들이 공존한다. 하늘에서 내려온 신이 있는가 하면, 땅에서 솟아난 신이 있다. 바다를 관장하는 신이 있는가 하면, 산을 차지한 신도 있다. 바다 건너의 나라에서 온 신이 있는가 하면, 저승을 관장하는 신도 있다. 하늘과 바다를 온 몸으로 맞대고 있는 땅, 제주도는 이렇듯 온 우주의 신이 함께 하는 땅이다. 그야말로 제주도가 우주이고, 우주가 곧 제주도이다. 그리하여 하나의 우주로서의 제주도에는 사람살이에 연관된 모든 신들이 있다. 생명의 탄생을 주관하는 신, 죽음의 신, 운명의 신, 농경신, 목축신, 어업신, 수렵신, 포태와 출산의 신, 육아와 치병의 신, 부귀의 신, 마을수호신, 일가수호신이 그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람이 거주하는 공간 곳곳에도 신이 있다. 집으로 드나드는 골목길에는 올레신, 집 어귀에는 정살신, 집 앞쪽문에는 일문전, 뒷쪽문에는 뒷문전, 부엌에는 조왕신, 고팡(곡물을 저장하는 방)에는 안칠성, 뒷곁에는 밧칠성, 울타리에는 울담신, 울타리 안에는 오방토신, 변소에는 측신 등이다. 그야말로 제주도는 신들의 고향이라 아니할 수 없다. 신들의 고향이기에 제주신화는 풍성하다.그 풍성함에는 우주의 이치와 사람살이의 이치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하늘과 땅이 처음 열리던 내력으로부터 만물이 창성되는 내력이, 생명과 죽음 그리고 탄생과 성장의 원리가, 인간 세상을 다스리는 치세의 원리와 권력의 원리가, 사랑과 이별의 아픔과 배신과 화해의 고뇌가 신화의 갈피갈피에서 빛을 발한다. 그래서 제주신화는 우주의 역사이고 인간 삶의 현실이다. 또한 제주신화는 제주인의 생활, 삶의 흔적을 비춰주는 거울이다. 탐라가 개국하던 이야기로부터 마을이 퍼져가는 이야기, 농사가 시작되는 이야기와 바다밭에 풍년드는 이야기, 최초의 심방(제주의 무) 및 제주도 굿의 원리에 관한 이야기, 남편감을 스스로 선택하는 당찬 여인과 혼자 힘으로 자식을 키우는 강인한 어머니의 이야기, 심지어는 제주인을 괴롭혔던 관리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외세를 몰아내기 위해 합심하는 이야기까지, 그야말로 제주신화는 제주의 역사이고 제주의 독특한 문화이다. 그러기에 제주신화에 등장하는 그 많은 이름들은 바로 제주인의 얼굴에 다름 아니다. 설문대할망, 자지명왕아기씨, 백주또, 가믄장애기, 자청비, 원강암, 조정싱?님애기 등등의 여신은 바로 이 땅의 어머니들의 다른 이름이다. 소천국, 정수남이, 문도령, 남선비는 이 땅의 남정네의 다른 이름이다. 이제 우리는 제주인의 삶이 제주신화에 투영된 것인지, 제주신화가 제주인의 삶에 투영된 것인지를 굳이 묻지 않는다. 그것은 서로 다른 이름을 지닌 한 얼굴이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는 또 다시 꿈을 꾼다. 지나온 시간에 제주신화가 제주인들의 삶을 가능하게 한 감동이었고 꿈이었던 것처럼, 오늘에도 그리고 내일에도 여전히 감동이고 역시 꿈이기를 말이다. ■ 하순애

Vol.20050926b | 홍진숙 판화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