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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5_0908_목요일_05:00pm
포스코미술관 서울 강남구 대치4동 892 포스코센타 서관 2층 Tel. 02_3457_1665
세속적 구제는 어떻게 가능한가? - 김주연의 「일상의 성소」에 대하여 ● Ⅰ. Down to Earth ○ 매일, 아니 거의 매일 우편함이 넘칠 정도의 전시 우편물을 받는다. 다가올 전시를 알리는 단촐한 엽서부터 방문을 촉구하는 듯한 전시 중 도록과 이미 끝나 더 이상 볼 수 없으나 아쉬운 데로 책자로라도 기억하라는 듯한 전시인쇄물들. 이쪽이 '꼭 읽어 보고 간직하라'고 보낸 자료들이 내용은 고사하고 껍질도 벗겨지지 않은 채 쓰레기통으로 쓸려 들어간 경험과 그 사실을 후에 알고 느끼는 쓰디 쓴 기분을 알기 때문에, 가능하면 받은 전시홍보물들과 눈이라도 마주치려고 애쓴다. 사실 매일 매일 축적되는 그러한 전시우편물 열람을 통해 요즘의 미술 흐름이나 작가들의 심리적 경향성을 가늠하기도 한다. 그중 어느 때부턴가 '미(美)'라는 저 아름다운 가상의 하늘 위에 둥실 떠 있던 미술이 정말 현실 생활로 모두 내려온 듯한 인상을 받기 시작했다. 미술이 세속적인 것이 되다 못해 속물적인 것이 되어 가고 있는 양상을 도록 일견(一見)을 통해서도 감지하게 된 것이다. ● 1990년대 이후 한국 현대미술이 현실 땅으로 내려온 것 같은 양상을 띤데 가장 일조한 것은 '일상 담론'이다. 말을 바꿔 동시대 미술에서 가장 히트한 주제어를 꼽으라면 단연 '일상'이 될 것이다. 처음에는 젊은 작가들의 내면적 자기 독백 속에서 소소하고 음울한 일상이 반영됐었다. 그러던 것이 점차 거의 모든 세대와 영역으로 확대되어, 작가들과 언론사 기자들, 미술이론가, 비평가들, 전시기획자들의 작품과 기사와 글과 전시 속에서 일상이 스펙터클하고 다채롭게 디스플레이 되고 있다.
Ⅱ. 일상 속 이숙(異熟)의 공간 ● 왜 작가들이 일상을 다루는가? 그것은 우리의 일상이 문제적이거나 일상적 삶에서 무엇인가 결여되어 있다는 위기의식으로부터 비롯한다. 혹은 모더니즘 미술의 문법에서 배제되거나 억압되어 왔던 작고 파편적이며 주변적인 것들을 복권시키고자 하는 현대 미술의 담론 흐름에서 비롯하기도 한다. 전자의 미술이 현실 삶에 대한 비판적 각성을 통해 그 삶의 세속적 구제를 꿈꾼다면, 후자는 거대담론의 그물망을 빠져나갔던 일상의 단편을 예찬하는 식으로 그 구제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어떤 경우가 되었든 작가들이 '일상'을 화두로 작업하는 근본 배경에는 우리의 일상이 일상에 머무르지 않고, 더 나은 무엇이 되기를 열망하는 심리가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말의 올바른 의미에서 미술의 '일상'은 일상의 복사가 아니라 '일상을 (한 치라도) 벗어난 일상'이다. 그런데 작가마다 그 방식이 다르다고 하겠지만, '일상'이라는 주제가 현재 여기 미술의 트렌드가 된 이후 상이한 작가의 작품(업)들이 매우 비슷한 외양을 띠게 되었다. 펑퍼짐한 일상을 곧추 세울 만큼 예각이 뚜렷한 작품을 만나기가, 트렌드화 된 '일상의 미술'을 거스를만한 힘을 가진 작품을 만나기가 점점 힘들어진다. 그런 미술의 지형 가운데 김주연의 설치작업들은 솟아있다. ● 김주연은 점차 상투화되어 가는 일상을 주제로 한 미술의 흐름에서 상당히 특이한 궤적을 그리며 작업하고 있는 작가이다. 그 특이성은 우선 그녀가 드러난 현실 생활의 단면을 차용하는 식으로 작업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공간 안에 감각과 정서의 공간을 새로이 만들어간다는 데 있다. 이 진행형의 감각과 정서의 공간은 "이숙(異熟)"의 공간이다. "이숙"은 '다른 형태로 성숙함'을 뜻하는 불교 용어인데, 김주연은 자신의 작업에서 이 개념을 일상적 사물 속에서 식물을 키우는 방식으로 실현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작업이 왜 감각과 정서의 공간을 만드는 것인가 하면, 우리 감상자가 그 안에서 조우하는 것이 미적 오브제가 아니라 특정한 경험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씨앗이 발아하여 초록 무성한 식물이 되는 것을 보는 것은 성장에 대한 감각을 일깨우는 경험이다. 게다가 그 무수한 씨앗들이 평범하게 땅에서 자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일상적으로 몸에 걸치는 의복과 그 몸을 의탁하는 소파나 침대 등에서 자라기 때문에 우리는 김주연의 설치작업 앞에서 정서적으로 각성된다. 3 미터가 넘는 웨딩드레스를 급속하게 영토화해 가는 콩과 식물을 보면서 일종의 공포를 느낄 수도 있고, 누군가 앉았던 의자에서 그 몸의 흔적을 따라 발아하는 씨앗들을 보면서 일종의 부재와 상실, 현존과 성장이 교차하며 만드는 복잡한 감정을 경험할 수도 있다. 이렇듯 김주연은 일상 속에 '이숙'의 공간을 만들고, 우리는 그 다르게 성장하는 공간에서 일상과는 조금 다른 감각과 정서를 경험한다.
Ⅲ. 상자 속의 삶을 비집고 나오면 ● 김주연이 이번 포스코 미술관에서 여는 개인전의 타이틀은 『일상의 성소(聖所) Sanctuary in Everyday Life』이다. 이 전시명은 논리적으로는 모순인데, 우리가 아는 한 '일상'과 '성소'는 배치되는 개념이지 영문 번역에서 분명해 지듯 서로 내포관계(in)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성소는 일상과는 차원이 다른 특수한 종교적 공간이고, 일상은 세속적인 장(場)이다. 우리의 의식 속에서 성소가 세속적이지 않듯 일상이 성스럽지는 않은 것이다. 그럼에도 어떤 모순은 논리를 넘어서서 의미의 힘을 증폭시킨다. 김주연의 이 전시명 또한 그 선상에 있다. "일상의 성소"는, 그래서 앞서 썼듯이 일상 속에서 '이숙'의 공간을 만든 작가가 이제 한 단계 더 나아가 일상 속에서 성스러운 공간을 구현해 보겠다는 의미로 읽힌다. 이는 다른 말로 하면 작가가 일상을, 더 구체적으로는 일상에 매몰되어 있는 우리의 감각과 정서를 미술을 통해 세속적으로 구제해 보겠다는 뜻이다. 그런데 어떻게? ● 김주연이 『일상의 성소』전으로 우리에게 표방하고 약속한 일상의 세속적 구제가 어떻게 가능한지 헤아려 보고, 실제로 어떻게 얼마만큼 그 약속이 실현되었는지 작업들로 더듬어 보는 일이 이 글의 본론이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전시장을 글로나마 간략하게 스케치할 필요가 있다. 전시는 크게 3개의 방으로 나눠 볼 수 있다. 아니 보다 적극적으로 전시 주제에 대입해 해석해 보자면, 커다란 일상의 공간 속에 두 개의 성소가 들어서 있는 형국이다. 작가는 전시가 이루어지는 장소가 첨단 비즈니스의 중심지인 강남 테헤란밸리의 포스코 센터인 만큼 전시의 주 관람객을 인근의 사무원들로 상정했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전시장 중심에는 고층 빌딩을 상징하듯 플라스틱 상자가 수직으로 세워져 있다. 그 앞으로는 몸체가 우람한 소파(아마도 대기업 임원의 접대실 소파가 이런 크기가 아닐까 싶은데)가 솜으로 된 속살을 드러낸 채 빌딩-상자와 마주보고 있다. 상자의 안쪽으로부터는 전시 설치 기간 내내 키운 잡풀이 뚫린 구멍들마다 비집고 나오고 있으며, 소파의 솜에서는 씨앗들이 마치 그 자리에 앉았던 누군가의 흔적을 기억한다는 듯한 형상으로 자라고 있다. 여기서 조금 떨어진 벽에는 세 개의 옷걸이가 있고, 오직 하나의 옷걸이에만 붉은 코트가 걸려 있다. 이 진홍색 코트에서 또한 예의 씨앗이 안감에서부터 어찌 보면 섬뜩한 녹색을 퍼트리며 성장하고 있다. 두 개의 옷걸이에는 그 성장(成長 혹은 盛粧)이 부재. 이 사물들과 식물들의 공간과 인접한 곳에 두 개의 방이 설치되어 있다. 두 성소이자 두 설치작품인 여기는 이름하여 「기억지우기」와 「자신에게 말 걸기」이다. 성소라는 것이 으레 그런 분위기를 띠듯이, 이 두 방은 상당히 정적이고 명상적인 태도를 갖도록 조성되어 있다. 「기억지우기」 방에는 소금이 담긴 유기적 형태의 나무통과 의자가 7 세트 띄엄띄엄 놓여 있어, 이 세속의 미술관 속 성소를 찾는 이들은 소금에 발 담근 가운데 싫고 아팠던 기억을 지울 수 있다. 크게 보면 「자신에게 말 걸기」 또한 「기억지우기」와 비슷한데 성물(聖物)과 성스러운 행위가 다르다. 여기에서 성물은 침대로 써도 좋을 만큼 커다란 연두색 소파들이고, 그것들이 서로 시선이 교차되지 않도록 정교하게 배치되어 있어, 누군가 잠시 몸 뉘여 쉬며 스스로의 내면에 말 거는 성스러운 행위를 무언중에 권하고 있다. ● 이러한 설치작업 혹은 일상 속 성소의 건축에서 현실 삶에 매몰된 우리의 감각과 정서는 어떻게 세속적으로 구제될 수 있을까? 김주연의 그러한 의도가 성공하기는 한 것일까? 이에 대한 답은 무엇보다도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일상의 성소』를 방문하고, 그 속에서 무엇인가를 경험한 뒤 내려야 할 것이다. 조금 먼저 그 성소를 방문했고, 조금 많이 현대미술을 접한 내가 내리는 답은 우선 김주연의 의도가 성공했다는 것, 그 세속적 구제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먼저 일상을 상투적인 차원에서 재현하지 않고, 오히려 일상의 안에 '성소'라는 특수성을 삽입함으로써. 두 번째로는 살아있는 것을 미술 안에서 박제시키는 것이 아니라 살도록 키움으로써. 세 번째로는 김주연 특유의 감각과 손길이 사물과 식물을 정교하게 세공함으로써. 이 세 가지 방식에 의해 결과적으로 전시는 '일상'을 차이지게 드러냈다.
Ⅳ. 일상의 성소 혹은 세속적 구제 ● 일상은 우리의 경험이 거의 무의식적으로 생성되고 퇴적되는 장이다. 의식하지 않는 가운데 매일 매일이 관성적으로 반복되기 때문에 일상인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일상은 완전히 똑같은 날들의 반복이 아니다. 들뢰즈가 현대적 삶의 특징이라 규정했듯이 우리는 일상의 "안팎에서 지극히 기계적이고 천편일률적인 반복들에 직면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반복들로부터 끊임없이 어떤 작은 차이, 이형(異形), 변양(變樣)들을 추출해 내"는 것이 바로 우리의 과제이다.(G. Deleuze, 『차이와 반복』, 18ff) 한 작가가 미술에서 일상을 다룬다는 것은 이러한 차원에서, 즉 반복으로부터 차이를 만들어내야 하는 우리의 과제를 예술로 수행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자칫 나의 주장이 당위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작가가 일상의 표면 혹은 단면만을 반복 재현할 때, 애초부터 그 작품은 일상을 다루는데 실패한 것이다. 왜냐하면 현실 삶의 일상은 본래적으로 차이를 내포하고 있으며, 예술은 그 반복 속의 차이를 포착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일상에 대한 상투화된 주제나 표현을 따르는 미술은 '미적 가상'이라는 관념론 미학을 따르는 미술과 현실 삶에 발붙이지(down to earth) 않는다는 면에서 공히 공허하다. 이와는 달리 김주연은 일상으로 완전히 내려오지도 않고, 그렇다고 저 관념의 공간에 떠 있지도 않는, 말하자면 그 중간 어딘가에서 미묘한 감각을 발휘한다. 그녀가 "이숙"이나 "일상의 성소"를 말할 때, 그 개념이나 작업의도를 현실 공간에서 실현할 때, 그녀의 미술은 일상을 넘어서는 동시에 신적이거나 종교적인 구제를 지금 여기로 순간 끌어오고자 하는 것이다. 많은 경우 미술관이나 갤러리에서 이루어지지만, 때로는 대학의 뒷마당을 터전으로 삼거나 초등학교 지하실까지 내려오는 김주연의 설치작업은 그 물리적인 장소에서 새로운 생명을 싹틔움으로써 그 공간이 갖고 있는 상투적 일상성을 구제한다. 또한 자신의 작품을 완결된 오브제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진행에 맡기거나 감상자의 참여에 의존케 함으로써 미술의 사물성(objecthood)을 구제한다. 우리의 일상이 진정 어떤 실재를 하고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하지만, 미술이란 그 일상의 실재성에 다가서고자 하는 시지프적 과제라는 것은 안다. 그 과제는 김주연의 "일상의 성소"처럼, 현실 속에서 세속적이자 예술적이며 성스러운 구제를 반복적으로 수행해 보는 일이다. 물론 실패해 언제나 다시 시작할 위험을 안고. ■ 강수미
Vol.20050920c | 김주연展 / KIMJUYON / 金周姸 / install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