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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5_0925_일요일_01:00pm
주최_일본군 「위안부」 할머니와 함께하는 통영거제시민모임
통영시민문화회관 대전시실 경남 통영 동호동 230-1 Tel. 055_648-8417
윤갑용의 『Who's History』 이야기 ● 원천적으로 미술이 이미지를 생산하는 작업이긴 하지만, 불과 20년 전만 하더라도 지금처럼 바뀌리라고는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무리 미술이 다양한 재료를 차용하고, 이용해서 이미지를 재현하거나, 새롭게 만든다고 해도 물질을 벗어나서는 결코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상상할 수 없었던 현상이 소위 현대미술이라는 이름으로 일어나고 있다. 영상으로 완벽하게 만들어진 이미지, 너무나 실제 같아 오히려 현실보다 더 실제 같은 초-사실의 이미지를 매일매일 경험하는 세상이 된 것이다.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 의 벌써 20여전 전에 자신의 대표저서인 「시뮬라시옹Simualtion」에서 예견했던 일이긴 하지만, 이제는 피부로 느낄 정도가 되었다. 어쩌면 장 보드리야르가 예견한 것보다 더 현실을 능가하는 이미지가 온 세상을 뒤덮고 있는 것이다.
윤갑용의 「Who's History」는 이런 선상에 있다. 그의 가상의 이미지는 초-실재와 같은 사실성은 없지만 대신에 우리의 역사와 우리의 슬픔이 들어있다. 그의 작업을 일상적 수준에서 이해하면 움직임 하나하나를 잡아서 그것을 컴퓨터로 옮겨 색을 입히고, 그 움직임을 연결시키는 것으로 진행된다. 「Who's History」의 화면은 입으로 가득하다. 노래를 부르는 입이 하나에서 둘로 그리고 셋으로 그리고 불규칙적인 숫자의 화면으로 나뉜다. 그러면서 입과 얼굴이 화면을 가득차고 '미사'(missa, Mass) 음악이 흐른다. 미사는 성당에서 중요한 의식에 사용되는 음악이다. 화면의 입은 계속해서 미사를 부르면서 할머니의 이미지가 삽입되거나 오버랩 된다. 이런 과정은 이미지의 틀을 만드는 것이다. 즉 이미지의 구조를 짜는 것이다. 이미지의 구조에 이어지는 작업은 감성을 담아내는 과정이 있다. 감성을 담아내는 과정은 구조적으로 만들 수 없다. 물론 색채나 표정이나 움직임에 의해 좌우될 수 있기는 해도 온전히 감성의 틀을 표현해내는 것은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윤갑용 작업에는 묘하게 보는 사람의 눈과 마음을 잡아당겨 묘한 감정을 느끼게 만들어버리는 매력이 있다.
윤갑용이 만든 이미지는 회화된 인간의 얼굴이다. 웃고 있는 표정에 우는 감정을 가득 담고 있는 모습이다. 한마디로 이런 표정이라고 규정하기 힘든 복잡한 얼굴이다. 아니 아무런 표정이 없다고 말해도 좋을 듯싶다. 이 남자는 가상의 인물, 실재 존재하는 인물이 아니다. 이 작업은 정확히 말하면 세상에 없는 새로운 기표를 만드는 것이다. 아직은 기의가 만들어지지 않은 기표이기도 하다. 또 하나의 이미지(사진)는 실재를 대신하는 기표이다. 기표와 기의가 일대일 대응을 하는 사진이다. 즉 할머니의 사진과 가상으로 만들어진 이미지의 대결인 것이다. 여기에 많은 대결과 투쟁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기표가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과의 대결, 기의가 들어있는 것과 비어있는 것, 그리고 역사의 관점에서 보면 과거와 미래가 만나는 것과 지나왔던 세대와 다가올 세대(다가올지는 모르지만)와의 대비를 통한 투쟁과 대결이다. 그리고 이것들의 대비는 현실의 역사와 가상의 역사, 지난한 역사와 만들어갈 역사의 대결이기도 하다. 이 모두는 결국 내면세계와 외면세계의 결투이며 투쟁이다. 하지만 이것들은 언제나 우리가 의도하거나 목적한 방향으로 흘러들어가지 않는다. 어떤 말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 사전을 뒤적일 경우, 그 말의 정의는 다른 여러 용어의 집합으로 형성되어 있다. 그래서 이 말이 가지고 있는 기표의 의미를 알기 위하여 또 다른 기표를 찾아야 한다. 그 말의 의미는 다른 용어들과 변별되는 차이에 의해서 영향을 받고, 기표는 기의로 전환되고 기의가 다시 새로 찾아야 할 기표로 끝없이 순환되는 과정을 되풀이하며 결국 최종적인 의미는 끝없이 연기되고 지연되고 마는 것이다.
이처럼 어떤 기호의 의미는 다른 기호들과 '공간적 차이'(spatial difference)와 '시간적 지연'(temporal deferment)에 영향 때문에 절대적인 의미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의미는 지연된다. 데리다Jacques Derrida가 말하는 '차연'(差延, differance)이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역사는 결코 일어나기를 의도하지 않았던, 하지만 엄청난 비극을 경험하고 말았다. 그 지난한 역사의 기표가 바로 할머니의 사진들에 고스란히 담겨있는 것이다. 바로 윤갑용의 「Who's History」는 우리역사의 차연이다. 그 불확실한 의미가 일어났던 지난한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결코 우리는 지난한 역사를 외면해서는 않된다. ■ 임창섭
Vol.20050920b | 윤갑용 영상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