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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5_0923_금요일_05:00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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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예환의 색채평면과 제기祭器이미지 - 색채서정추상의 변주를 보며 ● 추상적인 언어로 서정적抒情的인 감정을 표현한다는 것은 일종의 보편성에 대한 도전이다. 그러니까 낙엽이 떨어지는 정경情景에 대한 일상적인 감성반응을 서정이라고 말 할 수 있다면 서정추상이라는 말에는 잔인하게도 그 감성을 뒤엎는 부정적인 감성의 뜻이 함의되어있다. 전후의 유럽이 허무라는 이름으로 열병을 알았던 서정추상은 미국으로 건너가 세속주의문화와 결탁하면서 서정추상이라는 이름 앞에 색채가 더 붙게 되었다. 이른바 색채서정추상양식이다. 그들은 유럽인 특유의 무겁고 침침한 화면을 버리고 밝고 눈부신 색채를 끌어들이면서 미국적인 감정에 잘 어울리는 서정을 추상적으로 표현했다. 이들의 서정추상은 신(형이상학)을 잃어버린 인간의 허무감보다는 중세적인 신비주의에 대한 매력이 깔려있다. 시대적인 상황이야 어떻든 형식적이긴 하지만 우리의 현대미술에도 이런 시도가 있었다는 것은 여러모로 의미가 깊다고 할 것이다.
안예환의 작업은 색채를 평면으로 다루면서 그 색면色面 자체를 미적인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일단은 미국적인 표현양식의 맥락을 있는 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작업이 주로 다양한 색면色面 만들기에 열중하고 있음은 일차적으로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라고 할 수 있다. 선(線)을 활용하는 방법은 다르지만 그의 선도 단순한 선묘線描에 의존한다는 것은 그렇게 이해되는 부분이다. 그것이 일직이 마티스나 클레가 남긴 오늘의 과제였다고 볼 때 이 화가의 작업도 같은 문법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크게 보면 안예환의 작업은 모노크롬에 가까운 색채를 균질적均質的으로 바닥에 펼치면서 그것의 과정적過程的인 프로세스를 조율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과정자체가 일차적으로 서구적인 화법으로 볼 때 이데올로기의 포기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아직도 해체解體라는 말은 소화하기 힘든 개념으로 남아있지만 어떻든 이 화가의 일차적인 작업에는 일종의 '무의미의 의미'가 그 근간을 이루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화가의 미에 대한 이런 소박성素朴性은 이미 대학원시절에 그 일단이 드러나고 있다. 그때 우리는 비트켄쉬타인의 동어반복同語反覆을 심각히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때 안예환은 여러 차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를 되뇌어 강의실을 즐겁게 만들었다. 이 말은 청담스님의 유명한 화두이다. 청담은 그 때 막 입적했다.
안예환의 색면 만들기는 그의 불쑥 내미는 생각들이 우연이 아니라는 말해 주기에 충분하다. 그가 사용하는 색채는 주로 적, 청, 황, 녹색이 기본이지만 그 색(안료)들은 지극히 절제되고 검소하고 소박한 얼굴로 우리 앞에 조심스럽게 나타난다. 그 색들은 균질적인 의지를 지녔다. 그러면서도 화면에 나타나는 색면에는 두께와 밀도의 차이가 느껴지며 낙서와 같은 붓질을 통해 역동성과 우연성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이를 고요함 속의 움직임靜中動이라고 하고 동시에 '무의미의 의미'를 실현하는 구도의 과정으로 이해한다. 그의 작업에서 색면은 안정만을 의도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직선과 기하학적인 꼴의 날카로움은 긴장과 불안감의 요인이기도 하다. 이 화가가 낙서의 붓질을 여기저기에서 적절히 가하는 것은 위기의 긴장감을 감추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방법이 단순히 미국적인 것의 모방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동양화의 교훈이라는 것은 그의 작업에서 드러난다. 그는 수묵의 운韻, 과 색과 색이 마찰하는 대목에서 이 번지기의 화음법和音法을 시도하고 있다. 이는 그의 작업이 동양화의 기반 위에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색채서정추상은 서구미술 권에서는 일종의 국제주의 언어로 통한다. 하지만 이 양식이 현실성을 희생하고 얻는 일종의 대리보충이라는 사실이라는 것은 여러 저명한 이론가들이 지적하고 있는 바다. 사회도 자연과도 단절된 이 미술양식은 이미 언어소통 수단으로서는 허공 중에 붕 떠버린 신화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고 나는 믿는다. 나는 이점에서 다시 한번 안예환의 이번 작업에 주목하게 된다. 그는 서정추상의 의사소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호記號를 주제로 내 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제사풍속을 화두話頭로 전면에 내세운 것이다. 기호는 그 자체가 사물을 지시하는 일차적인 언어이지만 사용방법에 따라 많은 이야기와 의미를 한꺼번에 함축하는 통이 큰 언어로 소통이 가능해 진다. ● 안예환의 제기도 그런 의미의 기호라고 할 수 있다. 색채평면 위에 그는 제기祭器를 단순한 선으로 되풀이 반복하여 그린다. 그것이 화선지에 유교적인 이데올로기를 나타내는 산수나 사군자, 기명절지器皿折枝를 그렸던 옛 화가들의 그림과 무엇이 다른지는 한번 곰곰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여백은 곧 동양적인 특유의 서정추상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게 때문이다. 그가 그린 기호가 오늘의 우리에게 어떤 방식으로 소통될지는 두고 볼일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제시한 화두話頭가 오늘의 우리에게 절실한 주제라는 것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제사는 우리의 삶을 수평적으로 수직적으로 묶는 소리 없는 새 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화가의 작업이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주목하고자 하는 이유이다. ■ 박용숙
Vol.20050917c | 안예환 회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