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린 걸음

김병훈 사진展   2005_0916 ▶ 2005_1030

김병훈_흑백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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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5_0916_금요일_06:00pm

작가와의 대화_9월24일 / 10월22일_토요일_03:00pm

갤러리 진선 서울 종로구 팔판동 161번지 Tel. 02_723_3340

갤러리 진선의 세 번째 기획전인 김병훈 사진전『느린 걸음』이 9월 16일부터 10월 30일까지 열린다. 이번 전시의 제목인『느린 걸음』은 대상에 대한 김병훈만의 독특한 시선을 담아내는 작업방법을 표현하는 말이다. 다른 이들은 무심코 지나치는 일상적인 대상을 김병훈은 오랜시간동안 반복적으로 관찰하고 느끼면서 산책하듯 사진을 찍고 있다. 이러한 '느린 걸음'과 같은 작업방법을 통해 김병훈은 대상의 솔직한 모습을 발견하고 그들의 모습을 정제된 화면 안에 담아내었다. 이번『느린 걸음』展에서는 크게 "비", "빛" 그리고 "휴식"이라는 흑백화면에 담긴 세 가지의 사진묶음이 김병훈의 짧은 기록과 함께 에세이처럼 펼쳐진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상의 본질을 포착한 김병훈의 사진과 그가 덧붙인 짧은 기록은 이 가을 여유를 찾는 관객에게 마음의 휴식과 잔잔한 여운을 전해줄 것이다.

김병훈_흑백인화

『내겐 슬픈 것들』 서문 중에서 ● 김병훈은 도시의 일상적 형상들을 찍는다. 그러니까 대체로 평범한 것들이다. 거리의 풍경, 지나는 사람, 진열장, 일상적인 기후, 나무와 햇살, 여행의 인상들, 식물의 줄기와 잎사귀 등이다. 그러나 그렇게 찍힌 사물은 작가의 사진의 프레임과 긴밀한 실존적인 관계 속으로 묶여 들어가는 동시에 그 스스로 말을 하게 하고, 그 대상이 지닌 이상한 힘에 우리의 시선을 새삼 주목시킨다. 김병훈의 사진은 정서적이고 감상적인 힘이 대상에 비해 다소 앞선다는 느낌이지만 그의 사진은 나름대로 대상을 해석하는 방식이자 장치의 일관됨을 보여준다. 사진이 사진 찍는 자와 대상 간의 긴장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라면 그의 사진 역시 침묵 속에 많은 것을 함축해서 보여준다. 그는 도시의 비근한 일상 속에서, 삶에서 어떤 신비를 찾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그의 사진은 그 현실에 독특한 빛을 던져준다. 도시를 이루는, 일상을 축적시키는 불협화음적인 이미지들은 사진 속에서 새로운 모습을 띤다.

김병훈_흑백인화

평범함으로부터 얻어진 이 요소들은 슬픔과 고통, 기쁨과 진부함의 원천이며, 모든 권태로움에 떨림을 낳는다. 현재의 삶의 현실과 현실 속에 숨겨진 복잡한 문제들의 뉘앙스, 모습들을 기록하는 그의 시선은 현실에 밀착되어 있다. 사색이나 몽상이 아니라 그때그때 자신의 육체와 감정에 부딪치는 순간을 기록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러니까 그의 사진은 한편으로는 외부의 충격과 긴장에서 오는 삶의 체험과, 다른 한편으로는 기억과 추억, 무의식의 부분에 축적된 비밀스런 내적인 경험 사이에 복잡하게 얽힌 망 속에서 이루어진다. 아울러 이 빠르게 변화하는 현실에 대한 특별한 입장과 연관되어 있다. 그러니까 김병훈의 사진은 바로 그러한 심리적인 의기 의식에 기반을 두고 있어 보인다. 인간의 마음보다 더 빨리 변하는 도시의 형태, 일상의 모습에서 그가 겪는 미묘한 심리적 굴곡과 위기, 강렬해지는 추억 등이 그의 사진이다. 결국 그 사진은 노스탤지어에 가깝다. 현재 그가 살고 있는 세계와 과거에 살았던 세계와의 괴리를 느끼는 데서 오는 어떤 상실감, 아픔이 사진 속에 배어 있다. 그는 모든 것을 새롭게 본다. 그래서 그는 항상 도취되어 있다. 결국 그는 고독한 산보자가 되어, 대도시라는 '인간의 사막' 속에서 관조의 즐거움에 빠져 거리를 서성거린다. 그리고 그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찾는다. 그의 눈에 비친 이 현실은 지금이라는 시간에의 의식과 연결되어 있다. 세상의 공간을 산책하는 이의 시선에 걸린 모든 풍경과 모든 느낌은 적조하다. 그는 그렇게 하염없이 걷는다. 공간 속으로, 사람들 사이로 그리고 사물과 사물의 틈 사이로… 어쩌면 그 틈으로 들어가는 일이 그의 일과 같기도 하다. 그렇게 다가오고 눈에 비치고 가슴으로 들어와 박힌 모든 존재는 결국 낯선 부재다. 김병훈은 그렇게 존재의 틈 사이로 마냥 들어간다. 들어가고 싶어한다. 사진기의 렌즈는 그 틈을 벌리고, 만들어 놓는 유일한 매개다.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경이롭고 애잔하고 슬프며 어둡고 또한 밝다. 그는 공간 속 사물과 빈번한 만남을 갖는다. 그 일이 그에게 유일한 삶의 일이다. 지난 소중한 기억을 찾아주는 매개물인 세상의 모든 것, 모든 느낌을 가능한 한 온전히 기록하고자 한다. 그것은 추억과 기억, 시간을 기억하고자,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이기도 하다.

김병훈_흑백인화

작가는 하염없이 걷는다. 그에게 이 보행은 일종의 「보행 명상」이다. 육체를 스스로 짊어지고 공간 속으로, 세상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세상의 고요에 사물과 인간들은 비로소 소음을 낸다. 그것들은 자신의 존재를 또한 그렇게 슬프게 반사한다. 눈이 부시다. 햇살은 그 상처난 몸을 더듬는다. 거기 그 육체의 적나라한 나신이 슬며시, 불현듯 부감된다. 그러니까 빛이 부재하다면 존재는 사라진다. 그래서 그는 그런 빛들을 안타깝게 추적한다. 서울 공간 곳곳을 산책하고 그렇게 해서 눈에 걸려든 사물들을 찍었다. 그리고 그것들을 반복해서 찍는다. 그 사물의 피부에는 동심과 추억이 묻어 있다. 그는 사물을 보면서 기억에 머문 채 살고 있다. 그 기억을 담고 있는 거리, 상점의 쇼윈도우, 낡은 책의 표지, 나무와 햇살 등 어떤 순간의 기억을 반복하여 상기시키는 매체들이 그가 찍는 대상들이다. 기억을 유지하기 위하여 작동하는 시선과 촬영, 그리고 그렇게 해서 찍힌 사진은 기억하는 물질인 두뇌의 보완물이다. 그는 오랜 시간 동안 일정한 공간을 반복해서 산책하면서 그것의 소멸을, 변화를, 그것도 급변하는 상들을 기록해 왔다. 그에게 변화란 낯섬과 안타까움, 그리고 일종의 변질이고 죽음이다. 그것들은 그에게 슬픈 감정을 부풀려준다. 슬픔을 기록하는 것, 지나간 것들을 상기하는 것, 기억과 향수를 기록하는 것이 이미지였다면 그의 사진 역시 그러한 욕망에서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김병훈_흑백인화

김병훈은 일기와 같은 사진을 찍는다. 그는 텍스트가 있는 사진을 찍고, 자신의 하루하루를, 매일의 산책을, 특정한 공간에서 만난 사물들과 사람의 피부를 찍는다. 무엇보다도 그는 그렇게 거닐면서 자연스레 추억과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모든 사물들을 찍고 있다. 그것은 일상이 되었다. 그래서 그가 찍은 사진은 지극히 안락하고 또한 편하다. 현재의 시간을 살고 있지만 현재를 과거로 끌어들이던 자성에 의해 자신을 둘러싼 다른 삶을 정지된 기억의 선으로, 그 죽음의 선으로 끌어들인다. 그것은 과거의 집착에 따른 희생물들이다. 하지만 기억으로 정지하는 시간은 단지 멈추게 하고픈 순간들, 아름다운 추억의 순간만은 아니다. 반대로 지울 수 없는 강한 사건들, 대개는 상처로 기록되는 사건들 역시 기억의 형식으로 우리의 현재 속에 머물며, 우리의 신체 속에 남는다. 트라우마(Trauma), 그것은 감당하기엔 너무도 고통스러운 의식에 지워진, 그러나 결코 지워지지 않은 채 무의식의 영역에 살아남아 있는 과거다. 그것은 집착의 다른 형태다. 끔찍한 강도의 기억말이다. 아주 작은 자극만으로도 되살아나는 가슴아픈 상처들, 그 상처들을 오히려 더 찾아나서고 있다. 우리들 인간은 살면서 그렇게 지워지지 않는 기억에서 자유롭지 않은 상처를 지니고 있다. 모두가 불현듯 과거의 시간, 멈추어진 시간의 자성 속에 갇혀 있는 것이다.

김병훈_흑백인화

모든 사진에는 덧없이 흘러가 버리는 순간에 대한 집착으로서 「지금, 여기」의 일회적 현존에 대한 지극한 관심, 강박적 집착 같은 것들이 스며들어 있기도 하다. 그가 찍은 사진에는 시간의 흔적, 시간의 개입이 들어 있다. 모든 생명체들, 사물과 세계는 시간의 지배를 받는다. 어쩌면 인간은 시간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고자, 시간의 힘을 막고자 이미지를 고안했는지 모르겠다. 이미지를 빌어 비로소 시간의 입김이 범접하지 못할 정지와 영구성을 만들었다. 이미지는 인간의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 시간의 위력에 대항하기 위해 고안한 장치다. 사진은 그런 장치, 기능을 가장 구체화시킨 매체다. 모든 사물과 세계를 네모꼴의 세계에 가두어 사물을, 시간과 공간을 정지시키고 공간적, 시간적 단절을 보여준다. 시간의 지배로부터 일시적으로 풀려난 세계가 사진 속의 세계다. 작가는 97년부터 최근까지 찍은 사진들을 한자리에 모았다. 그것들 모두는 침착하게 조율된 흑백사진들이고, 우리네 일상의 비근한 사물과 풍경들이다. 이렇다 할 긴장감이나 극적 고조감은 납작하게 눌려진 채 다만 감상적이고 낭만적인 분위기만이 슬쩍 융기되어 있어 보인다. 적조함과 향수, 고독이 배어 있는 사진의 전형성 역시 엿보인다. 사진은 근원적으로 침묵이지만 그의 사진은 그런 고독감에 깊숙이 잠겨 있다.

김병훈_흑백인화

그는 또한 사진의 소재를 가까운 곳에서, 소박한 데서 찾는다. 그리고 아쉬워하면서 뒤돌아 본 것을 찍는다고 한다. 그는 늘상 그런 아쉬움, 상실감, 안타까움의 시선으로 대상을 바라본다. 사진가가 찍어내는 것은 대상이라기보다는 어쩌면 자기 자신, 자아일 것이다. 피사체를 빌어 스스로를 투사하는 것, 다시 말해 사진가는 의미를 추구하기보다는 스스로를 무의식적으로 복제한다. 이미 자신의 현실의 한 부분을 선택해서 사진에 담는다는 행위에는 의미부여가 들어가 있으며, 무엇인가를 본다는 것은 스스로의 삶에 의미있는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어떤 현상을 의미있게 보고 이를 사진으로 담는다는 것은 그러한 현상이 거기 있기보다는 그러한 현상이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사진가는 스스로가 주목하여 형상화시킨 내용을 타자와 공유하고자 그의 사진을 공개한다. 의미와 문맥 속으로 보는 이의 시선과 마음을 초대한다. 말을 건네고 말을 기다리는 것이다. 보는 이의 감정과 사고를 요구한다. 그래서, 한 장의 사진은 외부세계를 드러내는 것이라기보다는 스스로의 내부세계를 드러내는 것에 가깝다. 사진은 단순히 대상을 드러내고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물, 사물과 사물 혹은 환경과의 관계를, 그리고 그 관계성을 주목시킨다. 그의 사진 역시 그런 미묘한 관계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것은 명료하지 않다. 은밀한가 하면 모호하기도 하고 선명한 것 같으면서도 애매하다. 메를로 퐁티가 멋지게 말했듯이 "표현이란 마치 어느 누구도 어디로 나아가고 있는지를 알 수 없는 안개 속으로 내딛는 걸음과 같은 것"이다. 그가 찍은 대상은 늘상 자신이 이전에 보았던 것, 만났던 것이 지금은 변화되어 다시 자신 앞에 존재한 것들이다. 그것은 분명 자신의 기억 저편에 자리한 것들이다. 이 경우 기억이란 단지 과거에 관한 것이 아니라, 현재의 시제를 갖는다. 그것은 멈추어선 현재, 과거로 돌아가기를 거부하며 지워지길 거부하는 현재, 그러니까 변이를 멈춘 현재적 삶이며, 멈추어선 삶의 시제다. 여기서 기억이란 주어진 어떤 삶, 혹은 현재라고 불리는 어떤 하나의 점을 멈추게 하는 의지의 형식이다. 그는 지난 시절, 시간에 보았던 사물들의 기억을 다시 확인한다. 혹은 사라지고 없어진 자리에서 그 이전의 자취를 떠올린다. 지난 시간이 기억 속에 자리한 사물들은 자기 동일성, 정체성을 유지시켜 주는 매개다. 동일성·정체성은 현재의 삶을 멈추어선 시간성 속에 붙들어 맴으로써 지워지지 않는 기억의 형식으로 변환시키는 고정의 형식이며, 멈추어선 삶을 당연한 현재성의 시제 속에 고정하고 유지하는 재생산의 형식이다. 망각이라는 만행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혹은 망각으로부터 소중한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우리는 사진의 기념이라는 방식의 보충행위를 한다. 그것은 무의식적인 의지의 영역인 기억과 망각의 문제를 의식으로, 표면으로 떠올리기 위한 의식적 상기행위가 사진을 찍는 일, 그것을 앨범의 갈피 속에 가두는 일, 수시로 꺼내 보는 일이다. 사진은 과거를 현재로 불러낸다. 하지만 그것이 수행하는 것은 정확하게는 과거의 사건에 다시금 현재를 연결시키고, 다른 곳으로 흘러가고 있는 현재를 과거의 그 방향으로 되돌리려는 안쓰러운 노력일 뿐이다. ■ 박영택

Vol.20050916a | 김병훈 사진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