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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5_0907_수요일_06:00pm
공 갤러리 서울 종로구 인사동 23-2번지 Tel. 02_735_9938 gonggallery.com
가상에서 구원을 찾다 ● 윤상훈의 근작들은 우선 개자원화전으로 대표되는 전통산수화와 그것을 둘러싼 동양화단에 대한 도전과 공격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 적어도 그의 말을 들어보면 그렇다. ● "예술가로 발돋움하는데 있어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과정이라 할 수 있는 대학 4년 내내 우리들은 개자원을 항시 끼고 밤낮으로 죽은 지 300년 된 중국 유령 화가들의 생전 작품을 베끼기에 여념이 없다. …날개를 달게 된 개자원의 산수는 우리, 또는 나의 의견이나 선택과는 상관없이 그들 자신의 결정대로 행동하게 된다. 물론 이렇게 키치적인 날개를 단 산수화는 비쥬얼적으로 전통 동양화의 정서, 혹은 정신에 반한다. '고전적 팝'을 표방하며 먹과 호분으로 위장한 검정, 혹은 흰색 아크릴 물감으로 그려진 선과 날개 등은 상대적으로 장지와 전통 채색기법의 배경과 이격되며 보는 이들에게 재료의 혼돈, 나아가서 회화 장르의 혼동을 초래한다."_작업노트에서 ● 그가 보기에 개성이 중시되는 현대 미술에서 고루한 전통의 계승과 답습만 바라볼 것을 요구하는 오늘의 동양화와, 동양화단의 풍토 때문에, 동양화는 위축되어 퇴조의 길을 걷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개자원의 산수에 날개를 달아 개자원을 모독하고, 그에 자유를 부여하고 그럼으로써 그것을 부수고자 한다. 여기에는 전통, 곧 아버지가 무력해진 데다가 추태까지 부렸으므로 퇴장당해 마땅하다는 권위의 소멸에 대한 승인이 은연중에 깔려있다. 때문에 그의 근작들에서 전통적 요소에 대한 탐색과 존중은 소도구적 차원의 대상으로 격하된다. 또 전통 산수화에서 미덕으로 되어있는 비움과 감춤의 품위는 허위의 제스처로 격하되고 대신 때로는 장지와 먹의 언어로, 때로는 아크릴의 언어로, 또 때로는 소금의 언어로 알록달록하게 이야기하는 떠들썩한 수다의 몸짓이 들어선다.
하지만 윤상훈에게 있어서 개자원은 그 자신의 어떤 부분이다. 그 부분은 사실상 나를 끊임없이 억압하고 있는 자의식의 대상이 된 부분이다 (스스로 공언하듯 그는 어쩔 수 없이 결국 동양화가인 것이다!). 하지만 위에서 말한 대로 작가는 그것을 버리고 싶고 부수고 싶다. 그 상황에서 떠나고 싶고 그 현실을 바꾸고 싶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부수고, 그 상황을 파괴한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의 일부이기에 파괴는 동시에 파괴자인 그를 우스꽝스러운 어릿광대로 만들어 버리고, 작품은 허위와 위선의 냄새를 짙게 풍기는 키치적인 것이 된다. 결국 장지와 먹, 아크릴과 소금, 호분 등 맥락을 달리하는 갖가지 재료의 혼용은 전통을 모독하는 계기면서 동시에 키치적인 화장을 드러내는 계기로 볼 수 있는 것이다. ● 그런데 여기서 주목을 요하는 대목은 윤상훈이 이렇듯 우스꽝스러운 허위와 모순의 이미지를 창출하는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허위, 가상을 소망하는 것으로 드러낸다는 점이다. '가브리엘의 날개'라는 도상내지는 소금이라는 재료가 나타내는 구원의 세계가 그것이다. 그에게 있어 이 구원의 세계는 첫째로는 '아버지의 언어로 아버지를 배격한다'는 자기모순을 극복하는 기제면서 동시에 자신의 공상 속에 자리한 일종의 유토피아적인 전망을 드러내는 기제다. ● "『가브리엘 프로젝트』는 표피적으로는 획일화되고 안일하기까지 한 한국 동양화단이 안고 있는 고질적인 문제점에서 탈출하는데 가장 큰 의의를 두고 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내 작품은 '인간(나)에 의해 선택되어지는 어떤 대상에게 자유의지 부여'를 주제로 삼고 있다."_작업노트에서 ● 내 생각에 이렇듯 일단 현실을 부인하고 가짜 현실 만들기를 지향하는 태도는 실은 근래 가상성(virtuality) 담론과 관련하여 자주 논의되는 영상 세대, 혹은 디지털 세대의 전형적인 특성 가운데 하나다. 가상의 인터넷 공간에 자신의 대리자를 설정하고, 그 대리자를 치장하고, 그로 하여금 자신을 대신하여 갖가지 행동을 하게끔 역할들을 부여하면서 재미를 느끼는 세대 말이다.
"예술작품 제작에 있어서의 유일신은 바로 작가 자신이다. 존재하지 않던 무언가를 자신의 숨결과 정신을 불어넣어 탄생시킨다는 점에서 창조주의 그것과 상통한다. …난 내가 창조해낸 피조물을 좀 더 효율적인 설명으로 대중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가브리엘에게 부여한다."_작업노트에서 ● 동양화, 혹은 한국화 계열에서 이 같은 키치적 감수성, 아니 디지털적 감수성을 발견하는 것은 대단히 흥미로운 일이다. 이와 연관된 행위와 작품들이 향후 동양화의 진로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점도 분명해 보인다. 그렇다면 그 지향점은 어디인가? 가브리엘의 날개는 어디로 향할 것인가? 현재의 나로서는 그것이 어디로 향할지 가늠할 수가 없다. 작가는 알고 있을까? 날개를 단 그의 피조물이 어디로 날아갈지. ■ 홍지석
날개 - 절름발이의 꿈 ● 자유라는 단어의 개념은 유한한 존재인 인간에게 있어 끊임없이 짝사랑을 하게 하는 매력을 지니고 있다. 구속과 굴레를 벗고자 하는 마음이 그 근저에 깔려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구속과 굴레를 벗어난다고 했을 때, 무엇의 구속과 굴레인가? 그것의 수식어가 될 수 있는 것은 사회와 역사적 상황에서 빚어진 이데올로기 일 것이다. 즉 이데올로기 내부에 자리 잡고 있는 가치(價値)의 문제에서 빚어지는 갈등이 인간으로 하여금 자유를 앗아간다는 느낌을 부여해주는 것일 것이다. 그런데 하나의 참 진리처럼 추상적으로 믿고 있는 자유는 실은 매우 상대적이며 유동적이라는 사실이다. ● 자유라는 단어의 개념을 다소 진부하게 설명한 것은 일반적으로 '날개'라는 물체가 자유와 곧잘 연결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 하나 더 있다. 이미 사회 규칙에 영입되어 있는 '자유=날개'는 사실 개개인에게 굉장히 부담스럽고 위압적으로 다가올 수 있다고 여겨진다. 하나의 코드로 명명되는 순간 구속과 굴레는 자연스럽게 따라오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 윤상훈의 『가브리엘 프로젝트』는 이 문제에 관하여 조금은 당돌하고 조금은 조심스럽게 생각해보게 만든다. 즉 그는 추상적으로 알고 있는 '자유'라는 개념을 구체화 시키며 자신의 화법으로 해석하고 있는 면이 엿보인다. ● "날개로 승화한 가브리엘은 날개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상징인 '자유'라는 의미로 반 강압적으로 동양화를 전공하는 학생들에게 떠맡겨질 개자원 화전의 산수에 부여된다. 날개를 달게 된 개자원의 산수는 우리, 또는 나의 의견이나 선택과는 상관없이 그들 자신의 결정대로 행동하게 된다."_작가노트 ● 윤상훈의 작품에서, 자유를 상징한다고 하는 날개는 위압적이고 압도적으로 다가온다. 서슬 퍼런 빛을 내며서 날개를 활짝 열어 젓치고 있는 형상은 가히 두려움을 유발시키는 심판의 날개를 연상시킴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가 말하고 있듯이 이번 프로젝트에서 날개는 선함을 관장하는 천사의 대리물이다. 그러나 그의 날개는 여느 작고 깜찍한 조류나 우리가 상상하고 있는 앳되고 귀여운 천사의 이미지를 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엄격하게 선(善)을 저울질하여 평가하는 천사의 날개를 닮아 있다. ● 그의 작품에서, 정의사도와 같은 진부하지만 그 나름으로 재미있는 성격을 가지고 있는 사물을 운운하지는 말도록 하자. 동양화 화단에서 이단으로 분류하거나 그렇지 않거나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게다가 다분히 키치적이고 팝적이라고 말한다하더라도 그것을 부인하거나 인정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이번 『가브리엘 프로젝트』에서 엿볼 수 있는 부분은 그가 가지고 있는 예술에 대한 생각 즉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전통과 역사가 점철되어 있는 동양화단에서의 예술에 대한 가치기준에 대한 고민이 그의 화법에서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하나의 메타포적 기능으로 이행하고 있는 윤상훈의 날개가 그의 이번 작업에서의 주요 지점이라고 보여진다. ■ 김미령
Vol.20050906a | 윤상훈 동양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