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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립, 그 너머의 세계 : 박인관의 「이미지―기억여행」 ● 박인관의 근작 「이미지―기억여행」은 그 시초를 1980년대 말의 「이미지」 시리즈와 1990년대의 「이미지―기억」, 「이미지―유년시절」로 소급해 볼 수 있다. 벌써 이십 여년의 연륜을 기록하고 있는 그의 작품사에 있어, 근작들은 그간 작가 자신의 의식의 전개과정을 함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삶 전체를 집약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어, 근작들의 연원이 과연 어디에 있는지를 먼저 기술해 보아야 할 것 같다. 그가 수학시절의 사실적 구상회화로부터 비구상 회화로 전향하게 된 것은 1988년 대학원 논문으로 『시각언어의 상징성』을 내놓은 이후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 무렵의 「이미지」 연작들은 보이는 세계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한 용트림이었던 것으로 믿어진다. 이후 그는 자신의 내면 세계를 추적하기 위해 응축된 기호로서 이미지를 부각시키기에 이르렀고, 이어서 서정성과 기하학적 표현의 이분법적 중용을 추구하는 1990년대가 펼쳐질 수가 있었다. 1990년대의 십년사는 그에게 있어서 감성적 자유와 기하학적 속박 간의 평형 내지는 중용의 조화가 가질 수 있는 의의가 무엇인지를 집중적으로 모색했던 시기였다. 이 기간에 그는 힘차게 긋고 드립하거나 발염과 마블링, 나아가서는 꼴라지에 의해 색료의 감성적 서정을 바탕에 깔고, 이를 제어하기 위한 절제된 직선·곡선·삼각형은 물론 자유분방한 O자와 X자 같은 기호를 투입함으로써 서정과 지성을 넘나들면서 이것들의 중용적 경계(境界)를 집중 탐구하였다. 이처럼 1990년대는 그가 작가로서 입문한 이후 자신의 세계를 정착시키려는 온갖 욕구와 의지를 경주했던 시기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 뒤이어 서정과 기하학의 이분법적 조화의 시도가 크게 주춤하고, 이를 극복하려는 일련의 움직임이 엿보이기 시작한 것은, 2천년대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그간 어렴프시 의식되고 있었던 '이미지와 기억'의 문제가 새삼 전면에 부각됨으로써였다. 1994년에는 「이미지·유년시절」이 釜日미술대전에서 수상했던 것을 계기로, 이후의 진로의 수정을 위한 상당한 필요성을 의식에 두었던 데다, 이보다 한해 앞서 제작한 「이미지―기억」에서는 과거의 기억을 작품의 주제로 삼으려는 의지가 이미 상당한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 이러한 사실은 그 이전까지 감성과 지성의 대립과 조화 내지는 중용을 다루고자 했던 근본 기조를 해체하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그 너머의 단계로 전개해 나갈 수 있는 소지로 받아들여졌다. 부연하건대, 그의 1990년대의 십년사는 이미 2천년대가 예고될 정중동의 요인을 배태하고 있었고, 따라서 이미지와 기억에 대한 관심이 이 기간 작품 내부에서 발아되고 있었지만, 정작 이것들을 작품의 근본 원리로 부상시키지는 않았을 뿐이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그의 2천년대가 이미지와 기억을 작품의 기조로 삼으려는 데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일찍이 「이미지―기억, 1993」은 이러한 시발점의 흔적을 담고 있었고 「이미지―유년시절, 1994」 역시 그러했다. 전자의 경우는 X자를 부각시킴으로써 기하학적이고 선적인 요소를 벗어나 원색조를 중심으로 색상대비와 강한 명암대비를 통해서 의식(기억)의 화려한 분출을 시도하였다. 이를테면 안료들을 두껍게 중첩함으로써 묵중한 느낌을 자아냈다든지 색료의 우연한 번짐효과는 물론, 물감을 나이프로 긁어 거치른 표면흔적을 강조하는 등 의식의 저변으로 잠입함으로써, 이를테면, 무의식에로의 여행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것은 다분히, 「이미지―유년시절」에서 확인되고 있는 것처럼, '유년시절'이라는 기억의 퇴적물을 되살려내려는 의도적인 기획이기도 하였다. ● 그러나 이러한 행로가 근작 「이미지―기억여행」으로 발전되기 위해서는 무의식의 이미지를 '형상(구상)적으로' 복원하는 별도의 절차가 필요하였다. 이에 관한 한, 이미지는 감성적 표현충동이나 합리적 추상충동의 낡은 잔재를 보이기보다는 '기억'이라는 별개의 세계, 말하자면 이들의 대립을 뛰어넘은 보다 통합적인 세계에 뿌리를 두거나 원초적인 세계의 이미지일 필요가 있었다. 1990년대 말, 작가는 8번 째 개인전을 가지면서 이렇게 썼다. "이른 새벽 강변에 서면 아침 햇살을 머금은 물안개가 산을 타고 오른다. 골을 따라 흐르는 안개는 어린 양으로 시작하여 호랑이, 다시 물고기가 되어 허공으로 물결 짓을 하며 사라진다. 나는 가끔씩 꿈을 꾼다.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간 어린 시절의 추억과 고향의 향수가 그 곳엔 지나간 시간의 궤적으로 고스란히 남아 있다. 아름다운 환상과 풋풋한 전설이 묻어나는,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기억들의 이미지하며, 어쩌면 앞서 가는 시간의 진상들 또한 그러하다. 난 이런 소중한 것들을 갖고 살아간다.(작업일지 에서)"
작가가 말하는 기억의 세계는 이를테면 시간의 궤적이나 흔적으로 채워져 있지만 그 총체적인 진상은 이것들에 앞서는, 그래서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미지의 세계로 해석된다. 일견 모순된 것 같으나 우리가 간직하고 있는 기억의 세계가 우리의 일반 인식의 틀로는 이해되지 않는 신비한 세계임을 잘 지적해 주는 말이기도 하다. 이제사 작가는, 마치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모습 같은, 신비한 기억의 세계를 '여행하는' 심정으로 작품에 임하고자 하였다. 「이미지―기억여행」은 그래서 기억 속의 시간 궤적을 더듬어나가는 여행자의 '일기'와 같은 그림이다. 이를 두고 작가는 기억을 떠올리는 것은 시간이 흐른 뒤 묻어두었던 옛 감정을 꺼내어 보는 것과 같다고 말하면서, "나에게 있어서 기억은 새롭게 재현되는 이미지의 여행인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뒤늦게 완성되는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다. 나의 작품은 새로운 이미지의 여행을 통해서 새롭게 살아나는 시간의 일기와도 같다. 때로는 드라마틱하거나 파노라마 같은 순간의 기록과도 같으며, 자연과 우주공간에 순응된 나의 모습임은 물론, 인간과 인간의 관계지움에 있어 대립되기도 하고, 어울리기도 하는, 양면성까지도 보여 주고자 한다." ● 여기서 남는 문제는 그가 기억 속의 여행을 위해 어떻게 '이미지'라는 항해의 수단을 빌리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이미지는 기억의 시간적 흔적들을 찾아내고 서술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수단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가 새롭게 다루고자 한 것은 이미지의 '구상성, 具象性'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근자에 들어, 그의 이미지들은 거의가 구상성을 띠고 있어 확실히 이미지를 매개로 해서 '기억여행'을 방법론으로 구사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의 구상적 이미지들은 그의 개인적 무의식에 관련된 것들과 우리의 집합적 문화의식의 저변에 침전된 상징들로 대별된다. 전자의 것으로는 누드와 얼굴·물고기·동물, 나아가서는 식물의 이미지들이, 후자의 것으로는 목어·도식화된 산·호랑이·별자리 등이 눈에 띈다. 이것들을 등장시켜 화면 전체를 일구어내는 데에는 몇 가지 특징적인 면이 돋보인다. ● 첫째는 화면을 좌우 크고 작은 두 개의 부분으로 나누어 설정한다는 것이다. 흔히는 개인 무의식 속의 기억 이미지는 작은 면에다 설정하고, 집단무의식 층의 이미지들은 큰 면적에다 할애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두 번째의 특징이 보다 더 관심을 끈다. 그것은 작은 면적은 알루미늄판을 바탕으로 설정해서 오일컬러로 설채한 후, 스크래치에 의해 윤곽선이 뚜렷한 신체의 이미지를 다루고 있다면, 넓은 면적은 전통 한지에 토분을 먹여 바탕을 만든 후 오일컬러와 아크릴을 적절히 구사하여 집합적 무의식의 이미지들을 다룬다는 것이다. 더불어 캔버스의 경우는 종이죽을 입히고 아크릴과 오일컬러를 칠한 후 샌드페이퍼로 다듬질한 후 이미지를 부각시켰다. ● 이어서, 세번 째의 특징은 어두운 배경과 밝은 배경을 차별적으로 설정함으로써 부각시키고자 하는 이미지들의 주목성을 상대적으로 강화하거나 의도적으로 약화시킨다는 것이다. 대체로 개인 무의식의 이미지들을 강한 대비구조로 하되 집단 무의식의 이미지들은 배경과의 융합을 강조함으로써 태고의 원초성을 부각시키고 있음이 두드러진다. 전체적으로 근작들은 기억의 이미지들을 무의식층의 저변에서 지각층으로 건져 올리는 방식에 의해 크게 부각시킬 것들과 잠복시켜야 할 것들을 변별함으로써, 그리고 이것들을 좌우 면의 어느 위치에 설정하느냐를 고려함으로써, 일견 시리즈회화 내지는 컴바인 페인팅의 분위기를 원용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요컨대, 근작들은 이미지즘을 전폭적으로 부각시킴으로써 표면과 심층이라는 대립의 세계를 극복하고자 함은 물론, 이를 기억의 세계에다 잠재시킴으로써, 이를테면, 일원적 통합을 기도하려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러한 새 방향이 근년에 이르러 서서히 틀이 잡히기에 이르렀고, 금번 개인전에서 그 진상이 보다 확실해지고 있다. 이번 개인전은 진실로 그가 새로운 변모를 국내 애호가들에게 보여 줄 절호의 기회가 될 것이다. ■ 김복영
Vol.20050904a | 박인관 회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