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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5_0610_금요일_06:00pm
BB SPACE / 2005_0610 ▶ 2005_0705 대전 유성구 도룡동 395-28 Tel. 042_862-7954
갤러리 룩스 / 2005_0824 ▶ 2005_0830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5 인덕빌딩 3층 Tel. 02_720_8488 www.gallerylux.net
잎사귀, 그 곳에 들어와 머물다 빠져나간 것은 무엇인가? ● 1. 'All Living Things Are Beautiful' 이라고? 바퀴벌레도? 설마 ...... 자신의 전시 작명을 그렇게 하기로 했다는 얘길 듣고 잠깐이나마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평소 그를 무던히도 긍정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해오긴 했으나 그 정도로 나이브할 줄이야! 그건 좋게 보아 생명 현상에 대한 끈질긴 '시각적' 탐구 끝에 스스럼없이 새어나온 탄성일 수 있지만, 내게는 '작가' 최원진의 유언장 제목처럼 들렸다. 작가? 그렇다, 예술가란 적어도 작(作), 그러니까 꾸밈과 지어냄을 업으로 삼는 자를 일컬음이 아니던가? 작업, 그것은 자연 그대로 지어짐과 저절로 되어감(無爲)에 대한 도도한 저항(有爲)이 아닌가? 아무리 천인합일 식의 찬미가를 달고 사는 사람이라 한들, 예술이 검은 연필로 긁혀지기(오염되지) 전의 순결한 흰 색 종이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을까. 좋다. 그 또한 그럴 수 있다 치자. 우기기야말로 예술의 중요한 전통이 되었으니까. 그래도 무모하다. 왜냐고? 너무 솔직하니까. 그래서 거북하다. 누가? 그가? 아니면 내가?
2. 존재를 존재답게 하는 것은 '거리'다. 존재들의 총상,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란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여야만 식별 가능한 약속 체계에 다름 아니다. 그것이 무너지는 순간, 우리가 익히 '알던 것' 들은 아주 '낯선 것' 또는 '다른 것'이 되고 심지어는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사실' 역시 '사실'로 받아들여 질 수 있는 거리가 존재한다. 그것들은 단지 우리가 그렇게 '알고있는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카메라, 그러니까 인공 눈의 막강한 위세에 복종하여 여전히 원시인의 그것과 다름없는 우리의 초라한 육안으론 인식할 수 없으므로 '어쩔 수 없이 믿을 수 밖에 없는' 세계가 있음을 순순히 인정한다. 그렇게 해서 거친 바윗돌 같은 바늘 끝이, 정교한 기하학적 조형물인 눈(雪)의 결정이, 상상할 수 없는 거리의 천체가, 텅 빈 허공 속에 엄연히 존재하는 수많은 결정체들이, 확고부동한 물체의 변화물쌍한 표면은 육안의 한계를 조롱하는 '사실들'로 받아들여진다. ● 최원진의 카메라는 알던 것을 완전히 다르게 바꾸어 놓는 그러한 현미경적, 망원경적 시선이 아니라 식별 가능과 불능의 경계선상에서 애매하게 작동하고 있다. 그의 렌즈에 포착된 야채들은 기실 우리에게 익숙한 '사실적' 모습은 아니지만 주의 깊게 바라보면 누구나 알아 볼 그 자신들을 닮은 그림자, '환영 illusion'이 되어버린다. 여기서 그의 작업이 사실은 앞서 말한 바, 있는 그대로의 자연에 대한 순진한 찬미완 거리가 있음이 드러난다. 친절하게 작가의 말(소망?)을 반영한다면 여전히 그것이 양파임을 알아 볼 수 있는 양파의 잘린 면에서 우주적 느낌이, 알맹이를 비운 껍질에선 사막이, 대파 조각에선 추상화된 대양의 물결이 감지된다는데, 뭐, 그리 볼 수도, 그냥 자신이 기울인 막대에 대한 노고의 결실에 대한 감격이 만들어 낸 환각(일루젼을 사실로 대체함) 정도로 받아들일수 있는 문제. ● 중요한 것은 그로선 여전히 본모습을 유추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밀착한 그 보잘 것 없는 작은 대상들이 황당하리만큼 광대한 '다른 것'으로 비춰지길 바란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정도는 먹혀들어간다고 인정할 수 있는 그 바람은 작가 자신에게 부메랑으로 돌아가 고스란히 부담이 될 수 있다. 왜냐면 내셔널 지오그래픽 류의 화보집 어디에선가가 아니더라도 넘쳐나는 영화나 게임, 드라마의 스펙타클로 부단히 단련된 일상의 영상 분석가, 우리들의 '세련된' 눈은 왠만해선 수긍할 줄도, 감탄할 줄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보단 차라리 다른 것이 그의 작품속에 있진 않은가? ● 사람은 외부 세상에 타협하는가 하면, '페르소나'를 가지며 동시에 내면적으론 반대적 영혼의 심상에 경도되는 성향이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못말리게 외향적이고 낙천적인 최원진의 그림자는 어쩌면 정확히 그 반대의 표정을 짓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두운 배면이 빛을 더욱 밝히듯이 살아있는 모든 것은 그림자 파트너와 함께 하기에 그 아름다움이 빛날 수 있다. 삶, 그 짝궁은 바로 '죽음'이 아닌가. 그렇다, 죽음이 삶을 온전하게 만든다. 아름다움을 일종의 균형, 하모니로 본다면 그것은 차이들의 철저한 배제를 기반으로 하는 억압적 캐논으로서가 아니라 상극조차 뱃속에 품어버려 생겨나는 지속적인 긴장상태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아름답다. 그럼 '죽어있는 모든 것은 추하냐?'가 아니라 바로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죽음을 껴안고 있기 때문에' 아름답게 되는 것이다. 삶은 움직임이며, 아름다움은 삶의 방향이고, 허무와 쇠락의 두려움은 그 동력이다. 어둠과 부패로 소멸하고 자신을 거름삼아 부단히 다시 나며 성장하는 그것이야말로 온전한 아름다움이다. 그게 바로 채소, '식물' 아닌가?
3. 그의 사진들을 다시 들여다본다. Vanitas(vanity). 분명 거기엔 시간이란 냉혹한 폭정아래선 한 때 찬란한 모든 것도 결국 무상할 뿐이라는 정물still life 그림의 전통이 배어있다. 그의 작업 제목처럼 반어법적으로. 그러나 애도를 표하기엔 너무 예쁘다. 시간을 다한 임종의 밭은 숨소리에 확성기를 달아 전성기의 불꽃같은 환호처럼 들리게 하기 때문이다. 비장한 마음 준비로 장례식장을 찾아 조아린 고개를 쳐든 순간, 너무 화사하게 웃고 있는 영정 사진을 대한 느낌? 이 야채 미라들은 이집트 파라오의 그것들처럼 화려하다. 또는 눈으로만 먹으라는 진열장의 플라스틱 요리들처럼. 푸짐한 탐미적 연회장. 거기에 없는 것은 그 의식(儀式)의 주인공, 바로 생기, 곧, 죽음뿐이다. 전시장에서 만난 그는 관람객들에게 예의 최원진표 성실과 열정으로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한줌으로 바스러져버릴 보잘 것 없는 것들에서 역설적인 생기를 확대하여 보여줄 수 있다는 '아름다움 채집가'로서 본인의 면모에 그 누구보다도 스스로 도취되어 있는 듯하다. 역시 최원진이다. 그는 선천적으로 우울할 수 없는 사람인가보다. ● 솔직함도 지나치면 장애가 된다. 그런데, 그런 그의 솔직함은 반대로 언제나 자신이 상대하는 대상에 수식을 달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달려들게 하는 데도 단호한 힘으로 작용한다. 간단하다. 그는 궁금하면 물어본다. 지난 번엔 자신의 몸을 샅샅이 물어대더니(...) 이번엔 야채에게 우격다짐으로 질문한 것이다. 빼빼 말리고 벗기고 자르고...... 그리곤 진술을 받아낼 녹음기마냥 카메라를 바짝 들이댄다. 숨겨진 아름다움과 거대한 음모, '나, 한낱 상추 조각은 사실은 거대한 우주 조직의 일원이라오......' 순순히 자백해야 한다. 자, 양파씨 영정사진이에요, 웃어요, 김치- ● 최후진술에 대한 친절한 소견; 니. 카메라의 오브젝트(렌즈)와 허공 사이에서 가느다란 신음 소리처럼 간신히 존재하는 최소한의 너, 오브젝트(대상). 그것은 막(膜), 베일이다.
4. 베일 - 글발 세울 거 혹시 없을까 해서 영한사전 뒤적였다. 이건 또 뭔가! beyond(or behind, within) the veil '저승에' ... 쩝 ... 예쁜 이미지들을 너무 쌩뚱맞게 몰아세우는 것 같다. 사진쟁이로서의 내공으로 빈틈없이 조율되어 대범한 조형적 구성과 강렬한 색으로 빛나는 그것들을 말이다. 아무튼- 상징적 차원에서 베일은 가리는 것이며 동시에 계시하는 것이다. 가림과 드러냄의 이중주, 이것과 저것의 경계에서 실재는 모호해진다. 베일은 본질을 덮는 최후의 보호막이며 동시에 보여질 수 없는 저편의 형상을 그림자로 가늠하는 최초의 스크린이다. 그것은 또한 그가 사진을 시작하던 초창기에 천착하던 벽wall의 연장이다. 일관된 것은 그가 여전히 컬러풀한 벽의 표정에 집중하는 것이요, 달라진 것은 초기의 벽이 단절과 고립을 강조함으로써 캔버스와 중첩되는 지점에 놓여있었다면 최근의 벽 아닌 벽, 투명한 야채의 피부를 통해서는 그간의 여러 실험을 통해 회화적 언어의 상사(相似, 相思)를 넘어서는 '모호성의 탐색'으로 독자적인 사진의 정신을 확보하고 있다는 점이다. ● 모호성? 그는 줄곧 묻고 있다. 자기 동일성을 결정하는 조건들은 무엇인가? 그것이 가장 그것다운 순간 그것은 혹시 다른 것일 수 있지 않을까? 최원진은 베일에 쓰여 지는, 또는 베일 그 자체로 농축된 생명현상의 불가해적 메시지들을 반사적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갈 길처럼 해몽은 여러갈래다. 그러니까 가냘프게 고갈되어가는 생명에서 빛나는 생기를 포착해내려는 그의 시도는 이제 막 시작에 불과하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하지만 스스로도 모르던 최원진의 비아(非我)가 들어서게 한 너무 큰 숲. 욕심없는 그는 포기할 줄은 알지만 지칠 줄을 모른다. 사람은 일을 하지만, 일은 그 사람을 변화시킨다. 몸으로 정신으로. 기왕의 행오, 어쩌명 저절로 이 작업의 종국에 가서 -순전한 형식적 의미로서의- 확고한 아름다움에 대한 더이상의 추적을 포기함으로써 맞닦뜨리게 될 베일 너머의 부재, 없음의 실재, 어둠 그 자체를 혹독하게 겪을 수 있기를, 나는 고대한다. 그리하여 페르소나 이면의 자신을 격렬하게 만날 수 있기를. 또한 그러고 나서도 여전히 'All living things ......'를 흥얼거릴 수 있기를. ● 이것 참, 그냥 버리기엔 너무 싱싱한 걸! 한 입 베어 먹는다. 한 조각 야채게 잠깐 동안 머물다 사라진 그 빛은 어디로 갔는가 ...
예술은 너무 흔해져 버렸다. 구태를 혁파한 선구적 모더니스트들의 가장 큰 업적은 예술에서 '감동'을 제거해 버렸다는 점이다. 그래서 오늘날 하나의 작품 앞에서 '감동' 운운하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촌스러운 작태가 되어버렸다. 의미와 숭고함의 아우라(체면)를 홀랑 벗은 예술은 거울만 들여다보고 스스로가 관객인 모노드라마를 하고 있진 않은가. 예술을 빙자한 적이 없는 소탈하고 언제나 자유로운 그에게 나는 빚진 게 많다. 그래서 나도 그처럼 솔직하게 되갚고 싶다. 나는 '너'에게 감동을 원한다. ■ 전상용
Vol.20050821c | 최원진 사진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