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_2005_0727_수요일_06:00pm
갤러리 도스 서울 종로구 관훈동 55-1 2층 Tel. 02_735_4678
꿈과 죽음의 몽상 ● 이런! 가족들이 누워있네. 내가 죽었나? 아래를 내려다보면 가족들이 일상에 지친 육신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에 빠져있다. 이상하군. 죽지도 않았는데 나는 천정을 돌아다니며 유체이탈인지, 아니면 꿈속을 헤매는지...이상했다. 몸은 점점 떠올라 공중에 떠있고 이건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자유로우면서도 이상스런 분위기였다. 이런 경험이 영혼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걸까? 화면을 덮은 희뿌연 결들이 촘촘히 현실의 형상에 시간과 기억을 그려 넣고 있다. ● 이상한 세계를 여행하고 있거나 참으로 기이한 경험을 하고 있는 순간에 우리의 몸과 정신은 완전하게 깨어난다. 완전히 활성화된다. 이러한 낯선 경험의 자각은 몸을 이루는 저 말단의 미세한 신경세포들을 감전시켜 아우성치게 만들고, 그러면 어쩌다 이런 지경에 빠져버렸는지 온통 혼란스러워 하면서도 이 낯섬과 마주할 때 형성되는 이상한 기분을 느끼곤 한다. 그것은 일종의 쾌감인데, 그러한 이상한 체험이나 낯선 경험에 매료되는 것은 주변에서 아주 흔한 일이기도하다. 또 예술에 몸담고 있는 타고난 몽상적 기질의 소유자들에게는 수료해야 할 필수코스가 되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시적상상력과 회화의 뿌리를 몽상에서 찾는다. 그러나 신하정의 이미지들은 몽상적이기 보다는 생활의 체험이 찬찬히 쌓인 시간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거의 생의 대부분을 함께 부딪치고 얽히고 나누었을 가족들이 신하정의 상상력을 구성한다.
신하정의 인물들을 보고 우리는 그들이 잠자는 동안 자기만의 기이한 체험이나 아주 신나는 모험을 즐기고 있다고 상상할 수 있다. 꿈은 그들을 매료시키고 있으며 그들은 꿈이 제공하는 프로그램을 기꺼이 즐기는 것이다. 물론 그 인물들은 대단히 자연과학적이며 직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들은 생김새와 형태는 다르지만 수면을 취하고 있는 가장 일반적인 모습을 재현하고 있어서 우리는 이들이 정말로 흥미롭거나 기상천외한 혹은 나름의 소원성취를 이루고 있는 세계를 탐험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하기 어렵게 한다. 오히려 너무도 무미건조한 일상의 한 순간을 포착하고 있을 뿐이다. 모두들 잠들어버린 심야의 한 순간, 이 한 가족의 집단초상화는 시간의 누적을 암시하는 채색된 이미지층들의 집합일 뿐이다. 정말 이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그러한 세계를 넘나들고 있는 것일까? 우리가 꿈꾸는 세계는 너무나 무한한 경우의 수를 갖고 있어서 꿈에 대한 해석이나 관념은 가장 비과학적이며 가장 우연적인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누군가와 함께 같은 꿈을 꾼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문학적으로도 종교적으로 우리가 타인 함께 꿀 수 있는 꿈의 세계는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이루는 현실세계일 뿐이라는 것이다. 마치 매트릭스에 거주하는 인간들처럼. 그러나 이러한 견해도 결국은 믿거나 말거나 식의 아주 흥미로운 제안의 예일 뿐이다. 어느 경우에도 분명한 확증을 제시하지 못한다. 장자의 꿈에 나타난 나비나 엘리스의 꿈에 나타난 미치광이 토끼는 문학적이고 철학적 상징의 세계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자연과학적인 분석의 세계를 벗어나 있다. 신하정의 꿈꾸는 사람들의 세계 또한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세계와 만나는 순간을 매우 재현적인 수법으로 하나의 가설로 제시할 뿐이다.
이번 전시 제목 「소풍」과 부제인 「크로씽 오버더 월드」를 보면서 우리는 쉽게 꿈을 떠올렸다. 꿈은 정신분석의 도래 이전에는 바로 다른 세계로 가는 여행이자 다른 자아와 조우하며 접신接神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또한 다른 세계를 새처럼 자유로이 넘나드는 것은 인간의 오래된 꿈이였다. 새와 나비로 상징되는 이 세계와 저 세계를 매개하는 것, 그것은 인간이 인간 자신의 존재의 굴레를 벗어나 존재와 비존재, 의미와 무의미의 세계를 아우르는 초인의 세계로 나아가는 거대한 꿈-서사敍事였다. ● 소풍은 작은 여행이라서 언제든지 집으로 돌아올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이루어진다. 반복되는 일상으로부터 가볍게 탈출하는 것이다. 그러나 죽음은 존재론적이며 형이상학적인 여행이다. 죽음과 소풍은 다소 거리가 있다. 영원회귀와 윤회를 신념으로 삼는 사람과 사회에서 죽음은 신의 비의이자 기적의 현실화로 보이기도 한다. 진리가 스스로를 드러내는 한 방식인 것이다. 죽음은 가벼운 여행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건 진지한 여행인 것이다. 죽음을 소풍과 연결하는 것은 작가의 우화적 은유거나 일종의 논리의 비약인데, 물론 그러한 비합리적 비약이 또한 예술의 미덕이기도 하다. 그림이미지가 마술을 부리는 것이다. 꿈은 그러한 이미지들이 놀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가 된다. 논리와 비논리, 합리와 불합리, 실재와 환영이 공존하는 장소 말이다. 작가에게 이 공간은 가족의 죽음에 대한 경험으로 환기되는데, 대부분 가족의 이미지와 연결되어 각별한 감정과 기억으로 채워진다.
하나의 전시를 감상하는 길은 참으로 다양한 코스를 갖고 있어서 그 길을 가는 자의 취향과 평소의 습성과 욕구에 따라서 취사선택된다. 하나의 그림을 그려나가는 것 또는 하나의 그림을 감상하고 이해하는 길 또한 참으로 무한하다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를 열린 시대의 예술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미적 풍경이라 말하곤 하는데, 아마도 인간에게 가장 많이 열려있는 세계가 바로 예술의 세계이며 이미지들이 유희하는 우주일 것이다. 신하정에게 그것은 꿈의 세계를 관통하는 것으로서 그 세계에 집중함으로써 다른 세계와 경험의 시야가 가능해진다. ■ 김노암
Vol.20050726c | 신하정 회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