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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5_0720_수요일
후원_관훈 갤러리_suicidesoft.com
관람시간 / 02:00pm~09:00pm
관훈갤러리 신관 1층 서울시 종로구 관훈동 195 Tel. 02_733_6469 www.kwanhoongallery.com
shock 를 시각화 하려는 움직임에 관한 관찰 보고서 ● 우리의 일상은 거대하고 버라이어티(variety)한 쇼크에서부터 단편적이고 촌철살인의 유머러스한 쇼크(shock)들로 가득 차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쇼크는 충격일 수도 있고 사고의 재고를 요하는 환기 일수도 있다. 쇼크는 내가 가진 정보에 대한 새로운 의미부여 일수도 있고 정보와 정보의 재결합의 필요를 강요하는 것일 수도 있다. 쇼크는 내가 가진 일상적 상식의 전복을 강요하며 쇼크를 받은 사람에게 물리적 실천이든 형이상학적 실천이든 움직임을 만들어 낸다고 볼 수 있다. ● 텔레비전을 중심으로 한 언론과 엔터테이먼트를 장악한 자본과 국가의 일방적 매스미디어는 이런 쇼크의 헤모글로빈의 흐름을 통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 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 한다고 볼 수 있다. 자본과 자본의 대결 또는 정치집단과 다른 정치집단간의 대결, 계급과 다른 계급간의 첨예한 대립은 그들의 존립 근거라고 할 수 있지만 규정되어 있지 않은 사회적 약속의 상식과 트랜드에 함몰되어 움직이고 있는 대중, 분중, 소중에게 즐거움의 쇼크 분노의 쇼크, 또는 슬픔, 연민, 시대의 헤게모니에 의해서 형성된 도덕적 성찰의 근거가 될 수 있는 쇼크를 제공하며 그 쇼크를 통하여 교육시키고, 제공된 쇼크에 반응한 무리에게 그에 응당한 보상을 지불하고 그들 자신의 이익에 봉사하게끔 유도하고 있다. ● 쇼크는 자신의 내면에서 스스로 발현되는 것이기 보다는 자신의 정체성의 근거인 사회적 관계와 교육에 의해 제공된 정보 또는 동시대에 유행하는 인식의 체계에 경도되어 길들여진 충격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익명의 개인은 스스로 반성하고 자신 내부의 혼돈과 불안을 해결하려는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보다 새로이 외부에서 제공된 쇼크를 통하여, 받아들인 쇼크를 희석하려 할 뿐이다. 매스미디어의 보이지 않는 손은 이런 안주하려는 무리의 심리를 잘 알 고 있으며 개인들이 쇼크를 통하여 사유(思惟)하기보다 이들에게 다양한 쇼크를 제공함으로 해서 계속해서 그들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 네트워크화 된 사회라는 것은 하나의 정보가 네트워크를 통하여 기하급수적으로 파급 또는 번식 또는 분열 또는 복제, 피드백(feedback)을 불러일으키고 있음을 의미한다. 정보의 바다인 인터넷에서 흐르지 않는 정보는 정보의 가치를 상실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정보의 흐름은 무한 복제, 조합, 혼성, 차용, 변형 등의 형식을 취하며, 쇼크는 이런 정보의 생존방식을 통하여 재생산 되고 있다. 정보가 쇼크를 일으키지 않으면 익명의 대중은 정보를 사용하지 않는다. 이미 대중은 쇼크에 내성을 가진 인류로 진화되어 더욱 버라이어티한 상상력을 발생시킬 쇼크를 도착적으로 원하고 있다. ● 일방의 네트워크에서 쌍방향으로 전이된 인터렉티브(interactive)한 인터넷 네트워크는 쇼크와 쇼크의 쇼크의 조합으로 가득 차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일방적 수용자 입장에 있던 익명의 개인은 인터렉티브한 상황에서 스스로 쇼크를 생산하는 개인 미디어 생산자로 진화하고 있으며 자신이 생산한 미디어의 파급을 위하여 매스미디어의 전철을 반성 없이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 그러나 매스미디어의 보이지 않는 손은 이런 개인 미디어를 관리하고 있으며 익명의 개인은 이미 매스미디어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제공된 형식과 쇼크의 수동적 수용자이다. 그러므로 익명의 개인이 만들어 내는 쇼크는 매스미디어에 봉사하는 소스가 될 뿐인 것이다. 이것은 야성의 자유롭지만 불안한 상태보다 세뇌되어진 소비적 환상의 안주를 더욱 즐기려는 무한 쇼크에 길들여진 가축화된 인간으로 관리되는 것을 즐기고 무감각하게 스스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행위 하는 자, 나는 스스로 이런 쇼크의 수용자임을 밝히고 있다. ● 순간의 쇼크 그것이 나를 만들고 나와 타자의 차이를 형성한다. ○ 나의 전작을 포함한 이번 작품들에는 가축화된 인간 무리에게 쇼크를 일으킬 어떤 시각적이거나 다른 감각적 요소는 없다. 일상에 있는 놀이와 이제는 너무나 흔한, 도리어 값싼 매체가 되어 버린 비디오라는 형식에 담아 이 세계에 의해 만들어 졌지만 더 이상 쇼크의 기능을 상실한 기호-영화 속의 대사, 속담, 유행어, 놀이 등-들의 나열을 통하여 자신의 언어를 키워내고 있는 목표 없는 여정의 어느 지점인 것이다. ● 쇼크의 기능을 상실한, 유치한 쇼크를 전폭적으로 수용하면서 자신의 언어 체계를 만들어 외부와 소통하려는 것은 외부의 세계이면서 자신이 포함된 내부 세계의 인식 체계에 다가가 말 걸기를 위한 전략인 것이다. 외부와의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언어로 이미 소비되었지만 폐기되어지지 않고 보편성을 획득하여 사고와 인식활동에 반영된 의문부호 없이 사용하고 있는 이런 유치한 쇼크들의 기호를 차용함으로 해서 나의 작업은 가축화된 인간들이 사용하는 상식과 통념을 획득하고 공유할 수 있는 소통 가능성을 만들어 내며 외부 세계가 코웃음을 치지만 자신의 소통의 장으로 끌어들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소통하기 위해서 먼저 타자의 언어를 배우고 사용하는 것이다. ● 소통의 기능을 수행할 매체로서 비디오의 선택은 권력이 독점한 멀티 커뮤니케이션 채널들, 텔레비전이라는 그릇과 그에 포함된 각종 컨텐츠-드라마, 광고이미지, 다큐멘타리, 뉴스-와 거대 자본에 의해 만들어 지고 있는 영화, 또는 공연 등과 국가에 의해 관리되는 인터렉티브 인테넷 네트워크 등에서 제공되는 광범위하고 자극적인 쇼크에 대한 슬픈 오마주이면서 작가의 체험을 관객과 공유하고 손쉽게 향유할 수 있는 기능을 확보하기 위해서이다.
비디오라는 미디어의 특이성은 전통적 관계의 작가와 작품 그리고 관객의 위치를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비디오가 가지는 생산 방식과 보여주는 방식 그리고 배포되는 방식이 전통적 유통과정과 다르기 때문이며 이런 관계 형식의 변화는 그 그릇에 담기는 메시지를 달라지게 하고 수용자가 세계를 인식하는 태도도 달라지게 했다. 특히 디지털화 된 소스들과 카메라 장비, 편집장비, 퍼스널 컴퓨터, 각 가정에 보급된 다양한 디스플래이 장비의 변화는 세계를 쉽게 무한 복제할 수 있게 했을 뿐만 아니라 변형, 조합, 혼성, 기형, 재편할 수 있는 환경을 작가와 관객에게 제공하여 주었다. 작가는 완성된 작품 그 자체보다 만들어지는 프로세스와 유통 과정을 소통의 장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비디오와 관계된 특성은 이러한 소통의 장을 확보하고 작가가 생각하는 표현을 타자와 소통하기에 다른 매체보다 더 직접적 일 수 있을 가능성 때문에 자신의 언어를 담아내는 매체로 재사용하는 것이다. 자신의 언어를 사용하여 보여준다는 것은 보여주기 위한 타자에게 말 거는 행위이지만 그보다는 내 내면의 모습을 회의 하는 것이다. 즉, 스스로 들여다보는 것이다.-why? 이것이 독백일수도 있고 혼자 하는 헛짓일 수도 있다. why? 이것을 전시장이라는 작가개인의 작업을 진열하는 사적공간이면서 공적공간으로 들어오는 것은 전시장이라는 미디어에 알아서 기는 딜레마에 빠지는 것이지만 다시 전시장이라는 미디어를 통하여 내 개인 미디어의 객관성을 확보하고 내가 나를 소비하여 나의 쇼크에 대한 반성과 why?라는 자문을 하듯이 다시 타자들이 나에게 말 걸어 옮에 대한 기대이다. 그 말 걸어 옮은 끝도 없고 종착도 없는 의문의 부호만이 낭자한 것이지만 why?라는 쇼크의 진동을 일으켜 타자에게도 스스로 내면의 why?라는 자문의 파동을 일으켰으면 하는 유치한 기대이다. 나의 작업들이 표피적이고 유치한 면을 가지고 있음을 나는 거부하지 않는다. 내가 유치함의 경계를 스스로 확보하는 것은 타자에게 고상하며 품위 있는 대지를 열어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시대의 유행하는 정보와 담론과 지식과 철학에 함몰되거나 대중에 야합하여 자기 입장의 표명을 고상한 미사어구로 변명하고 포장하기보다 표피적이고 반은유적인 세상의 쇼크를 그대로 내 자신의 언어로 차용하여 타자들에게 말 걸음으로 해서 작가로서 내 유치한 작업은 다른 타자에게 쇼크를 주기 이전에 내안의 또 다른 타자인 나 스스로에게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 나는 자주 치기어린 곳으로부터 쇼크를 받는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나를 바라 볼 때가 대부분이며, '나를 바라 봄'에서 오는 'Why'의 쇼크를 재현(illusion)하려는 욕망의 자기모순-착각 또는 오해-illusion에 대한 대안(alternative)으로서-'How'- 현상을 가장 단순하고 간결하며 최소한의 단위로 쪼개버림으로서 다시 현상의 본질에 개입하려는- 스스로 규정한 사회 현상의 최소 단위- 언어, 영화의 scene, 행위, 선, 사진 등으로 조립된 비디오 미니멀 (video minimal)로 나타나게 되었다_2005년 6월 ■ 김선주
Vol.20050718b | 김선주 영상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