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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5_0628_화요일_06:00pm
기획_ICAS 서울 현대미술연구소 후원_한국문화예술진흥원_관훈 갤러리
관훈갤러리 본관 2층 서울시 종로구 관훈동 195 Tel. 02_733_6469 www.kwanhoongallery.com
오해는 곧 나의 목적 - 첫 개인전을 준비하며 ● 고백하건데 나는 어떠한 문제를 극복하기위해 스스로 대안을 제시해오는 작업과정을 거치지 않았다. 대부분 순간순간의 충동적인 욕구와 아이디어가 그것을 대신해오곤 했다. 다만, 나는 기존 나의 습관적인 태도를 버리기 위하여 오히려 이를 따르려 노력했고, 결국 나 라는 사람의 일정한 한계와 패턴을 발견하고 확인하는 성과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오늘 그런 나의 한계와 패턴을 도마위의 생선처럼 올려보고자 한다. ● 나는 그간 미술에 관계된 몇 가지 일들을 해오면서 틈틈이 비디오, 컴퓨터, 웹 작업 몇 가지를 남겨왔다. 물론 왜 그것이어야 하는가에 대하여 스스로 묻고 대답해왔다고 생각하지만, 돌이켜 보건데 소위 매체작업이 갖는 미학적 특수성이나 작가로서의 문제의식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이었다기보다는 나를 둘러싼 환경과 개인적인 감수성에 의해 좁혀진 결과에 다름 아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시'라는 일종의 이벤트를 앞두고,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하여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전시'란 단순히 자칭 작가들의 시시콜콜한 일상사나 과대망상적인 상상력을 늘어놓기 위한 무대가 아니라, 문화적 가치를 생산해내기 위한 사회적 장치로 마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가들은 작업실에서의 습관적인 태도를 전시장에서도 여전히 고집할 수만은 없으며, 해석과 개입의 통로에서 자연스럽게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그가 원하든 그렇지 않든…. ● 또한 나에게 있어서 이러한 환경의 변화(작업실에서 전시장으로)는 '보여주기'에 관한 매체의 환경적 기반과 근본적인 속성마저 다시 생각하게끔 한다. 예를 들어, 개인적인 공간에서의 컴퓨터 마우스는 제어를 위한 가장 기본적이면서 효율적인 인터페이스로써 그 역할을 하지만, 여러 가지 문화적.사회적 의미가 덧씌워진 미술관, 갤러리 공간에서는 규정되지 않은 많은 소통의 수단 중 하나에 불과해진다. 따라서 인터랙티브에 대한 거대한 환상을 가진 사람이든 그것의 근본적 체험을 바라는 사람이든, 이들에게 미술관에서의 마우스 인터랙티브는 매우 시시하고 단순한 경험일 것이다. 때때로 음성이나 온도, 냄새, 빛 등을 감지하는 새로운 인터페이스들이 개발되고 도입되곤 하지만, 이는 매우 쉽게 소비될 수 있으며 그만큼 쉽게 익숙해짐에 따라 부질없는 소비를 가속화할 우려가 있다. 결국 문제는 '무엇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보여줄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이 관람자의 욕구와 충돌할 수 있는가'를 고민하는 것이다. 관람자의 욕구는 얼마든지 나와 다를 수 있으며, 오해는 클수록 결국 나의 목적에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숨」, 「붉은 깃발」, 「무제-모터장치가 달린 신발」은 그러한 의도에 충실한 작품들 중 선택되었으며, 각각의 접근방법이 조금씩 서로 다른 만큼 그 조합을 통해 목적하는바 역시 존재한다. 다만 그것은 나의 목적일 뿐 이를 설명하는 일은 권한 밖의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2005년 6월 ■ 이태한
침묵 속의 붉은 바람 - 이태한의 첫 개인전에 붙여 ● 여기 온통 바람으로 가득 차 일렁이는 붉은 깃발이 있다. 영웅적이면서도 선동적인가 하면, 깃대를 지탱하며 한껏 웅크리고 있는 한 작은 사내의 희생적이면서도 소시민적 모습도 보인다. 「붉은 깃발, 2004」는 나로 하여금 일순간 격렬하면서도 착잡한 감정에 휩싸이게 만들었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그 장면 속에는 붉은 일렁임의 선동성을 뒷받침할 더 이상의 어떤 장치가 없다. 그저 바람에 펄럭이는 붉은 깃발의 이미지 외에 아무 것도 남겨져 있지 않은, 그래서 내가 보았던 그 강렬한 인상을 구체화할 어떤 단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없는 것이 있을 뿐이다. 침묵이 바로 그것이다. ● 작가는 선동적인 이미지를 선택하고 이것을 더 이상 심화시킬 수 없도록 구조를 간결하게 다듬어 놓음으로써 흔한 통념적 서사를 비우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비워진 그 공간을 침묵으로 가득 채워 대신 시적 서사의 힘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의 흥미로움은 motive의 시각적 호소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고도로 절제되어 간명해진 이미지 장치들이며, 침묵마저 code화 시키고 있는 idiom들이 다분히 propaganda로 흐를 가능성이 농후한 이미지를 전혀 다른 차원으로 끌어 올리고 있다는 점에 있다. 그리고 이런 전략 때문에 우리는 일렁이는 깃발의 선정적인 붉은 색채마저 투명한 아름다움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 또 다른 작품 「숨, 2003」은 「붉은 깃발」과 같은 맥락의 어법으로 제작되었지만 전혀 다른 종류의 감성과 code를 보여준다. 검은 양복을 입은 한 사내의 멈춰선 듯한 뒷모습과 간헐적으로 미세하게 흔들리는 어깨의 움직임이 전부인 이 작품은 숨쉬는 듯한 지극히 평범한 단순 동작만을 반복재생하고 있다. 역시 묵음 처리된 이 작품에서는 「붉은 깃발」과는 다른 종류의 미묘한 긴장을 느낄 수 있는데, 아마도 좁고 길게 프레임 지어진 스크린의 변형된 구조와 정지된 듯한 장면으로부터 아주 조금 들썩이는, 아니 차라리 약간의 떨림이라고 말해도 좋을 어깨의 느린 움직임이 시간의 팽팽한 긴장을 자아내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숨」은 무엇보다도 video art에 있어서의 시간성 문제를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다. video art를 두고 시간성 예술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미지의 재생에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 외에도, 그것이 시간성이라는 개념의 기반 위에 서 있는 예술이라는 점을 의미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해서 video art에 있어서의 시간성은 현실적 시간과의 동조 혹은 차이 때문에 강조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시각경험을 시간적 공간으로 확장시키는 중요한 method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간성은 편집의 과정에서 video frame에 어떤 변화를 가함으로써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개념과 그것을 현상적으로 드러내는 방법상의 인식차이를 통해 결과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바로 이점을 「숨」이 보여주고 있다. ● 화학성분으로 진짜 보다 더 강한 맛을 내고, 뇌에 전기자극을 가해 위의 포만감을 느끼게 한다면? 이것은 실제와 가상의 판단문제가 아니라 자극을 느끼는 주체의 리얼리티가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인지를 묻는 매우 혼란스러운 물음이 아닐 수 없다. 감각기관을 통해 경험을 수집하고, 이것을 판단함으로써 인식에 이르는 system 자체를 뒤흔들어 놓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믿고 있는 인식의 보편성은 칸트가 말하는 오성의 한계 외에도, 각 개체 기관들의 생물학적 특수성과 경험의 차이에 따라 발생되는 미세한 차이들을 억압하고 강제하는 다양한 인식론적 독재의 장치들에 의해 왜곡 변색된 결과이다. 바꾸어 말해서 사람들에게 있어 무엇이 가장 절박한 리얼리티인 것인가의 문제는 곧 무엇을 가장 절박하게 느끼고 있는가의 지극히 개체적이고 상황적인 조건에 따른 반응의 결과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 캔버스에 직접 그린 그림과 비디오나 사진 작품을 보는 일의 차이는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혹 작가가 직접 그린 회화와 기계적으로 재생된 사진이나 video art가 같은 맥락에서 판단될 수 없다고 말하고 싶다면, 자신이 타임머신을 타고 최소한 100년 전으로 되돌아가야 할 사람임을 깨달아야 한다. 손으로 직접 그린 그림에의 집착은 현대미술의 맥락에서 이탈된 수공예적 발상에 지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작품으로부터 무엇을 느끼게 되는가의 개별적인 리얼리티에 있는 것이다. 흔히 사진이나 비디오의 이미지들이 대상과 원본의 부재를 인식시키고 있다고 말하지만, 보다 중요한 점은 기계적 메커니즘을 거치면서 대상과 분리된 이미지들의 非물질화된 가상성을 통해 인식의 리얼리티 시스템의 실체를 드러낸다는 사실에 있다. ● 작가가 자신의 첫 개인전을 위해 준비한 또 하나의 작품 「무제, 2003」은 전기모터의 회전력을 수평왕복운동으로 바꾸어 놓는 장치에 남성용 구두 한 짝을 매달아, 모터의 회전에 따라 앞뒤로 움직이는 구두가 그 앞에 놓인 공업용 그리스를 벽면과 바닥으로 몰아붙이도록 고안된 설치작품이다. 통념적 서사를 철저하게 비운 앞의 두 작품이 video라는 매체에 의한 가상적 이미지의 세계에 기반하고 있다면, 「숨」과 같은 해에 제작된 「무제」는 일종의 기계장치에 의한 설치작업이라고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날카로운 금속성 소리를 상상하게 하는 이 원시적인 기계장치는 「숨」과 「붉은 깃발」에서 시도하고 있는 이미지의 단순반복을 실재 공간에서 시현하고 있다. 작가가 이 두 종류의 작업들을 한 공간 속에서 배치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필경 이 작가의 관심이 매체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매체들의 특성에 따라 code를 조정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idiom을 명료하게 제시하려는데 있을 것이다. 모터와 구두가 연출하고 있는 이 동작은 실재 공간에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관람자들에게 보다 분명한 리얼리티를 경험하게 할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단지 기계장치에 의한 움직임일 뿐이다. 구두는 인간존재를 떠올리도록 고안된 하나의 장치에 불과하며, 기계에 의한 반복적인 움직임과 함께 우리의 통념적인 인식을 교란하고 있다. 구두는 인간존재의 부재를 더욱 강조하면서, 앞뒤로 오가는 기계적 반복동작과 충돌하며 묘한 파열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 "What you see is what you see!"를 부르짖던 Frank Stella의 영웅적인 태도가 각광을 받던 시절과 그 발언이 그저 그럴듯한 말일 뿐임을 인식하는 지금 사이에는 40여년이라는 물리적 시간차이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다. 보이는 것과 그 대상 자체 사이에는 그것을 감지하고 인식하는 개체들마다의 차이가 커튼처럼 겹겹이 드리워져 있으며, 우리의 시각은 번번이 그 주름들의 표면에서 굴절된다. 설사 우리가 이 경험들이 지닌 함의含意 자체에 수긍한다고 하더라도, 문제는 우리가 무수한 개체적 차이들을 억압하는 인식론적 독재를 무릅쓰고 합의合意에 도달해야할 아무런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는데 있다. 그보다는 오히려 Stella의 영웅적인 태도 같은 일체의 문제들을 단호히 거부하고 대신 그 경계너머의 새로운 인식론적 방랑의 필요를 인식하는 편이 더 가치가 있는 일이다. ● 이태한은 미술을 규정하거나 뒤엎으려는 심각하고 개념적이며 영웅적인 태도 대신, 이미지와 소통의 시스템 내부로 파고들어 그 구조 자체를 조정함으로써 무엇이 예술적 요소이자 가능성이고 방법일 수 있는지를 조심스럽게 검토하고 있다. 나는 어떤 미학적 성취보다도 이런 신중하면서도 진지한 태도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모든 예술가들이 성취하려는 자신만의 미학적 가치는 바로 이러한 고민과 탐색의 결과물에 지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 오상길
휘어진 직선도로 위에서 ● 지도로만 익힌 도로를 실제로 달려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지도의 도상은 도로의 대략적인 모습을 나타낸 평면적 그림이기에, 지도를 통해 예상했던 도로의 모습은 실제 모습과 많이 다르다. 지도 속 도로와 실제도로가 다른 것은 도로를 지날 당시의 환경 속 변수들과 그곳을 보는 '나'와의 상호 유기적 관계로 인해 내가 그곳을 새로이 인식하기 때문이다. ● 실제 도로위에는 지도가 담을 수 없었던 수많은 변수들이 존재한다. 진짜 바람이 내 피부에 부딪히며, 진짜 공기를 코끝으로 들이마시며, 눈앞에서 진짜 나무가 흔들리고, 내 몸은 진짜 땅의 높낮이를 따라 흔들린다. 도식화된 지도 이미지가 결코 담을 수 없는 그곳의 '진짜'들을 종합적이면서 동시에 인식하게 되면서, 직선으로 표시된 도로는 미세하게 휘어진 도로로 바뀌고, 수치화된 거리는 그저 하나의 예상 길이가 되기도 한다. 즉, 머릿속으로 그렸던 도로는 하나의 예상에서 벗어나 각각의 변수들과 만나며 '나'의 온 신경과 감각을 통해 또 하나의 새로운 외관外觀을 완성하게 되며, 그곳을 경험한 '나'는 적어도 더 이상 그곳을 기존의 도식으로 인식하지 않는 결과에 이르게 된다. ● 그간 지켜보아온 이태한의 작업들 중 특정한 한 씬scene, 한 프레임frame을 선택하여 반복재생eternal loop, 복제하는 식의 간결한 구조가 눈에 띤다. 이러한 간결함과 반복적인 상황의 주입이 작품 안에서 인식의 변수로 작용토록 함으로써, 매우 낯선 비일상적 시간경험을 유도하는 듯 하다. 그리고 그 반복의 횟수가 리얼타임에 누적될수록 비일상적 시간의 경험치는 계속해서 확장된다. ● 예를 들어, 「붉은 깃발, 2004, 비디오, 1.5초 반복」에서는 붉은 색 깃발이 미친 듯이 펄럭이는 움직임에만 집중토록 함으로써 자칫 '레드-컴플렉스'를 떠올리기 쉬운 붉은색+깃발을 정치적 상징성으로부터 무력화 시켜버린다. 기억할 시간의 여유조차 주지 않는 빠른 반복재생은 오직 움직임만을 남겨둔 채 '나'로 하여금 이성보다는 감각적으로 이미지와 맞부딪히도록 유도하고 있다. 상징에 부여된 의미는 임의적이고 가변적인 것이다. 그럼에도 붉은 색 깃발을 권력과 어떤 힘의 상징으로 떠올리는 집단적 착각현상에 대해 의문을 갖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지금껏 내가 알고 있던 많은 것들이 곧 기억에 의한 정의와 내 자신의 습관에 지나지 않다는 자각과 함께 스스로 그것들을 대상화objectivation 하도록 만든다. 어린 아이들에게 이름을 반복해서 부르면 울음보를 터트리는 경우처럼, 감상자에게 특정한 상황을 반복적으로 주입시킴으로써 오히려 익숙한 것을 낯설게, 그리고 새롭게 생각토록 만들고 있는 것이다. ● 길안내를 위해 제작된 지도에는 일반적 도식이 더 효과적인 표현방법일 수 있다. 그러나 더 복잡한 변수들로 얽혀있는 현대의 삶 속에서 '앎'을 함부로 도식화 시킨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일 수 있는가 생각해본다. 나는 그 어떤 통념적 가치에 함몰되어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화려하고 편리한 현대의 삶 속에서 매 순간 그 의미와 가치를 의심하고 회의해야 한다는 점이 고달픈 일로 생각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역사는 진리로 통용되던 사실들로부터 새로운 인식으로 조금씩 전환되어온 과정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이것이 동시대 수많은 예술가들의 무모함마저 묵묵히 지켜보게끔 하는 것은 아닐까? ● 이 젊은 작가의 소박한 고민들은 나이의 무게보다 무겁고 큰 것 같다. 그것은 문제의식의 경중을 떠나 간결하고 가뿐한 방법으로 펼쳐 보이려는 시도가 그리 순조로워 보이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거리에서 내 몸을 부딪치던 말 없는 바람과 같이, 그의 말 없는 가뿐함은 나의 정신에 바람이 되어 부딪히는 듯 하다. 그것이 다른 감상자에게는 무엇이 되어 부딪힐지 궁금할 따름이다. ■ 최선
Vol.20050708c | 이태한 영상설치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