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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5_0701_금요일_06:00pm
대안공간 루프 서울 마포구 서교동 333-3 지하 Tel. 02_3141_1377 www.galleryloop.com
기억의 구조로의 침잠 ● 김보형의 작업을 마주하는 것은 기묘한 경험이다. 방향감각을 상실케 하는 어두운 미로를 통과한 후 투명하고 은은한 빛과 이미지의 흔적을 만나는 과정은 우리 내면과의 조우를 연상하게 한다. 그의 작업을 마주하는 순간 뒤통수를 맞는 듯 강한 시각적 충격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창조한 공간에 들어서는 관객은 길지 않은 시간에 작품에 침잠하듯 몰입하게 된다. 김보형의 작업은 빛과 그림자, 흔적과 시간을 재료로 기억의 구조를 소환하는 연금술이다. ● 김보형은 스스로의 작업 방식을 고스트 드로잉ghost drawing이라 일컫는다. 투명한 아크릴 프레임 위에 하얀 유성 크레용이나 유화물감으로 드로잉을 하고, 그 위에 강한 빛을 비추면 아크릴 프레임의 뒤편에 드로잉의 그림자가 생긴다. 재미있는 점은 우리의 시각이 확인하는 대로라면, 실제의 드로잉 보다는 뒤편의 그림자가 훨씬 선명하다는 것이다. 투명하고 하얀 드로잉의 실체 위에 그보다 투명하고 밝은 빛이 더해질 때 실체의 흔적은 오히려 희미해지며, 대신 그 뒤에는 검고 선명한 잔상이 형성된다. 고스트 드로잉의 이러한 속성은 실제를 회상하는 우리 기억의 구조를 드러낸다.
심리학에서는 과거의 기억을 심하게 왜곡하고 재구성하는 것을 두고 기억왜곡paramnesia이라는 병리적 현상으로 명명하고 있다. 그러나 굳이 정신병적으로 접근하지 않는다 해도, 누구나 오랜 시간을 함께 해온 지인과 대화를 나누다보면, 과거의 한 가지 사건을 서로 다르게 기억하는 경우를 맞닥뜨린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현실을 선택적으로 편집하는 인간 기억의 구조적 모순으로서, 프로이트는 "기억된 사건은 실제 그대로가 아니라, 이후 그것이 환기된 순간에 새롭게 구성 되는 것"이라 언급한 바 있다. 고스트 드로잉은 이러한 기억과 실제의 모호한 관계를 그대로 표상한다. 아크릴판 위에 투사된 빛이 시간이 지나며 밝아지고 어두워짐에 따라, 또 여러 방향에서 빛이 투사됨에 따라, 그림자는 선명해졌다가는 분산되고, 뚜렷해졌다가는 흐릿해진다. 우리의 기억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질되고 혼란스러워지고, 어느 부분이 실제의 영역인가를 명확히 가려낼 수 없듯이, 김보형 작업의 형식은 어느 것이 실제이고 어느 것이 흔적인지를 구분할 수 없는 구조이다.
김보형 작업의 내용적 소재는 기억의 구조를 닮은 작업 형식만큼의 중요성을 갖는다. 그가 고스트 드로잉으로 그려내는 대상은, 그의 말에 따르자면, '환치된(換置, displaced)' 인물들-이민 가족이나 고아원 아이들의 '사진'이다. 기억에 대해 실제를 증명이라도 하듯 찰나의 시각적 이미지를 담아내는 사진 매체의 속성, 그 중에서도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연출사진인 가족사진의 속성은 작업의 형식과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김보형은 가족사진 앨범 연작을 제작하며 작업노트에 "가족 앨범은 여러 순간과 그 정황의 수집물이다. 그 안에 담긴 이미지들은 한 가족이 어떻게 스스로를 기억하고 싶어 하며 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은지를 잘 대변한다..."고 적는다. 그의 언지가 암시하듯, 가족사진의 진실은 사진 프레임의 바깥에만 존재하며, 사진에 포착된 가족의 모습은 철저히 연출된 이미지일 따름이다. 그리고 환치된 인물들, 스스로가 속한 곳에서 늘 타자화 되는 존재로서의 이민자의 경우, 가족사진에는 스스로의 소속과 경계에 대한 불안감으로 말미암아 그 연출의 심도는 극대화 되어 나타난다고 그는 이야기한다. 진실과 허구가 혼란스럽게 교차되는 지점으로서의 가족사진은 고스트 드로잉의 형식에 담겨 시간성을 획득하고, 모호한 실제와 기억의 구조를 더욱 모호하게 만든 채,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우리 앞에 펼쳐 놓는다.
기억의 구조, 부서지고 흩어지는 우리 삶과 관계들의 속성(fragility)에 대한 메타포. 김보형의 작업은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것에 대한 연구이다. 사실 그의 작업은 동시대의 거대 담론들이 관심을 두고 있는 부분, 예를 들어보자면 시뮬라크르나 후기프로이트 이론 등과의 교집합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다각적으로 접근해 볼 여지가 많다. 그러나 잡히지 않는 진실이 자리 잡은 곳, 실제가 있는 곳에 다가서려던 개인적 단상에서 시작된 고스트드로잉을 두고, 솔직한 김보형은 폼을 재고 싶어 하지 않는다. 확실한 것은 그가 차분하게 우리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을 만드는 데에 성공했으며, 관객은 그가 제공한 공간에서 명상적인 침잠과 몰입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이주현
Vol.20050704c | 김보형 드로잉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