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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5_0616_목요일_06:00pm
참여작가 권오상_김건희_김성수_김주연_김혜련_박소영_방병상_신기운_신동필_유영호 이강욱_이영화_이주영_채우승_허윤희_가브리엘라 버틸러_브리짓 오브라이언 써니킴_얀크리스텐센_오싸 엘젠_하이디 헤세
작가연구 세미나 2005_0616_목요일_04:00~06:00pm_창동스튜디오 전시실 강수미_심상용_유진상_이진숙_최봉림
부대행사 작가별 스튜디오 개방시간_ 04:00~06:00pm 하이디 헤세 '아메리칸 애플파이 프로젝트'_ 06:00pm~_104호 작업실 뒷풀이 행사_ DJ 임식과 함께하는 바비큐 파티_07:00~09:00pm_야외조각장
창동미술스튜디오 서울 도봉구 창동 601-107번지 Tel. 02_995_0995 www.artstudio.or.kr
고통 받는 자를 위한 다큐멘터리 ● 신동필의 사진작업은 그의 말대로, "숨 막혔던 억압의 시대"가 남긴 고통의 상흔들이다. "개인의 삶을 송두리째 앗아간 제국주의와 자본주의, 권력으로부터의 횡포"에 대한 환기다. 오늘날 한국이 겉으로 구가하는 경제적 성장과 정치적 자유 이면에 가려진 치욕과 야만의 흔적들을 사진으로 포착하는 긴 여정이다. ● 우선 작가는 일본 제국주의가 한국 현대사에 절개한 아물지 못한 상처를 헤집었다. 「교토 40번지」에서 살아가는 '재일동포 1세대'의 르포르타주를 통해, 여전히 계속되는 '조센징'의 설음과 고난을 포착했다. 신동필이 「교토 40번지」라는 재일동포 집단 거류지에서 무엇보다 강조한 것은 그들의 열악한 경제적 조건이다. 노인들은 텃밭에서 먹거리를 힘겹게 재배하고, 그들이 하는 일은 고철 수집, 식당일, 곱창 판매 등과 같은 비천한 직업들이다. 그들의 끝나지 않는 고난을 표상하는 징후들은 직종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남루한 복장, 절망까지도 체념한 주름진 얼굴, 무두질한 듯한 손, 그들이 겪는 질병은 가난이 빚어낸 퇴적물이다. 게다가 신동필이 담은 「교토 40번지」는 고립된 섬과 같은 폐쇄적 공간이다. 그곳은 경제 대국, 일본에서 고립된 섬이며, 전통문화의 도시, 교토와 단절된 게토다. 다시 말해 일본의 경제적 풍요, 교토의 유구한 문화가 완전히 제거된 유배지이다. 신동필은 강의 범람을 임시변통으로 막는 모래자루 제방과 불법 점유지를 구획하는 철조망을 강조함으로써 그곳을 '조센징'을 가둔 유형지로 표상했다. 이 유배지에서 사는 조선인들은 일종의 정신분열증에 시달리고 있다. 일본인이면서 조선인이거나, 혹은 일본인도 조선인도 아니다. 한 할머니는 자신의 한국 이름을 잊어버렸고, 재일공포 1세들은 일본의 최대명절인 오봉을 '조선식'으로 향유한다. 신동필은 「교토 40번지」라는 감옥, 게토가 겪는 가난, 질병 그리고 정신분열을 통해 파렴치한 일본의 국수주의와 끝나지 않는 치욕의 역사에 눈감는 대한민국을 질책한다. 청산되지 않는 일제 식민주의 문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작가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폭 피해자와 종군 위안부의 애환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이후 제작한다.
필자가 보기에 신동필의 가장 탁월한 다큐멘터리 사진작업은 한 광부의 특정 시기의 삶을 통해 한국 산업사회의 한 단면을 조명한 「광부 '이춘하'」다. 그는 정교한 카메라 워크와 적절한 조명으로 한 광부의 힘겨운 노동에 '숭고한' 경의를 표했고, 이 존엄한 노동이 한국 산업사회에서 어떤 종말로 귀결되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다시 말해 '이춘하'라는 한 광부를 한국 노동자 계급의 '전형'으로 삼아 그들이 겪는 장래에 대한 불안감과 비극적은 아닐지라도 그 음울한 결말을 상징적으로 시사했다. 그는 위험하고 열악한 작업 환경 속에서 피와 땀을 바쳐 한국 산업화에 기여한 이름 없는 노동자 계급의 일원이며, 급변하는 한국 산업사회의 희생양이다. 그가 일하는 탄광은 그가 건설하는데 기여한 고도 산업사회 경제적 요청에 의해 문을 닫을 것이며, 또한 그의 쇠락한 육체는 한국 산업사회에 의해 버림 받을 것이다. 작가가 보기에 그가 갱도에서 입은 중상은 한 광부의 우연한 불행이 아니다. 오직 성장과 이윤만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의 논리가 힘없는 한 노동자에게 행사한 불가피한 가혹 행위다. 그의 퇴출은 사고가 아니더라도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작가의 말을 들어보자. "그가 일하던 주변은 잡초가 무성하고, 그곳에서 내려다 본 산 아래에는 카지노 단지 조성공사가 한창이다." 그러니까 작가는 「광부, 이춘하」를 통해 한국 산업사회 속에서의 노동자 계급이 겪는 암울한 운명을 바라보았던 것이다. 식민주의의 상처, 한국 산업사회에서 노동의 문제를 직시한 작가는 이제 남북 분단이 가져온 비극을 건드린다. 그 결과물은 '비전향 장기수들의 남녘 생활'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사진집 「우리 다시 꼬옥 만나요」이다. 분단체제에 의해 희생된 공산주의자들이 겪은 고난과 그들의 송환과정을 섬세하게 추적한 작업으로, 작가가 목표한 것은 철저한 공산주의자들의 인간적 면모이다. 남한의 반공교육이 한국민에게 세뇌시킨 공산주의자들의 '야만'의 얼굴을 '인간'의 얼굴로 바꾸려는 끈질긴 시도이다. 그리하여 반공교육의 허구성과 사상의 자유를 부인하는 국가 보안법의 비인간성을 밝히고, 더 나아가 이념을 넘어서는 민족의 동질성을 설파하려는 작업이다.
한국 현대사의 아물지 않은 비극적 상처들을 건드린 신동필은 최근 입양아, 정박아, 지체부자유인 등처럼 '홀트아동복지회'의 사업과 관련된 소외계층의 문제를 다뤘다. 작가는 역사의 뒤안길에서 존엄한 인간적 권리를 박탈당했던 이들에게 보냈던 연민과 동참의 시선을 불행한 출생과 어려운 성장 과정, 그리고 곱지 않은 사회적 시선 속에도 자신들의 삶을 일궈나가는 장애자들에게도 보낸다. 그들의 힘겨운 삶과 함께 하는 보육사, 자원봉사자, 위탁모, 입양부모들과도 존경과 사랑의 시선을 나눈다. 「교토 40번지」(1999)에서 「사랑을 행동으로」(2005)까지 신동필의 사진 다큐멘터리의 범주는 분명하다. 역사의 흐름에서 소외되어 고통 받는 자, 산업화의 뒤안길에서 그의 땀을 보상받지 못한 자, 부조리한 정치 상황에서 탄압받은 자, 출생의 축복을 받지 못한 자, 건강한 육체의 은혜에서 멀어진 사람들이다. 한 마디로 신동필 사진의 주제는 다수의 정상성에서 멀리 있는 주변인, 예외적 삶을 살아가는 이방인이다. 작가는 그들의 삶에 연민과 애정을 느끼며, 그들의 실상에 사진으로 참여하고자 한다. 그는 이러한 선택을 실존주의적 존재론으로 다음과 같이 표명한 바 있다. "나는 사람이 적극적으로 사회에 참여할 때 절망과 고독과 무력감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의 하나"이다. 즉 그에게 있어 사진을 통한 '사회 참여'는 인간 존재의 본원적인 '절망과 고독과 무력감을 극복하는' 방법인 것이다. 분명 사회 참여는 인간의 존재론적 고통을 약화시키고, 그의 사진집 「또 다른 가족」의 후기의 제목처럼 '나눔으로 미래를 밝히는 큰 빛'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신동필의 사진을 통한 사회 참여, 그의 다큐멘터리 휴머니즘은 적지 않은 아쉬움을 남긴다. 예외적 소수, 다수의 관심과 배려에서 멀어진 소수를 옹호하는 그의 사진은 언제나 우리 시대의 다수가 관념적으로 공감하는 관점을 좇는다는 점이다. 다수가 동조하기 때문에 사회적 이슈가 되는 문제만을 그의 다큐멘터리 주제/소재로 삼는다는 것이다. 만약 작가 스스로 자신의 다큐멘터리가 '포토저널리즘'의 영역에 머무는 것에 만족한다면, 필자의 아쉬움은 사족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작가가 그의 다큐멘터리를 '작품'의 영역에 진입시키고자 한다면, 자신이 선정한 다큐멘터리의 소재를 일반 상식의 시선을 넘어서는 예외적 시각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혹은 작가의 다큐멘터리 사진과 더불어, 그의 사진에 힘입어 사회적 이슈가 되는 소재를 발굴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다큐멘터리 사진 '작품'에서 일반적 견해, 상식적 관점을 두 번 보고자 하지 않는다. TV 영상이나, 신문, 잡지에서 되풀이 된 이미지를 다큐멘터리 사진 '작품'에서 다시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신동필의 첨예한 역사의식, 그의 따뜻한 인간애, 작가의 뛰어난 카메라 워크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아쉬움이 남는 것은 사태에 대한 예외적 관점으로 시대의 상투적 관념을 부수는 파격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의 사진적 주제/소재가 새로운 사태라기보다는 눈과 귀에 익은 현실이라는 점이다.
도시 군중과 공간에 관한 연구 ● 발터 벤야민 Walter Benjamin은 「보들레르의 몇 가지 모티브에 대해서」라는 글에서 "대도시의 군중과의 접촉과 충격"은 보들레르 시를 이해하기 위한 선결조건이라고 명시했다. 이 언급은 방병상의 사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의 사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러 집단과 계급이 뒤섞인 채 무형의 무리를 지어 다니는 도시의 군중 속에서 작가의 시선이 경험한 쾌감과 도시공간에 대한 이해를 검토하여야 한다. 방병상의 사진에 나타나는 대도시의 군중은 엥겔스가 「영국에서의 노동자 계급의 위치」에서 언급한 19세기 런던의 군중과 흡사하다. 벤야민의 위의 글에서 엥겔스를 재인용하면, "그들은 서로 아무런 공통점이 없으며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처럼 서로 치닫듯 스쳐 지나가고", "이러한 개인들이 작은 공간으로 밀집해서 밀어닥치면 밀어닥칠수록 잔인한 무관심, 즉 자신의 사적인 관심사에만 무감각하게 고립되는 현상"을 보인다. 방병상이 포착한 군중 역시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처럼 서로 치닫듯 스쳐 지나가고, 작은 공간으로 밀집해서 밀어닥치면 밀어닥칠수록 잔인한 무관심'을 보이는 도시인들이다. 이런 군중에 방병상은 매혹되어 사진작업의 시선을 송두리째 빼앗겼다. ● 초기 작업인 「Red Road」나 「Flowers」에서 작가는 '서로 치닫듯 스쳐 지나가는' 군중들에, 특히 여성들에게 매혹 당했다. 알몸 자국이 드러난 여성들의 복장에 (Red Road), 그리고 바삐 지나는 여성의 옷에 새겨진 꽃무늬에 (Flowers) 그의 시선은 몰입하였고, 관음증에 걸린 그의 카메라는 그것들을 바삐 좇았다. 사진을 향한 열정과 여성에 대한 성적 욕망이 뒤섞여 작가의 카메라 워크는 종종 흥분 상태를 감추지 못했다. 당시의 방병상은 대도시의 여성들이 발산하는 육체성에 사로 잡혀 도시의 군중들과 어떤 느긋한, 느슨한 거리를 유지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언제나 거리를 지나는 여성들에게 빠르게 다가섰고, 그에게 성적 자극을 가하는 신체의 세부를 조급하게 프레이밍했다.
그러나 작가는 도시의 군중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면서도, 서서히 그들로부터 자기를 격리시켜나갔다. 군중으로부터 고립상태를 유지하면서 그들의 시선, 표정 그리고 제스처를 천천히 음미했고, 그들 시선의 상호관계, 복장의 대비, 제스처의 다양함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홀로 떨어져 거리의 군중을 카메라로 은근 슬쩍 겨냥하는 자신이 그들의 소심함, 호기심 혹은 적대감을 부른다는 사실도 의식했고, 뻔뻔스럽게 그것을 사진촬영의 '결정적 순간'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그는 도시 군중의 눈요기가 되어주면서, 그들을 눈요기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거리두기'를 통해 작가는 군중들의 행동과 표정이 부조리할 정도로 획일화 되어 있음을 발견했고, 그 획일성에서 벗어나는 '생뚱맞은' 개인이 돌출하는 순간을 선호했다. 혹은 타자들에 대해 절대적으로 무관심한 채 오직 자신의 대상에만 집착하는 군중이 연출하는 이산(離散) 구조를 찾아내는데 사진의 쾌감을 느꼈다. 획일화된 군중 속에서 엉뚱한 개인이 등장하고, 군중 개개인이 주변에 초연한 채 오직 자신의 대상에만 몰두하는 양상을 포착하기 위해 방병상은 현재까지 세 개의 시리즈를 준비했다. 첫 번째의 무대는 도시의 거리와 그 주변으로 설정되었다. 버스 정류장, 지하도 계단, 지하철 역, 영화관 앞, 거리 주변의 앉을 자리 등 도시의 산보객인 작가 역시 항상 걷고, 앉고, 기다리던 일상의 도시 거리였다. 작가는 이 거리들의 일상에서 일어나는 한 개인의 소외된 동작, 타자에 대한 군중의 초연한 무관심과 자기집착을 카메라를 통해 응시했고, 그 결과물은 「낯선 도시를 걷다」라는 전시회로 소개되었다.
두 번째 시리즈는 한강 고수부지를 무대로 이루어졌다. 「Looking at Sunny-Side」로 명명된 이 작업은 가족 단위로, 연인과 친구들이 여가와 휴식을 즐기는 한강공원들에서 도시군중들이 연출하는 소외와 고독의 시선, 무관심과 자기집착의 표정, 그리고 동작의 획일성을 포착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방병상이 보여주는 한강 고수부지는 물이 흐르는 사막, 풀밭과 꽃이 있는 황무지, 사람이 북적되는 외딴 섬이었다. 고독이 강처럼 흐르고, 자기집착과 무관심이 풀밭처럼 펼쳐진 기이한 공간이었다. 한강변에서 군중들은 대부분 홀로, 혹은 쌍으로 격리되어 소외와 자기집착의 제스처를 획일적으로 연출했고, 그리하여 고수부지를 찾은 시민들은 서울이라는 사막에서 길을 잃고 한강이라는 오아시스를 찾는 대상(隊商)처럼 나타났다. 혹은 황량한 풀밭을 떠도는 주인 잃은 양떼처럼 포착되었다. 그들은 어쩔 수 없는 고독 속에서 타자의 관심을 부르지만, 그들 모두는 오직 자기의 대상만을 응시할 '잔인한 무관심'에 사로잡혀 있었다.
세 번째 시리즈는 「In the Green Heaven」으로 도심의 여가공간에서 군중이 보여주는 행태에 관한 연구이다. 그러니까 분수대, 공원, 야외 수영장, 고궁등과 같은 곳에서 도시인들이 보여주는 획일화된 제스처, 아이러니가 표출되는 순간을 고정시키는 작업이다. 무엇보다도 작가는 도시군중이 보여주는 행태의 아이러니, 공간의 패러독스가 선명히 부각되는 카메라의 시점을 택했다. 분수대가 수영장으로 변모하고 의미와 용도를 알 수 없는 빨간 상징물이 군중의 무관심 속에서 거리를 장식한다 (연신내, 무지개, 2002). 여의도 공원은 현대식 건물들에 포위된 일종의 도시군중의 수용소이다 (여의도 공원, 킥보드, 2002). 도심의 고궁 너머에는 현대식 건물들이 규칙성을 일탈한 한 개인과 관광객들을 수호하는 신상처럼 서있고 (창덕궁, 가이드, 2002/경복궁, 엄마와 아들, 2002), '붉은 악마'들은 한국 축구를 응원하러 온 것이 아니라 경기장 일대를 점령하기 위해 몰려온 듯하다 (하늘공원, 붉은 악마, 2002). 여의도 야외 수영장은 일종의 거대한 남녀 혼탕이지만 어떠한 성적 호기심도 부재한다 (여의도 야외 수영장, 애드벌룬, 2002). ● 「낯선 도시를 걷다」에서부터 「In the Green Heaven」에 이르는 방병상의 작업은 단지 도시군중과 도시공간의 아이러니만을 탐구한 것이 아니다. 작가는 사진 이미지와 제목의 새로운 상호관계를 모색했다. 이것은 도시에 발견되는 반복되는 일상의 장면들이 관객에게 '낯설음'으로 다가오도록, 낯익은 도시군중의 행태와 공간을 관객들이 '비판적 거리'를 두고 바라보도록 유도하려는 일종의 사진적 '장치'이다.
기존의 사진이미지와 제목의 관계는 거의 대부분 세 종류로 나뉜다. 첫째는 구체적 사진이미지를 추상적 의미의 기표 signifiant로 간주하고, 그것의 기의 signifie를 제목으로 설정하는 방법이다. 예를 들면 노인의 주름진 얼굴 사진에 '한' 혹은 '세월'이라는 제목을 붙이는 방식이다. 두 번째는 사진이미지의 주제가 되는 대상, 혹은 그것의 정체성을 제목으로 동어 반복적으로 표기하는 것으로, 예를 들면 한라산 백록담을 찍은 다음, 그것의 제목으로 「한라산, 백록담」이라고 명기하는 방식이다. 세 번째는 사진이미지가 내재하고 있는 다양한 의미내용을 제목으로 고정시키지 않고, 관객이 그것을 자유로이 상상하도록 '제목 없음', 즉 「무제」를 제목으로 삼는 방법이다. 방병상은 이러한 재래적 방식으로는 관객들에게 자신이 집요하게 탐구해온 도시군중과 공간들을 '낯설게' 제공할 수 없다고 판단한 듯하다. 그래서 그는 주변부에 위치한 사소한 대상을 사진의 제목으로 삼아, 그의 사진을 일종의 숨은 그림 찾기의 이미지로 변모시켰다. 그리하여 관객으로 하여금 그 일상의 이미지들을 비판적 거리에서 찬찬히 들여다보게 만들었다. 이미지와 제목의 그 비정상적인 어긋남, 삐걱거림을 통해 물처럼 흘러들고 모래처럼 흩어지는 무형의 도시군중의 이미지와 불가해한 도시공간의 복잡다단함을 재고하게 만들었다. 도시 풍경의 하찮은 세부를 사진 제목으로 강조함으로써 지루한 도시의 일상에 내재된 푼크툼 punctum의 매력을 부각시키는 전략을 성공적으로 전개했다. ■ 최봉림
Vol.20050626d | 창동3기 입주작가 오픈스튜디오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