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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5_0616_목요일_06:00pm
참여작가 권오상_김건희_김성수_김주연_김혜련_박소영_방병상_신기운_신동필_유영호 이강욱_이영화_이주영_채우승_허윤희_가브리엘라 버틸러_브리짓 오브라이언 써니킴_얀크리스텐센_오싸 엘젠_하이디 헤세
작가연구 세미나 2005_0616_목요일_04:00~06:00pm_창동스튜디오 전시실 강수미_심상용_유진상_이진숙_최봉림
부대행사 작가별 스튜디오 개방시간_ 04:00~06:00pm 하이디 헤세 '아메리칸 애플파이 프로젝트'_ 06:00pm~_104호 작업실 뒷풀이 행사_ DJ 임식과 함께하는 바비큐 파티_07:00~09:00pm_야외조각장
창동미술스튜디오 서울 도봉구 창동 601-107번지 Tel. 02_995_0995 www.artstudio.or.kr
간접성에 관하여 : 브리짓 오브라이언의 '뿌리기'와 이강욱의 '단계들' ● 1. 브리짓 오브라이언의 '뿌려진 것들로 된 이야기' ● 다양한 색의 칼라페인트를 막대기로 뿌려대는 것으로 시작하는 오브라이언의 작업은 의당 잭슨폴록의 '드립 페인팅(drip painting)'을 환기하게 한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오브라이언의 것은 잭슨 폴록의 것과 일면 동일하면서도 근원적으로 다르다. 잭슨 폴록의 '뿌리기'는 이성의 억압을 무마하고, 그 통제논리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부득불의 조치였다. 일테면 자동기술적(自動記述的)이란 의미인데, 그것을 통해 폴록이 입증하고 싶었던 것은 오로지 심신(心身)의 '자유'였다. 해서 폴록의 행위는 '세속-혹은 세계-'를 등지는 어떤 준엄한 의례 같은 것이었다. 그에게 회화는 그 '떠남'의 격한 욕망을 '쏟아 붓는' 하수구 같은 곳이었다. ● 페인트를 뿌리는 오브라이언의 행위 역시 자동기술적이다. 그 행위엔 분명 이성과 논리를 통해선 기술될 수 없는 '어떤 자신'이 내면 깊은 곳으로부터 '쏟아져'주기를 바라는 기대가 내포되어 있다. 언젠가 샤르트르(J.-P. Sartre)조차 "정작 의식의 옹달샘 속엔 '나'란 조약돌이 존재하지 않는다"하지 않았던가. 영국의 흄은 그것을 "나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나는 발견되지 않고 내가 경험한 것들만(bundle of experiences) 발견될 뿐"이라 했다. 그러니 잡을 수도 없고 잡히지 않는 '나'가 제 스스로 쏟아져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것이 초현실주의 의 그것을 비롯한 자동기술적 행위의 미학적 근간일 것이다. 반면, 오브라이언에게 이같은 뿌리기와 그것이 담보하는 자동기술은 하나의 경과조치일 뿐 이라는 점에서 폴록의 그것과 다르다. 뿌리는 행위 자체는 작가에게 결코 궁극이 아니다. 오브라이언의 작업은 오히려 뿌려진 페인트가 마르고 회수되는 과정에서 비로소 시작된다 해야 할 것이다. 즉, '바닥'에서 떼어낸 마른 뿌려진 페인트 조각들이 '벽'에 재구성되는 바로 그 순간에 말이다. 어쩌면, 작가의 내면에 잠복해 있던 여러 이야기들, 혹 그것들의 부스러기들이 불려나오는 것은 바로 이때부터 일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오브라이언의 작업은 세속으로부터 떠나고 이야기를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계의 구성에 관한 이야기를 구성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의 뿌리기는 다만 그 자신의 '특별한' 이야기를 위한 고유한 재료를 준비해가는 과정이다. 이야기의 단초들을 위한 익명의 사건과 불분명한 기억들을 위한 데이터베이스를 만드는 것이기도 하고.... 결국 그것은 이야기의 구성이라는 전반적인 문맥 안에서만 본질적인 요인이 되는 것이다. 오브라이언의 궁극은 이 모호하지만 통제되지 않은 편린들, 열린 용어들로 구성되고 재구성되는 '이야기'인 것이다. 오브라이언의 이같은 이야기 구성은 예컨대 등장하지도 않는 고도(Godot)가 서사의 중심이 되는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의 부조리 소설, 즉 전통극의 '조리', 즉 논리성의 중추역할을 하는 플롯상의 연속성, 성격의 구현 및 합리적 언어가 교묘하게 뒤틀려진 부조리 문학의 양식과 흡사하다. 오브라이언의 이야기는 쏟아져 나온 것들, 자동기술된 것들의 수집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것은 아마도 이같은 우연성에 의해 씌어져야 하는 이야기고, 문법 대신 전복된 조리와 헝클어진 논리에 입각해 구성되어져야 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낭만적인 사랑이나 논리적으로 설명가능한 인과관계, 흥미로운 배경, 매력적인 주인공 같은 명료한 요소들에 의하지 않고 말이다. 여기서 기억은 뚜렷하지 않고, 소통은 불완전하다. 작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희미하지만 무엇엔가 다가서는 방식"으로만 다가설 수 있는 것이 말한다. 그가 전시제목으로 붙인 'Land Ahoy' 역시 미지의 세계를 탐색하는 탐험가나 항해사들의 옛 말투라 한다. 작가는 자신의 이 '작은 이야기들', 위엄에 찬 웅변 보단 '수줍고 우회적으로 언어들을 끌어 모으는 방식'에 더 가까운 소박한 것들을 통해 '전지전능한 저자'라는 기존의 보좌에서 내려온다. 오브라이언은 구성과 재구성을 오가며 꼬물거리고, 망설인다. 작가의 이야기는 우회적이고 최종은 늘 유보되어 있다. 그것은 어렵게 찾아졌지만, 여전히 전반적인 조리는 결여되어 있는 이야기며, 여전히 남아있는 사이 공간들, 이야기들 사이의 간극들, 가벼운 연대, 그리고 이 모든 것들로 인해 열려져 있는 이야기다.
2. 이강욱의 중성화 하는 단계들 ● 이강욱의 회화는 장식적이다. 빛을 받으면 보석처럼 빛나기도 한다. 이미지는 부드럽고, 색조는 약간 창백한 파스텔 톤으로 차가운 편이다. 예민하게 실천된 감각적인 곡선들은 한 곳에 응집되었다 어느새 캔버스 전체로 퍼져나가곤 한다. 이미지의 전반적인 인상은 단정하고 질서정연하며 도시적이고 여성적이다. 한 미술평론가는 그의 세계에서 '우연', '유희적 속성', 그리고 '무질서 속의 조형적 질서'를 중요하게 언급한다. 하지만, 이강욱의 회화는 우연이 아니라 우연의 통제에 의해 더 잘 설명될 수 있다. 자신의 고유한 회화적 단계를 차례로 거치는 과정에서 유희는 계산과 질서유지의 방식들로 인해 완화되고, 우연은 통제된다. 등장하는 모든 요인들은 거의 완전하게 자신의 자리를 찾고 질서정연하게 실천되고 있다. 이강욱 이미지의 이같은 속성은 어떤 의미에서 간접성의 귀결이다. 간접성이 이강욱의 세계를 여는 단초일 수 있다 할 때, 그 간접성은 결코 단번의 직접적인 요인으로 인해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는 의미에서의 간접성이다. 즉 각각의 단계를 거치면서 확보되는 간극들의 축적, 또는 점진성에서 기인하는 간접성이다. 실제 이강욱의 세계는 완성되기까지 여러 단계를 거친다. 개략 그것은 서너 개의 단계로 구성되는데, 주어진 캔버스의 바탕에 (불분명하지만) 동,식물의 세포를 확대한 듯 한 현미경 사진 이미지를 얹히는 것이 그 첫 번째 과정이다. 이 이미지들로 인해 화면에는 어떤 꿈틀거림 같은, 명백하게 규명하기 어려운 생명의 단서들이 자리하게 된다. ● 그 다음은 그 위에 흰색의 반투명 물감을 두텁게 칠함으로써 그 이미지가 겨우 정체를 알아볼 수 있을 만큼만 희미하게 배어 나오도록 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화폭 전체는 이미지의 직접성과 노골적인 드러냄을 후퇴시키는, 불확실한 배음(背音)을 가진 차가운 파스텔 톤으로 화한다. 현미경적으로 확대된 세포 이미지는 세부묘사가 사라지고 톤이 완화된 채로 은밀하게 잠재하게 된다. 이 잠재성이 화면 전체에 모호하지만 분명 존재하는 어떤 유기적인 뉘앙스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 다음의 과정은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중층의 구조 위로 일관된 속성의 곡선들을 세련되게 왕래시키는 것이다. 연필과 펜 등을 사용해 분방하면서도 중심과 변두리가 분명한, 맺혔다 풀려나가곤 하는 정돈된 유연함의 드로잉을 실현하는 것이다. 이 선들에 의해 집중과 분산, 몰입과 산만의 긴장감이 화면 전체에 조성되게 된다. 또한 이 선들은 최종의 과정, 즉 다양한 표지들을 남기고 미세규모의 큐빅, 유리구슬 등을 캔버스 위에 뿌려나가는 데 있어 기준선이 되기도 한다. 이제 마지막은 이 선들의 궤적을 따라 무수한, 그리고 다양한 속성의 표지들과 동시에 반짝거리는 무수한 것들을 뿌리는 과정이다. 그것들은 때로 선의 중간 중간에, 혹은 주변에 임의로 찍혀진 듯 한 무수한 선들이거나 얼룩이고, 점보다는 큰 다양한 크기의 원형이거나, 끝내 모호한 어떤 암호 같은 것들이기도 하다. 선이 지나가는 거의 모든 곳에 예외없이 등장하는 이 무수한 지표들에 의해 이강욱의 이미지는 어떤 지도의 일부와 흡사해 보이기도 할 것이다. 또한 이 크고 작은 유리구슬들이 빛을 반사하는 동안 이미지의 장식성은 극대화된다. 이미지를 더욱 지도, 혹은 우주의 궤도표시처럼 보이게도 하는 이 반짝거림으로 인해 이강욱의 회화는 더욱 장식적이고 화려한 문명의 상징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이러한 복합성, 곧 직접성의 결여인 그것으로 인해 이강욱의 세계는 매우 탈성격화된 중성의 것이 된다. 그것은 추상도, 구상도 아니다. 내러티브이기도 하고, 동시에 그것의 부정형이기도 하다. 부드러우면서도 차갑고, 잠재적인 생동을 표방하는 듯 하면서도 지표들의 건조한 군집에 지나지 않기도 하다. 이러한 모호함, 그 어떤 직접적인 서사도 회피하는 것이 이강욱 회화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이다. 이강욱 회화를 완성해 가는 각각의 단계들은 서로를, 그러나 조용히 상쇄한다. 우리의 생이 생성되고 조직되는 근원적인 모티브에서 출발하지만, 그것과는 전혀 무관한 곳에 종착한다. 세포조직 같은 뭐라 설명을 대기 어려운 원시성은 오히려 문명적이고 도시적인 속성에 가 닿는다. 메시지의 무게는 한결 완화된 반면, 분위기는 모호한 추상에 가까워진다. 일테면 중화의 과정을 겪어나가는 것이다. 이러한 상쇄는 큐빅과 유리구슬의 산포에 이르러 결정적인 것이 된다. 반짝거림이 그나마 화면 안에 잔류했던 야성을 남김없이 제거해버리기 때문이다. 이것은 화면이 어떤 도발적인 차원의 요인도 제거해 가는, 기꺼이 도시적이고 교양적인 쪽으로 굴절되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강욱의 회화가 거치는 이같은 단계들을 점진적인 축적의 과정으로 볼지 상쇄의 과정으로 볼 지는 관점의 문제일 수 있다. 단 그것이 축적이든 상쇄든 분명한 것은 이 점진적인 중간과정들의 작동에 의해 최초의 투여와는 사뭇 다른 결과가 산출된다는 데에 있다. 바로 이 것이 작가의 세계에서 간접성을 언급하는 이유인 것이다. ■ 심상용
'그리다' ● 예술은 삶과의 관계에서 언제나 '그럼에도 불구하고(Trotzdem)'의 태도를 취한다. 그리고 형식을 창조하는 것은 생각할 수 있는 불협화음의 존재를 가장 깊이 확인 하는 행위이다.(루카치, 소설 형식의 이론, 반성완 옮김, 심설당, 1985, 92쪽) ● 죽음을 선언 받은 회화가 병상에서 다시 일어서더니 더 풍요로워지는 신비스러운 장면으로 20세기는 막을 내렸다. 아방가르드의 회화의 종언 선언에서 시작하여 포스트 아방가르드의 회화의 복원에 이르는 지난 세기의 뜨거운 논쟁은 결국 새로운 시대의 회화의 존재성 및 그 새로운 방향성에 대한 모색의 다름 아니었다. 회화의 이 지독한 생명력의 근거는 우리의 그리기에 대한 욕망이 어쩌면 잠시 잊혀졌다가도 때 되면 찾아드는 목마름이나 배고픔 같이 절실한 뿌리를 우리 안에 가지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자기 표현과 세계 해석의 한 형식으로서 그리기에 대한 본원적인 갈망 말이다. 김혜련은 캔버스에 유채로 허윤희는 종이에 목탄으로 '그린다'. 이 작가들의 작업은 이 원초적인 '그리기'에 대한 본원적인 욕망에 충실히 조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최근의 미술이 '풍부한 비평과 부족한 작품'이라는 한탄이 들릴 만큼 이른바 '컨셉트'에 의해서 지배받고 있는 것과 달리 이 작가들의 작업은 이 '그리다'라는 동사가 가진 본래의 소박하고 진정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그런데 이런 소박함은 이슈에 목말라하는 저널리즘적인 태도에는 실망을 안겨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보다는 다양한 '그리기' 자체에 대해서 끊임없이 이슈화 시키지 못하는 무기력한 비평의 반성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토도로프의 말 대로 "회화는 본질적으로 그려진 것을 예찬하는 것"이며 어떤 사물이 그림으로 그려졌다는 것은 그 만큼의 예찬의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예찬'이라는 것은 유의미한 담론 형성의 가능성을 의미한다. '그린다'라는 행위는 삶에서 무표정하게 존재하는 것들을 호명하는 일이며 이 호명을 통해서 호명된 존재와 세계는 그들의 상호적 관계, 그리고 세계 자체를 드러낸다. 이 두 작가들의 작업은 그 문제의식에 있어서나 작품을 구축해나가는 방식에 있어서나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 단지 이들에게서 굳이 어떤 겉으로 드러나는 공통점을 찾아본다면 두 작가 모두 독일에서 오랜 시간을 공부하며 작가로서의 역량을 쌓아갔다는 점이다. 이 작가들이 수업시기를 거친 1990년대의 독일 미술이란 바로 1980년대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포스트아방가르드 회화의 개화기로 독일 회화가 새로운 융성기를 맞으며 세계적인 대가들을 배출해낸 시기이다. 포스트아방가르드의 회화는 회화의 존재를 부정하고 위협했던 바로 그 요소(새로운 미디어의 발달, 재현과 추상의 동시적 위기)들을 흡수하여 스스로의 것으로 만들어 나갔다. 회화의 종언을 선언했던 작가들이 일종의 방법론적인 통일성을 요구하는 강령을 가지고 자기를 선언하며 '운동'이라는 형태로 자신을 주장했던 것과는 달리 포스트아방가르드 회화는 다양한 형태의 그리기 자체를 즐기는 형태로 전개되었다. 새로운 매제가 제기하는 문제의식의 수용과 유화나 드로잉 같은 전통적인 매제의 사용도 이제는 어떤 강박증으로 느끼지 않아도 좋았다. 이 두 작가가 보여주는 '그리기' 자체에 지극히 충실한 태도도 이런 영향이 적지 않을 것이다. 당연히 '그린다'라는 행위의 역사성, 그리는 방식의 변화는 '지금, 여기'의 우리의 회화, 우리의 존재를 드러낼 것이다. 김혜련과 허윤희의 그림은 매제의 다름 만큼이나 다른 그리기 방식을 보여준다. 전자가 회화적 요소와 그 가능성이라는 보다 객관적인 요소에 대한 탐구가 도드라진다면 후자는 예술적 주체의 진술 자체가 중요한 그리기이다.
김혜련_붓으로 그리다 ● 작가는 커다란 캔버스에 붓으로 신발을 그렸다. 그리고 또 작가는 무엇을 그렸는가? 2003년의 '난(?) 그림과 서양화'라는 타이틀의 개인전에서는 작가는 자신의 두 가지 가능성을 한꺼번에 보여주었다. 이 전시에는 간략하고 분명하게 처리된 사물의 윤곽선이 각 색면을 구분 짓는 방식의 작품과 보드라운 색면을 우선 배열하고 나이프로 긁어내는 방식의 작품이 함께 포함되어 있었다. 굵은 윤곽선은 사물을 추상화시켜 초상적인 성격을 지워버리면서도 견고한 형태의 안정감을 추구하려는 의도이다. 후자의 작업에서는 윤곽선을 약화시키는 대신 화면 전면에 다양한 색채들을 병렬시켜 마치 '태초에 색이 있었다'라고 선언하는 것처럼 색채간의 조화를 추구하였다. 다시 말해서 사물의 형태의 명료함과 색채의 조화라는 이중의 추구가 그의 작업 속에서 늘 공존하고 있었다. 신발 시리즈는 지금까지 자신의 작품 속에 내재해 있던 두 가지 가능성들을 부단히 충돌시켜서 다채로운 회화의 공간을 열어 보인다. 작가는 처음에는 여러 가지 형태의 신발을 그렸는데 최종적으로 화면에 남은 것은 흰 고무신 혹은 비단 당혜와 같은 형태의 신발이다. 이것이 최종적인 화면의 주인공이 된 것은 가장 단순하면서도 단아한 기품이 있고 무엇보다도 풍부한 상상력의 촉매가 되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벗어놓은 신발은 지금 이곳의 그 존재의 부재, 언제나 시간 속을 떠돌아야 하는 존재의 상징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승 혹은 이곳을 떠나서 어디론가를 향한다는 의미가 증폭되어 신발은 배의 모양을 의태하기도 한다. 작가의 신발은 그래서 언제나 이곳,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을 향하고 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예술은 사물적인 본성을 가지고 있지만, '사물적 차원을 넘어서는 또 다른 어떤 것'이며 바로 '다른 어떤 것'이 바로 예술의 본질이다. 눈에 보이는 지시체를 넘어서는 의미의 생성이 물감을 발라놓은 캔버스를 예술이게끔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의미의 생성체인 신발로 연상되는 여행, 혹은 떠남이 존재론적인 불안에서 기인하는 고독한 방랑을 의미하지는 않는 것 같다. 고호의 신발을 둘러싼 논쟁에서 데리다가 지적한 것처럼 작가의 신발은 형태적으로 온전한 한 쌍이 아니어서 오히려 상사(similitude)에 입각한 시뮬라크르의 미학을 겨냥하고 있다고 보는 게 옳다. 때로는 화면 구성의 요구에 맞추어서 한쪽이 길어지기도 하고 때로는 한 쪽만이 등장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비록 상식적인 의미에서 한 켤레는 아니지만 이 경우에도 의지할 짝이 없는 것은 아니며 한 쪽만 등장을 할 경우에도 짙은 그림자를 동행으로 동반하고 있다. 이런 존재론적 안정감과 조화에 대한 평온한 확신은 작가의 화면의 생명력을 부여하는 일차적인 활력이 된다. 신발이 배가 되었을 때 배경은 기꺼이 물이 되어 준다. 형태가 물러서면 배경이 주인공이 된다. 배경이 스스로 생명력이 넘치는 공간이 되기 때문이다. 동일한 형태의 신발이 그려진 네 폭의 연작은 배경의 색면이 다양한 변주를 시현하는 주인공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런 색채에 대한 탐닉 이외에도 화면에 결정적인 활력을 부여하는 것은 바로 붓질이다. 뭉뚱그려 푸르다 할 화면은 다양한 뉘앙스로 붓질로 그려져 있다. 색의 다양한 변주를 담지하고 이끌어나가는 것은 오히려 이 활달한 붓질이다. 붓질의 생생한 움직임은 음악적인 리듬과 조화로 감지된다. 빠르게 붓이 달려가는 숨가쁨, 색의 구비를 넘을 때 마다 느껴지는 희열, 뉘앙스가 다른 색이 부딪히며 생기는 갈등에 직면한 당혹스러움, 이를 화해시키면서 전체적인 통일로 향해나가면서 느끼는 장악의 기쁨이 고스란히 화폭에 기록되어 있다. 붓은 물감을 실어 나르며 환희에 찬 흔적을 캔버스에 남겼다. 신발 그림에서 무엇보다 도드라진 것은 신발이라는 존재를 감싸고 있는 이러한 명료한 통일성, 조화의 획득에 대한 자신감이다. 물감통 안의 무의미하게 나열되었던 색채를 하나의 화면 안에서 조화시키고 통일시켜서 하나의 독립된 세계를 성취한 기쁨은 진정 그리기의 즐거움이 무엇인지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허윤희_목탄으로 그리다 ● 허윤희의 작품은 그리기의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그의 작품을 보는 것은 쉽지 않았다. 타인의 일기장을 보는 당혹스러움과 부끄러움 때문이다. 인터넷의 네티즌으로 때로 철저히 익명화 되어 익명의 공간을 휘젓고 다니고 적당히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하며 사는데 익숙해진 사람에게는 이런 직접적인 고해 성사는 익숙하지 않은 탓이다. 이 고해성사는 그 절실함과 진정성 때문에 우선은 듣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감수성이 예민한 젊은 여인의 내면의 공명관에서 반복해서 울리는 것은 모든 '사라지는 것들', '지속하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애가(哀歌)이다. 시간에 결박되어 소멸하는 모든 존재의 취약함에 대한 애달픈 연민은 작가의 모든 것에 뿌리내린 생생한 현실로 체험된다. 마치 프리다 칼로가 앙드레 브뤼통에게 자신의 그림이 초현실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처절한 현실 자체라고 했던 것처럼 허윤희의 작품은 자신의 존재에 즉해 있는 현실이다. 그 절실성과 진정성으로 작가는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쓴다. 화면의 4/5를 차지하는 땅 위에 누워있는 인물은 하늘과 물 사이에 겨우 끼어 있다(Thirst, 1997년 작). 허락된 공간의 협소함은 소금물을 들이키는 갈증으로 느껴진다. 망망한 대해에 떠 있는 모습, 힘겹게 노를 젖는 모습, 무언가를 소중하게 끌어안는 모습, 무릎을 꿇고 통곡을 하는 듯한 모습이 반복하여 그려진다. 이러한 모습은 철저하게 작가의 내면의 기록이다. 작가는 세계를 향한 갈망을 절실하게 표현하고자 한다. 그러나 작가는 자기 밖에 있는 그런 세계를 함부로 바꾸려하지도 객관화시키려고 조차도 하지 않는다. 독일 유학 시절 작가는 독일 브레멘시의 오스트홀트-테네바 구역에 있는 저소득층 고층아파트 계단의 각층에 사람들이 해 놓은 낙서 위에 자신의 그림을 살짝 섞어 놓는 작업을 한 적이 있다. 이는 작가가 세계를 대하는 태도를 매우 완성도 있게 미학화 한 것이다. 작가는 그 아파트의 낙서를 지우거나 덧칠하지 않고 그 위에 작고 부드러운 흔적을 남겼을 뿐이다. 이는 작가가 함부로 세계에 대해서 정언 명제로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작가는 단지 그런 취약한 세계의 모습을 일견 운명처럼 수긍하는 듯 하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존재의 취약성을 예술로 보충하려는 혁명의 노래가 아니라 세계의 아픔을 노래하는 길고 긴 애가가 된다. 취약한 현실을 보듬는 가녀린 숨결같은 노래말이다. 작가의 애가는 아도르노적인 의미의 '예술은 눈물 없는 울음'에 말 그대로 조응한다. 아도르노에 따르면 예술은 "사회의 밖에 존재함으로서 사회와 관계를 맺고, 소통을 거부함으로써 사회와 소통을 하고, 비화해적인 것을 증언함으로써 사회와 화해를 제시하는 역설, 이 역설을 통해 현실에서 불가능한 '화해'를 제시하려고 한다. 이 무기력한 구원 행위가 바로 예술의 존재의 의의다. 작가가 원하는 것은 이런 세계에 대한 원망이 아니다 세계에 대한 지술이다. 이러한 간절한 소통에 대한 욕구는 입에서 꽃이 뿜어져 나오는 모습으로 형상화 된다. 이 말은 응답이 없는 독백과 같은 말이다. 왜냐하면 작가는 세계를 객관화시키기 보다 자신의 상태 서술을 우선시 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상태 서술에 집중하는 것으로 일기만한 것이 있을까? 낡은 책 위에 그린 그림일기는 처음에는 해독이 용이치 않은 독일어 책 위에 그려졌다. 해독불가능성을 해독 가능한 언어, 그림으로 치유하려는 행위였으리라. 작가가 매제를 선택함에 있어서도 이런 세계의 취약함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매제가 된다. 원래 드로잉은 작품을 그리기 위한 밑그림 정도로 이해되어 왔다. 독자적인 장르로서 인정을 받은 것도 최근의 일이다. 허윤희의 작품 세계 속에서는 드로잉은 그 자체로서 완성된 존재로 더 이상의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부드럽고 빠른 묘사가 가능한 목탄은 모든 덧없이 소멸하는 것에 대한 순간적인 기록에 적합하다. 역사로 기록되지 못하는 사소한 존재들의 명멸은 우리에게 기억이라는 형태로 보존된다. 덧없기에 명료한 모습으로 기록되지 못하며 불확실한 기억의 편린으로만 존재하는데, 목탄은 기억의 반추작용처럼 작가가 어떤 모습을 반복해서 그리고 또 지우면서 화면을 구성하는 데 용이하기 때문이다. 애써 그리고 나서 이내 지워버리는 대형 목탄 벽화 작업도 이런 세계의 취약성에 조응하는 행위이다. 허윤희의 그림은 묘사와 그 내적인 파토스에 있어서 바젤리츠를 연상시킨다. 세계에 대한 논평이나 텍스트가 아니라 스스로 불안전한 세계의 일부라고 생각하는 점에서 말이다. 세계가 불안전하고 덧없는 것이라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불안전한 세계를 예술적으로 보충하여 아픔을 가리는 것보다 아픔을 아픔 자체로 불완전함을 불완전함 자체로 표현하는 것도 '눈물없는 울음'을 우는 예술가의 몫인 게다. ■ 이진숙
Vol.20050626c | 창동3기 입주작가 오픈스튜디오展